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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낀다.

아낀다.   2014.8.12. 


최근 들어 '언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언어라고 적기는 했지만 외국어의 묘미에 심취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쓰는 말이나 글의 표현들이 이전보다 나아진 것도 아니다. 내가 언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가령 '아낀다'와 같다. '아낀다'는 '아끼다'라는 동사에 'ㄴ'을 붙임으로써 '아끼고 있음'을 뜻한다. 벌써 몇 번째 '아낀다'라는 말을 적었지만, 다시 한 번 읽어봐주길 바란다. '아낀다'


누가 처음 아낀다는 말을 썼을까.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대상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을 하기 위해 누군가 처음으로 '아끼다'라는 말을 썼을 것인데,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만든 단어가 '아끼다'라는, 세 글자만 읽게 되면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드는 단어를 만들어 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아낀다' 뿐만 아니라 '가방', '꿈', '생각' 등 다양한 단어들은 왜 지금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그것을 처음 만들었거나 발음했던 사람의 목적이나 심정이 그 단어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고 그것을 처음 들었던 사람 역시도,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떤 단어라 할지라도 그것을 듣는 순간 발화자의 심정을 정확하게 받아들였기에 다시 그 단어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썼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단어가 늘어났고 그 단어들의 공유를 통해 한 단어가 정착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심정이든 감정이든 싣지 않는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라 할지라도, 예를 들어 '책'이라고 해보자, 그것을 처음 들은 사람은 그것이 '책'이라 앞으로 불리워지는 것에 있어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책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경의를 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감정을 서술하는 단어든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든 관계없이 그 단어를 처음 말한 사람과 그것을 처음 들은 사람이 서로간의 정확한 이해를 했다는 것, 이것이 핵심일지도 모른다. 


언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적으려는 것은 아니다. '아낀다'라는 말이 주는 잔잔한 울림이 있었기에 글을 적고자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당신은 무엇을, 누구를 아끼는가.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것과 아까워서 줄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낌없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있어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줄 수 있는 것이다. 돈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돈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1만원이 100만원의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가진다고 1만원 10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표면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돈을 사용하는 사람에 있어 돈과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이 주는 가치는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은 내가 가지고 있든 남이 가지고 있든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돈이 많은 사람은 아낌없이 돈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 그렇다면 아까워서 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이 항목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많다. 많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만 그 가치가 더욱 특별해지는 것이 있다. 다시 돈으로 돌아가보자. 피천득의 수필 '은전 한 닢'에는 은전 한 닢을 가지기 위한 거지의 노력이 소개된다. 거지는 그 은전 한 닢을 모으기 위해 조금씩 돈을 모았고 은전 한 닢을 갖게 된 이후, 그것이 진짜 은전이 맞는지를 물으며 그것의 표면가치를 확인한다. 표면가치는 은행에 수없이 많이 쌓여 있는 은전과 다르지 않으나 거지에게는 그 가치는 다르다. 자신이 갖고 싶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 거지에게 은전 한 닢은 아까워서 줄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돈의 표면가치가 아까워서가 아닌, 돈을 가지기 위한 과정에 있어 자신이 노력했던 것들과 그것이 자신에게만 주는 희망의 미래를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이기도 하다. 결국 같은 돈이라 할지라도, 아까워서 줄 수 없는 것은 그 자신만의 스토리와 노력 혹은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 녹아 있기에 아까울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당신은 무엇을, 누구를 아끼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무엇을 아끼는지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이력서를 적을 때 '취미'란에 적을 수 있는 것이지만, 누구를 아끼는가에 대한 설명은 쉽게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어떻게 그 사람을 아끼게 되었습니까 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가능한 것은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사랑하니까', '보살펴주어야할 듯 해서', '가족이니까' 혹은 (간혹) '저 사람은 이 세상 위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또 고통받아 매우 비참하게 죽어야 하기에 제가 지금 저 사람의 목숨을 아끼는 것'이라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간혹이라 적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세상에서 '용서'라는 단어가 남아 있고 또 그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기를 바라는 죄수들이 있기에 일상적이지 않은 주장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부정적인 대답은 차치하고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아끼게 된 대상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상대방도 나를 아낀다. 너무 간단히 주제를 들어내었다고 글을 적으면서 후회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누군가를 아낀다는 것은 자신의 아낌을 아낌없이 주어도 그 아낌의 대상이 되는 사람 역시도 나에게 아끼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서로를 아끼는 것이나 부모-자식 관계에서 서로를 아낄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수치화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느끼고 있고 그러게 느끼는 만큼 상대방도 느끼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에 '아낀다'라는 행위가 가능해 진다. 


