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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굼벵이의 실처럼.

글이 굼벵이의 실처럼. 2013.6.30. 


오늘은 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 글이 나오지 않는다기 보다는, 글을 쓸 만큼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 내 생각의 정립과 정리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데, 오늘은 그런 시간이 없었다. 미친듯이 문제를 풀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교환을 공격적으로 했으며,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입 안에 밥알을 쑤셔넣어야만 했다. 그리고선 지금이 되었다. 


벌레 한 마리가 내 앞을 알짱거린다. 마치 나에게 자신을 좀 봐달라는 듯한 몸짓을 보인다. 죽이려고 손을 들어보았지만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눈 앞에서, 그리고 손 아래에서도 피하지 않는 이 미물을 나는 죽여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이 생물을 죽임으로 인해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인가. 벌레 한 마리가 옮길 수 있는 병균의 양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인가. 벌레도 작은데 바이러스는 얼마나 작길래, 이 작은 몸 안에 들어가서 병균을 옮기는 것일까. 사람은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병균을 옮길 수 있을까. 벌레보다 몇 백배는 큰 몸을 가진 사람은 병균 뿐만이 아니라 왜곡된 생각이나 틀린 이야기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니 그 해악으로 따지자면 우리 사람들이 벌레보다 더 큰 해약을 끼치는 것은 아닐까. 우리도 우리보다 높은 존재라고 생각되는 나무나 돌, 그리고 금 덩어리 앞에 가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달라 기도하고 빌어보고 울부짖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신이거나 절대자이겠지만 그들이 우리를 볼 때, 내가 금방 고이 하얀 휴지로 생사를 여탈한 이 벌레와 같지 않을까. 벌레 한 만마리가 배를 위로 한 채 흰 휴지 위에 죽어있다. 그 사이 또 한 마리가 나타나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노트북 뒤로 이리 저리 날아다니고 있다. 사람이 무서운 이유는 끊임없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존경스러운 이유도 끊임없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과거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나 위인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던 것에는 찬사를 보낼 수 있으나 앞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주인공들은 태어날 사람들이며, 지금 우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섭다. 사람들이 아기를 많이 낳지 않는 것이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인구는 늘어나기 마련이고, 그 인구들을 먹일 만큼의 식량은 다소 부족하거나 어느 지역에만 가득차 있는 창고를 갖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또 선의로 혹은 악의로 다른 나라의 굶주리는 미래의 주인공들을 위해서 우리는 손발을 돕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무섭다. 그 무서운 이유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산시키고 확인시키고 또 그 증거를 지구 위에 남기기 때문인데, 내가 죽인 벌레 한 마리와 지금 다시 날아온 벌레 한 마리를 보면서 나는 겁을 먹었다. 결국 우리 사람이 살고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벌레 역시도 살고 죽는 것이다. 살고 죽는 것에는 사람이든 벌레이든 그 차이는 없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 과거 인권을 위한 노력들에게 지금에서야 고맙지만, 그것들이 우리가 벌레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살다보면 벌레보다 못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도 인간이기에 존중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 역시 권리만큼 엄중한 것이다. 


글을 적다보니, 적고 싶은 주제들이 몇 가지 떠올라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작년, 멸망에 대한 기대 혹은 우려가 있었는데 지금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떻게 그 멸망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인권이 보장해야하는 한계에 대해서. 

미래를 위한 현재 세대의 조언. 

등.. 


생각을 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내 뇌가 드디어 본래의 기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 뇌의 본래의 기능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다시 생각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