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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2013.10.9.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 생각했다.


이 땅 위에 서 있거나 누워 있는 사람들, 혹은 물 속에 있는 사람들 모두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다행인지 모른다. 자신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누군가 한 명은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살았든 죽었든 그것은 관계가 없다. 단지 자신이 사람의 사람이라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 그것이 죽음이지 않을까. 그렇지도 않을지 모른다. 죽음이라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다.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의 단절, 그것이 자발적인 일이든 비자발적인 일이든 우리는 어쨌든 그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 그것은 이 지구 상 누구든,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하나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은 걷지도 못하고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걷게 되고,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다. 그때도 우리는 우리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마 평생 인식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임박해서야 자신 역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몸, 결국은 여자의 몸이지만 우리는 여자의 몸을 통해 남자가 되기도 다시 여자가 되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다른 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역시 사람인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으니 사람이라는 논리는 이토록 간명하다. 


어린 시절,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노력은 때로는 힘들거나 때로는 보람되다.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알아야만 하는 것은 자신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나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질문에의 대답으로 이어가는 것이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왜 중요한가. 왜 이렇게 반복하는가.


우리가 사람의 몸을 빌어 태어난 만큼 그만큼의 사람으로서의 사람다움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되 사람이길 포기한 여러 사람들을 본다면 그 사람을 낳은 사람은 무엇이 되겠는가. 


정답은 사람이라는 신파조 정치인의 말 한 마디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그 길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점멸해가는 별이 그 별의 시작이 아주 작은 폭발이었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