나는 내가 만나고 싶거나 보고 싶거나 볼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사람이라면, 전화 통화를 해서라도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존재를 확인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나서 좋은 이야기만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다음의 만남에는 더욱 철저한 논리와 풍부한 감정으로 대응해주겠다며 다음을 기약하기도 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수없이 많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을 아낀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고 있고 상대방 역시도 나를 아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에, 그것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만남이나 전화 통화를 통해 '아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시작되어 유행하게 된 한 문 장의 영어는 바로 이것이다.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서로가 아끼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생각이 나거나, 과거에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던 친구 혹은 동료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본다. '잘지냈어?' 

대답이 왔다. '오~ 오랜만. 잘지냈어? 난 잘지내~' 이런 대화가 오고 가다 먼저 연락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이때부터 상황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는 사람은 연락을 하게 된 대상을 아끼는 것인데, 그 상대방이 만약 '얼굴까지 보는 것은 좀 그렇고'라는 반응을 하게 된다면 상대방은 나를 아끼지 않는다고 판단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만약 약속이 있거나 계속 바쁘거나 아니면 외국에 있기에 만나지 못한다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노력을 한다면 만나서 짧은 대화라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나지 않는다면, 아끼지 않는 것이리라. 


아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아낀다고 해서 그 상대방을 꼭 사랑할 필요는 없다. 사랑하지 않는 관계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존재함에 내가 더욱 나은 사람이 되고 또 나 역시도 상대방이 더욱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주거나, 아무런 도움이나 혜택을 주지 않아도 또는 심지어 기분이 나쁜 결론을 언제나 나도록 만드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아끼게 되면 만난다. 만나서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만남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더욱 가치있는 사람이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낀다는 것은 결국, 자신과 타인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공유이다. '기쁨의 공유'나 '사랑의 공유'가 아닌 이유는, 어떤 감정이라 특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나서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과 서로 다를 수 있는 생각들 그리고 지금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들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라 생각할 수 있기에 만나게 되고 아끼게 되는 것이다.


아낀다.


누군가를 아낀 적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아낀다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가 있다. 상대방이 나를 아끼는지 물어보아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당신이 지금 배가 어느 정도 고픈지에 대해서 설명해달라는 것과 같다. 매우 배가 고프거나, 매우 배가 부르거나, 이 둘 사이에 당신의 공복상태가 존재하고 있겠지만 그것을 확인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을 뿐더러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글이나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배고픔이 이럴진대, 누군가를 아끼는지 아끼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정확히 상대방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존재한다고 믿고 다양한 표현으로 당신을 내가 얼마나 아끼는 존재인지 설명하고자 하는 불쌍한 영혼이 있다. 단지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해야할 일의 전부일 것이다. 아끼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굳이 당신을 보려하지 않는다. 만나서 보는 것, 만나지 못하더라도 느낄 수 있는 것. 이것이 '아낀다' (마치 아마존 부족 이름 같기도 하지만.) 가 주는 선물이 아닐까. 


p.s 서두에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어떤 단어를 누군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사용하였을 때 그것을 들은 사람이 그것을 듣고 그 사람의 마음과 목적을 온전히 이해했기에 언어가 정착되고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도 설정해보았다.  아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한다는 표현이든, 좋아한다는 표현이든, 아무런 말도 없이 건네어 주는 장미꽃 한 송이든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줌으로써 마음으로 마음을 울리는 것. 이것이 아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