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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시선 2014.8.14. 


글을 시작하기 전에..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2년 간 하던 공부에서 실패를 한 후 방안에 쳐박혀서 책만 죽어라 읽던 시절이 있었다.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경우는 더이상 읽을 책이 없는 경우와 먹을 것이 떨어진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친구의 부질 없는 전화를 받았을 경우였다. 친구는 하루 한 번씩 전화를 해서 아무말 없이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기다렸다.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화를 건 친구의 성의를 봐서 '살아있다' 라고 짧게 대답을 한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럼 다시 전화가 왔다. 전화가 와서는 집 앞에 와있으니 당장 나오라는 것이다.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친구가 고시원 입구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만나기 위해 왔다며 어슬렁거리고 있는 친구에게 돌아가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친구의 시간은 내 시간보다 소중해 보였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별 말없이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으러 가서는 애써 공부와 관련없는 이야기들을 쏟아 내곤 했다. 친구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마치 '신'이 된다며, 다른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우습게 넘겨버리고, 오직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인 것인양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정치 이야기를 할 때 내가 가장 생기가 돈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친구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가끔 내게 정치 이야기를 묻곤 한다. 나는, 처음에는 내게 정치 이야기를 시킴으로써 내가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친구의 농락에 놀아나기 싫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어느 샌가 몇 술갈의 밥이 내 입에 들어가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친구의 잘못을 꾸짖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는 그렇게 욕을 먹고 또 밥값을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는 그렇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친구는 지금도 가끔 전화를 건다. 어찌나 내 삶에는 친구의 전화가 필요한 순간이 많은지, 이 친구는 시기가 지날 때마다, 마치 여름만 되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내가 어떤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전화를 걸어 내 생사를 확인하곤 했다. 이렇게 적고 있으면 내가 마치 '예비 자살자'같이 들리곤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군가의 생각보다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죽고 싶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음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기에 죽음이 내게 주는 위안 따위는 내 고민의 자양분을 받아 먹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은 내일이 두려울 때도 있다. 내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오늘을 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듯 할 때도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언젠가 거두어들일 사과에 대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과나무든 자두나무든 심지어 땅에 심어도 나지 않을 타이어를 심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주어진 오늘을 살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의미로 밖에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런 시절도 다 지나고 내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이 이제는 다소 줄어든 것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터라 우연히 지원했던 대학원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본질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밥벌이'의 문제 정도 되시겠다. 다시 고민에 휩싸인 나에게 친구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했고 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집 밖을 나가는 것을 극히 줄이기 시작했다. 친구는 이제 집을 찾아오지는 않고 내가 살고 있는 번화가 주변에 와서 이렇게 전화를 하곤 한다. '커피나 한 잔 하자' 그리고선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고 간다. 다행히 지금은 집에 쌀이 있다. 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쌀이 있으니 내심 뿌듯함 마저도 느껴진다. 이렇게 적고 있으니 헤어나올 수 없는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실상 행복에 겨워있다고 표현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큰 행복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처럼 사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은 사소한 계절의 변화에도, 하늘에서 비가 내려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또 내가 어제 적은 것처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함을 느낀다. 행복이라는 것이 크지 않으니 쉽게 행복은 채워질 수 있고, 쉽게 채워질 수 있으니 더욱 잘 쌓인다. 그렇게 쌓인 행복으로 나는 무엇을 하는고 하니 이렇게 글을 쓰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실은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지만, 이야기들을 하고 다니거나 좋은 기회나 좋은 사람을 찾아 다니곤 한다. 글을 쓰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읽는다'는 행위에 있어 지나친 수동성에 다소 질린 면도 없지 않아 좀 더 적극적인 행위를 해보고자, 쓰게 된 것이다. 작년 이맘때와 지금의 나는 달라진 듯 하다. 어떻게,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답을 찾아과는 과정에 있어 작년보다는 올해 더욱 단단한 마음과 깨끗하지는 못할지언정 더욱 넓어진 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여전히 변함없이 나에게 힘보다는 비난을 주고, 격려보다는 비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히 느끼게 된다. 가족의 가치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태양은 수소 가스를 불꽃으로 만들며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죽기 전에 태양이 먼저 사라지는 일은 없을테지만 태양 역시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나의 가족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으며 그것의 영원성을 내가 '영원히' 믿을 수 있기에 굳이 가족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딱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부모님의 노화를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직 해드리지 못한 것들이 많다. 사랑은 영원할 지언정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세는 무심하게도 한 살 두 살이 덧씌워지고 있다. 내가 삶에서 조급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빨리 성공하지 못하거나 결혼하지 못하거나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것에서 조급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얼굴에 다시는 펴지지 않는 주름이 생기는 것을 막지 못한 조급함이요, 기력이 없음을 토로하는 어머니의 짧은 탄식 한 마디를 막지 못한 조급함이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밥을 아무리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있어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시간을 바꾸지 못하면 그 시간을 더욱 소중히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몸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함께 할 수 있는 방이 있다면 나는 그 방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단 두 층. 가족의 방과 내 방. 언제나 내가 갈 수 있는 그곳으로 가기 위하여 더욱 지금 있는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밖에 없다.

