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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7. 04:57 카테고리 없음

태초에 빛이 있었다. 2013.11.7. 


자신의 기준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길이 아니다. 단지 이어져 있는 어떤 공간에 불과하다. 기준이라는 것은 시간을 단지 흘러가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길을 공간이 아닌 자신이 닿고자 하는 어떤 곳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자 방법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을 갖도록 한다. 


자신의 기준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길을 찾을 때, 지도가 없거나 최근 문명기기인 스마트폰 지도앱이 없다면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기준을 찾는다는 것은 지도를 보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일테지만 그 어려운 방법을 획득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다. 그것이 기준을 찾는 첫 번째 방법이자 기준을 갖는 첫 번째 순서다. 


기준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기준을 갖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면 왜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몇 가치 차원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국제정치학에서 가장 초보적인 지식으로 배우는 '개인, 국가, 국제사회'라는 틀을 사용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개인에게 있어서 기준을 갖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은 많다. 아니,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도 무방하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책을 보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만난 사람은 거의 없다. 부모가 차려준 밥을 먹어야 했고, 우연히 자신의 집이 위치한 학군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으며 자신이 원한 수업을 듣기보다 학교에서 정해준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다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그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선택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에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길에서는 용기는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착실히 따를 용기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것으로부터 얻는 이득이란 자신의 용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호된다는 것을 매번 재확인하는 것에 그친다.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 새로운 길을 찾거나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 혹은 싫어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 책임이란 자신이 지지 않아도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일종의 협박을 들으면서 자라야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욕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내재해있다. 그것이 실제로 표현된 것이 살인이라는 범죄이며, 국가적 차원에서는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뜬금없이 살인이라는 극단적 단어를 사용해가며 몇 문장을 썼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는 책임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은데, 그런 행위를 선택한다면 그것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 것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인식 속에서 다른 사소한 선택들에게도 우리가 누군가를 죽였을 때와 같은 책임을 져야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는 않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데 거의 대부분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선택을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선택을 따라가는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며 또한 현실적인 일이다. 우리는 이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이라는 것에 의해 기준을 갖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또 어려운 일인지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통해서 자신의 선택을 포기한 것, 이것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한 쪽면, 즉 스스로 포기한 기준의 설정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개인이 자신의 선택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갖는 것을 억지로 미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은 안돼' 라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듣는다면 '왜 지금은 되지 않지?'라는 반문이라도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지금은 안돼'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항상 그 반응은 '알았어'로 끝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자신의 기준을 찾고 가지고 설정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지고 싶은 기준을 잠시 유보시키고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는 기준을 따라가면서 자신에게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통해 위안 삼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아마도 죽을 때 즈음이 되어서야, '이제 나는 죽고 싶다.' 라는 기준을 설정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들 사이, 딱 하나, 즉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자살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서야 '지금까지의 삶의 기준은 모드 허황된 것이었어. 드디어 나만의 기준을 찾았어. 