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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없다

내일은 없다. 2013.11.24.


역사가 아무리 발전하다고 한들,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으며 자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역사가 아무리 발전하다고 한들,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으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내일은 없다'라는 말을,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오롯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일은 없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오늘일 것이며 사실은, 어제도 오늘이었다. 


시간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늘을 더욱 세분화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나누게 되었고, 더 확장 시키기 위해서 1년을 만들게 되었다. 그때 시간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오늘을 오늘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은, 그들이 쉽게 예상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늘이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이 올지도 모르고, 어제가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이 아니라, 단지 시간 상으로 '지나가 버린 것'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충격이었을 것이다. 


글에 역사를 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은 역사학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그 당시에만 통용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역사를 담되 그 역사가 10년 뒤, 100년 뒤에도 그 시대 전체와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글을 쓰는 것은 누군가 '글을 쓴다'라고 말할 때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슬퍼할 수 있고, 또 때론 기뻐할 수도 있다. 기쁨만을 가진 삶은 없고 한정 없는 슬픔만을 감정으로 갖고 있는 삶도 없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픈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 삶의 굴레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어려움은 숭고함을 낳는다고 했던가. 앞서 말 했듯이 역사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한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죽지 않고 죽은 뒤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 남아 그것을 글이든 말이든 사진이든 그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던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감정의 극한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현실감은 매우 떨어진다. 우리가 직접 겪어 볼 수 없는 어떤 것은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보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지 의심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둥글고, 우리가 글로 보는 역사, 기록된 역사 속에는 '어려움'을 느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증거들이 있다. 이런 증거들로부터 우리는 그런 어려움은 우리가 어떻게 이겨냈는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확인 자체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진 않는다.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곤, 당장의 식사일 수도 있고 자녀의 학업이나 취학, 혹은 자신의 연봉 협상 등일 수 있다. 이러한 것들도 어찌보면 '거시적'이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곤 지금 당장의 기분일지 모른다. 바로 10분 뒤에 후회할 일이라도 우리는 지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가장 큰 근거로 삼으면서 어떤 현상들에 대해서 판단하고 설득당한다.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마치 지금은 모든 세계가 '기분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양한 사례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기분의 기준은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는 순간 기분 나빠 한다. '가진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더욱 중요해 보이는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복합되어서 자신의 '선호'를 드러내게 되는데, 그 비율의 차이는 언제나 존재한다. 때로는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기도 하고 또 반대의 경우도 빈번히 드러나기도 한다. 입장을 취하는 것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악의 입장이라도 그런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반가운 일이지도 모른다. 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그 입장은 자신이 어떤 정신적, 물질적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매우 쉽게 바뀐다. 손바닥 뒤집는 것이 그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자신의 입장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에게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몇 명이든, 자신이 가진 재산이 얼마이든 관계 없이 입장이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냐, 그건 또 아니다. 입장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자신의 상황이나 주변의 상황은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어려운 기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기준 말이다. 사람을 더 확장하면 '인류'라는 기준을 대입해 볼 수도 있는데, 그 인류라는 기준이 우리가 평소 쓰는 용어가 아니라서 다소 어색해 보일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태어난 이상 이 인류의 역사성 속에 매몰되어 버린다고 하면, 그 흐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그리고 그 기준이 인류의 보편적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은 결코 선만으로 가득찬 세상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과 입장이 다른, 가끔은 너무나 자명한 '악'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어찌 보면 고맙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가 없었으면 우리는 인간의 추악함의 끝을 지금 확인해 보았을지도 모를 것이며 독재가 만약 다른 나라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지금 독재를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를 수도 있다.


이런 결과론적 도덕론은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앞으로 또 어떤 악이 펼쳐질지, 그것들이 인류에 기여하는 바가 얼마나 추악하고 클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과거의 어떤 사건들로부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수한 사례가 이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금 그런 잘못들을 아무일도 아닌 듯이, 또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차피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 배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는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오늘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을 정의롭거나 인류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으로 살지 않으면 그 의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려움은 숭고함을 낳는다. 그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오늘일 수 밖에 없고, 지금도 지구 상 위 어디선가는 먹지 못해, 자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바통을 터치 받아 다시금 누군가 태어나기도 한다. 그런 삶들에게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라는 따위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고, 어제의 노력이 오늘의 보상으로 다가 올 것이라는 거짓을 들려줄 수는 없다.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내일을 살지 않았고 오늘만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