밤이 늦었고,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노트북 옆에는 담배와 책이 쌓여 있다. 하나는 정신을 해치고, 또 하나는 정신을 살린다. 균형을 잡아보려 해도 균형 잡는 것이 쉽지 않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해야하는 것 중 하나가 글쓰기이다. 



글을 시작하며..


레이져에 질량이 있는지 물리학과 재료공학 등을 전공하는 다양한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친구들의 대답은 '모르겠다' 였고, 또 다른 친구들은 '레이져에 질량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측정할 수 있을 만큼 큰 질량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는 애매한 대답을 남겼다. 다른 일부의 친구들은 '없다'라고 단정지었다. 극단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조건임에 틀림이 없다. 


뜬금없이 레이져의 이야기, 그것도 레이져의 질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레이져에 질량이 있다면 높은 고층 건물이나 건물 안의 천장과 같이 우리가 손을 닿아 거리를 잴 수 없는 것들에 레이져를 쏨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량 손실을 계산하여 높이나 넓이를 계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거짓말이다. 레이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으면, 여기다 적지 않고 공대 교수들에게 메일을 보냈겠지.


레이져에 질량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오늘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시선에도 질량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안구(눈알) 질량 말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시선 말이다, 시선.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에도 질량이 있다는 증거는 많다. 심지어 누구나 실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가령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바로 앞의 사람의 뒷통수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어 보라. 그럼 분명 누군가는 뒤를 돌아 보게 된다. 당신이 째려보고 있든 그냥 멍하니 보고 있든 관계없이 당신이 지켜보는 사람은 당신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실패한 사람은 카페나 도서관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명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어보라. 그럼 당신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당신을 보지 않는 척 하면서, 당신을 흘끔흘끔 처다본다. 어떻게 그 사람들은 당신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까.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분명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그런 시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고 그 결과가 싸움이든 사랑이든 어떤 형태로든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과학적이면서 비과학적이고 상식적이면서 비상식적인 분석이 필요할 듯하여, 나는 시선에도 질량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한 곳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떤 남자 한 명이 나를 보고 있다.(혹시 몰라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남자다. 이 블로그를 적고 있는 사람은 남자다. 그리고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왜 쳐다보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 시선에 질량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했고 그 남자에게 속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 내가 집에 가서 글을 쓸 거리를 던져주었다는 것도 있지만, 항상 시선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에 질량이 있다는 다른 증거가 필요한 순간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가 대표인 증거의 하나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쳐다보면 서로의 눈동자를 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눈동자가 아니라 시선의 질량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시선의 질량을 교환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눈에 시선을 보내면 그 시선에 맞게 동등한 양의 시선을 다시 다른 눈동자로 보내게 된다. 이런 시선에는 색깔이 있어 '당신을 좋아합니다' 라는 의미를 담은 핑크색 시선이 있기도 하고, 심하게 다툰 연인의 경우에는 '당신이 싫어'라는 의미를 담은 검은 색 시선이 있기도 하다. 이 시선의 질량과 색깔을 확인할 수 있는 몸의 기관은 바로 '맹점'이다. 맹점은 빛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조직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선의 질량을 재기도 하고, 또 그것의 색깔을 알 수도 있다. 어라? 맹점이 시선의 질량을 잰다고 한다면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 중 하나이다. 빛을 받아들이는 맹점은 앞으로 들어오는 빛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시선의 질량을 받아들일 때에는 앞뒤옆 가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생각한 이론이 무너질 수 있으니 이렇게라도 우겨야겠다. 맹점이 시선을 느끼고 그 시선이 가지고 있는 질량 뿐만 아니라 색깔을 느낀다는 것은 많은 실험의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화나 영화에서 표현되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 사이의 하트 뿅뿅이라던지,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불꽃 등으로 이미 많이 표현되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시선의 질량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것이 가진 색깔이나 형태에만 집중을 해왔던 것이다. 