그것은 바로 나는 내 기준이 없다는 것이고 그 증명으로 나는 이 몸뚱아리를 포기하려고 해'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개인이 기준을 갖지 못하는 또 다른 측면은 자신의 기준이 현실 세계에서는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현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던지 나에게 무슨 일이든 일어났을 때 그것이 나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던지 어느 누구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의 실현 불가능한 것들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어떤 남자가 복권을 한 장 샀다고 하자. 그 사람은 자신이 복권에 당첨되면 어떤 일을 할지 매우 체계적으로, 마치 진짜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준비해 놓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운이 없어서 가 아니라 복권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기막힌 확률게임에 의해서 복권 당첨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세워두웠던 기준, 즉 복권에 당첨되면 이러저러한 삶을 살아야지 하는 기준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기준이란 것이 얼마나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많이 발견되는지는 일일이 예를 들기도 어려울 정도. 하지만 그런 수많은 예들이 존재함에도 그 모든 예들의 예외가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그보다 더 많은 것은, 우리가 복권사업을 포기할 수 없거나 종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우리는 기준을 가졌거나 혹은 기준을 가지지 못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본인이 생각하기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세 가지 이유들에 포함되거나,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포함되어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신에게 '기준'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로 넘어가보자. 자신의 기준을 갖는데 국가의 차원에서 무슨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사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러한 실패 이유들의 근원에는 국가가 일조하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국가는 개별 국민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다. 사회라고도 표현되는 국가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규칙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을 우리는 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윤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는 '튀지 말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 유지의 목적이 개인의 행복 신장 혹은 추구에 있다는 것은,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당시 종교적 자유가 행복을 담보할 것이라는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유포되었을 당시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국가는 개인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결국 각 개인이 가져야 하는 기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무정부주의를 이념으로 삼아본 적은 없는 본인이게도 국가의 규모가 확대되도 또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중요시 되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국가는 개인의 기준 설정이나 기준 모색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곳에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부모가 원정 출산을 해서든 자녀에게 갖게 하고 싶은 국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개인은 국가를 선택한 적이 없다. 성인이 된 이후 국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하더라도 어쨌든 국가의 틀 내에 편입되기를 바라는 개인들에게 국가는, 그 국가의 법, 윤리 혹은 '튀지 마라'를 주입시킨다. 법이라는 테두리를 통해서 누군가가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 검사나 판사 혹은 변호사와 같이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주선하기도 하고, 윤리를 통해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온갖 철학 서적들을 뒤적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국가 체계에 잘 순응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튀지 말라'라는 이야기를 마치 바람 소리가 들리듯이 물소리가 들리듯이, 아니 자신의 숨소리를 듣듯이 듣도록 한다. 이런 체계적이고 철저하고도 또 직접적인 간섭은 국가라는 틀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그 절박한 심정을 다소나마 엿보게 한다. 하지만 국가도 항상 이런 노력들에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폐쇄회로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나라라고 할지라도 사각지대는 있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 혹은 자유를 표현하지는 않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공유하고 또 행동으로 나서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국가 체제의 반항 혹은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몇몇 있어왔고 이것을 국가의 발전이나 역사의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 결국 이 사람들이 만든 것이 또 다른 국가라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는 땅은 존재하지도 않고 모든 영토들은 국가들에 의해서 나뉘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국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방법은 새로운 섬을 만들거나 아니면 정신승리의 방법을 통해 국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 상황에서의 국민이라는 지위를 즐길 수 밖에 없다. 새로운 국가는 과거와는 다른 국가를 지향하지만 매일 매일 매시간 마다 바뀌는 국가가 되기를 원치 않는 마음은 동일하다. 어쩔 때는 이런 것이 국가인가 싶기도 한 국가 역시 그것의 영속성을 지키기 위해 개인들에게 자신만의 기준이든, 국가에 대한 기준이든 어떤 기준이든 그것을 형성하도록 자유롭게 내벼러 두지 않는다는 것은, '그 따위 국가'도 결국 국가라는 것을 인정케 하는 마지막 포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라고 적어두긴 하겠지만, 국제사회라기 보다는 지구 상 혹은 인류의 비애 라고 해두는 편이 더 낫겠다. 단 한 명이라도 이 지구상 위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름을 한 번 읊어보라. 