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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람, 사랑.

삶, 사랑, 사랑. 2013.12.2. 


과거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 '나이'를 만들었고, 나이는 사람의 관계를 만들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같은 나이의 사람일 수 있으며 같은 나이라 할지라도 다른 달, 다른 날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 태어나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이 '나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만, 그때부터 그 사람의 삶이 시작한다는데 있어 그 차이는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살펴본 일이 있다. 삶이라.. 삶은 다르게 표현하면 '인생'이라 표현할 수 있는데, 인생이라는 한자어 역시도 참으로 '나이'와 많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 즉 사람이 '생' 태어났다는 뜻의 인생은, 태어나고 난 뒤의 시간이 삶이 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개나 소나 악어에게 '인생'이라는 명사를 허락하지 않으며 '삶'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들 역시도 그들이 부모가 생을 선물해주었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으나 그들이 앞으로 향유하게 될 자유와 선택의 폭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매우 좁을 수 밖에 없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매일 또 다른 생물을 파괴하거나 흡수하거나 또는 파괴되거나 흡수당해버리는 선택은 그다지 로맨틱해보지이 않는다. 


반면, 사람은 그 선택에 있어 꽤나 넓은 선택의 폭을 지닌다. 가끔은 그 선택의 폭이 너무나 넓어 몇몇 사람은 동물에게 주어진 '파괴'의 권리를 스스로에게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 선택은 어찌보면 '진화론'의 유산이자 인류 자체의 숭고함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많은 선택을 지닌 사람인 만큼 그 결과 역시 다양하다. 태어나 바로 죽는 갓난 아이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거나 또는 강압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의 죽음은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의 선택은 '존재하기로 함'이라는 가장 숭고한 것이 된다. 태어났으니 죽는다는 매우 간명한 논리가 그가 선택한 유일한 것이다. 태중에서 죽는 수많은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그 죽음은 '인간'으로서의 선택을 증명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부모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삶이라.. 결국 이 삶은 '사람'의 줄임말이 아닐까 한다. 동물이나 식물은 가지지 못한 삶. 사람을 빠르게 발음하다보면 '삶'이라고 발음하게 되는데 그 발음 사이의 시간이 우리가 선택을 하게 되는 짧은 순간이 아닐까 한다.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른 시간. 그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시간이다. 


삶과 사람은, 같이 흐른다. 바람이 흐르는데 구름이 흐르지 않듯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삶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가끔은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고 가뭄이 들기도 하지만 바람과 구름은 결국 한데서 어울려 있다. 삶과 사람 역시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이 삶은 그 사이 어려운 결정을 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치기도 하며 또 어떤 날은 너무나 쾌청한 날씨에서 쑥쑥 자라나기도 한다. 삶의 구성인 사람이 그 혜택과 시련, 고난을 다 받아들이고 있음은 더할 나위가 없다. 


삶이라, 사람이라.. 제목에서 적었듯이 한 단어가 또 떠오른다. '사랑' 


이 주제가 없었더라면 시나 소설, 영화 그 어떤 문화 매체나 인문학의 상징이 사라졌을지 생각해보면 암담하다. 마치 인간은 사랑이라는 유전을 물려받는 것처럼, 유전자에 각인된 그 어떤 감정인 사랑을 우리는 삶과 사람과 함께 연결지어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여러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주저 없이 사랑이라 대답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핑크' 향기를 지울 수는 없으나, 그런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어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혹은 가족 중 한 명을 강 건너로 보내준 사람에게는 사랑은 가슴 저린 일일 수 있다.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자신과 타인과의 사랑, 사람과 동물간의 사랑, 사람과 외부 환경간의 사랑,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 간의 사랑도 있을 수 있으며, 사랑과 사랑간의 사랑 역시 있을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간의 사랑은 그들의 생존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사랑과 사랑간의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쉽게 이야기하여 연대라 할 수 있다.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같이 살아간다는 느낌만으로, 또 그 사람을 누군가 사랑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정도로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학살'을 증오하며, 억압을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그만큼 다양하기에 쉽게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필수 요소이다. '사랑을 하라' 따위의 표현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어떤 대상이 있는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최우선의 사랑 표현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의사표현이나 감정 표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자신은 사랑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은 옛 중국 철학자들이 즐겨쓰던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확대된다면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이어닐 것이라 그들은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한계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여력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우리에게 '삶'은 노력해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은 어떤 조건이 조건으로 따라오게 되고,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드라마나 영화 속의 어떤 모습으로 밖에 그려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곤 한다. 


삶, 사람, 사랑.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의 단어이다. 어느 한 단어가 다른 단어를 포괄하지도 못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 말은 결국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일 지도 모른다. 


생각나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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