시선은 질량을 가지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증거는 또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그들의 직업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시선이 가진 질량 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시선을 받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연예인 혹은 유명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시선 질량 계산기'와 '시선 질량 저장용기'를 타고나거나 혹은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만들기도 하고 키우기도 한다. 때때로 일부 사람들은 시선 질량 계산기와 질량 저장용기를 갑자기 엎어버리는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성공한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은 이 도구들을 잘 관리하고 더욱 크게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한다. 선천적으로 강한 질량 계산기와 큰 질량 저장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정치인, 유명인 혹은 연예인이 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평생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갈구하며 살게 된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사람을 '애정결핍'이라 부르기도 하고, '관심병자'라는 현대적 용어를 사용해 사람들의 관심 즉, 시선을 갈구하는 사람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시선의 질량은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두 무색 즉 아무런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시선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또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시선에는 일정한 색깔이 입혀지게 된다. 앞서 설명했던 대로 사랑을 할 때는 핑크빛이 또는 갈등을 할 때는 검은 빛을 띠기도 하지만 이런 색깔은 일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평소 시선의 색깔이 정해진다. 삶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만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시선이 어둡다. 그리고 그 시선의 질량 역시도 매우 기분 나쁜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반대로 밝은 생각과 타인에 대한 믿음 혹은 희망을 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 시선의 빛이 밝다. 간혹 어두어 질 때도 있겠지만 다시 그 빛깔을 찾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무서운 이야기일 수 있다.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시선의 질량이 전해지는 형태도 다르고, 그 색깔도 다르게 된다고 하니 지금 나의 시선은 어떤 색깔인지 어떤 형태로 남에게 전해지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었을 때 몰려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개인의 몫이다. 시선의 색깔과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기나 어린 아이들과 만나면 된다. 


아기나 어린 아이들이 여러분의 눈을 보고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살펴본다면 여러분이 어떤 시선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진단법은 결코 당신이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실험 방법이 아니다. 아기나 어린 아이들 역시도 외모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좋아한다는 실험결과와는 별개로 여러분이 아이의 눈만을 보고, 아이 역시도 편안한 상태에서 여러분의 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면 외모와는 관련없이 여러분 시선의 형태와 색깔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선. 


시선은 질량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컷 질량이 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어 놓고선 '있을지도 모른다'니.. 하지만 엄밀한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지 않은 것을 사실인양 말하는 정도는 이미 충분하 내가 즐거울 만큼 거짓말을 했으니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러분들이 나의 글을 읽고 "진짜 시선이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한 번 직접 실험해보시는 건 어떨까 한다.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하지 않아도 여러분과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혹은 지나가는 아무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서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여러분의 시선의 질량(형태)와 색깔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이 좋은 반응인지를 굳이 말해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글을 마치고 나서.. 


위의 '글을 시작하기 전에...'를 지울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밝히지 않아야 할 점도 아니고 과거의 내 모습에 있어 내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나와의 대화에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 이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기록일 수 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나와의 대화를 내가 원했을 때 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은 '좋아서' 적는 것이다. 글을 적고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웃어주거나 또는 한 번 즈음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들을 던져주는 것이 나는 참 좋다. 그래서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