종교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뛰고 뇌에 혈액이 공급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영원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지구상 혹은 인류의 비애라고 부를 수도 있는 조건에 의해서 우리는 기준을 만들지 못한다. 국제사회는 집어치워야겠다. 국제 사회는 얼어죽을 국제사회. 개인도 아닌 국가도 아닌 우리가 자신의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죽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가까운 장례식장에 가면 그곳에 망하지 않을 것임을 실감하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고 인류가 늘고 늘고 늘어서 우리가 걸음을 걸을 수 없을만큼 뺵빽한 땅 위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기준을 정하고 삼는데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기 때문에 지금의 기준이 의미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절대 명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비관론이나 회의론까지는 언급할 필요도 없이 사람은 죽기 때문에, 즉 하루 하루를 죽음의 날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기준을 세울 필요성과 기준을 세울 목적을 찾지 못한다. 단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상황에서 10년 뒤의 자신, 20년 뒤의 자신을 위한 기준을 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런 반박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런 기준이 없어도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직업을 갖고 사랑을 하고 자녀를 낳는데 이런 사람들의 소소한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이런 반박은 충분히 제기 가능한 반박이지만 내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자신의 기준'이라는 것은 직업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사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의 세부적 선택의 기준이 아닌 자신이 이 삶을 유지할 것인가 유지한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 유지할 것인가를 묻는, 큰 기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현학적이고자 할 의도는 없지만,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라는 것의 기준보다는 더 큰 기준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죽는 것, 이것이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는 비애라고 하면 비애인 것이고 이런 한계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기준을 설정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방학이 다가오자 방학 계획을 열심히 세우고 있다고 해보자. 방학 계획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수영장 가기, 방학 생활 풀기, 친구랑 여행가기 등등의 세부적인 사항들이 들어갈 것이다. 이 초등학생은 그것을 그림으로까지 그려 자신의 방문에 붙이고 어서 방항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학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초등학생은 뺑소니 사고를 당해 죽고 만다. 이 초등학생에게 방학 계획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자신이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스스로가 정할 수 없는, 물론 정하는 사람들도 많고 늘어나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떤 삶, 심지어 그것이 방학이라 할지라도, 을 살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국제 사회 따위의 말이 아닌, 지구상 혹은 인류의 비애의 측면에서 우리가 자신의 기준을 찾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앞서 세 가지 관점에서 자신의 기준을 찾지 못하는 이유들을 살펴보았다. 하나하나 다시 짚어가며 요약해줄 생각은 없다. 다시 읽어보면 될 것을, 마치 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독창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이유에서 요약을 하는 것은 내 손가락에 대한 예의는 아닌 듯 하다. 위와 같은 다양한 이유들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의 기준을 찾지 못하고, 삼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을 사고 있고 또 어딘선가 누군가는 자신의 기준을 찾고 있다. 그런 기준을 찾았던 사람들은 위인이 아니다. 오히려 위인들이라고 불리는 작자들은 역사라는 것이 주는 큰 명령에 스스로를 내맡긴 사람들이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한 행복을 찾았거나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준을 찾은 사람들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울로 보는 자신의 모습은 결국 거울이라는 것이 보여주는 모습에 불과하지 자신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이 글을 적기 전부터 정해놓은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있다 없다의 차원에서 문제를 삼지 않고 자신의 기준과 남의 기준을 비교하면서 문제를 삼는 것이다. 누구의 자가 더 크고 더 비싼가를 문제 삼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는 짓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자의 눈금이 있듯 없든 자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관계 없이 누구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건사고나 국가간의 갈등이나 심지어 죽음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하루를 보내고 일년을 보내고 100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독창적일 것이라고 적고 기대치만을 높인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느끼는 이런 불안함 보다는 자신의 삶의 기준이 없다며 우왕좌왕 거리며 다른 사람의 기준을 보면서 마냥 부러워하거나 따라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든다면 불안함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긴 글이지만 결론은, '당신의 삶을 살라'는 매우 통속적이고 자기계발서의 한 줄과도 같으며 지금까지 읽은 것이 아까울 정도라고 느낄 정도의 결론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기준이다. 



p.s 아, 제목이 '태초에 빛이 있었다' 인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내 앞에 스탠드 전등이 켜져 있기 떄문이다. 하지만 그 빛을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글이 시작되었다. 태초에 빛이 있었으니 우리는 그 빛을 보면서 살아가면 된다, 이정도로 마무리 하자.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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