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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야기할 때"

"평화를 이야기할 때"  2014.09.27.


군대 생활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를 담은 글을 작년 5월 경에 적었다. (그 글은 이미 소개하기도 했고 내 블로그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읽어보시길 바란다.) 핵심적인 주장은 이랬다. 군대 문화라는 것은 군대 내부의 문화여야만 하지 예능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사회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정체되고 있는 원인 중에 '개인의 창의성 부재'가 큰 몫을 담당한다고 하면 이 창의성을 말살시키고 있는 문화가 군대 문화인 만큼 군대 문화의 사회적 유연화 역시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선 얼마 전, 군대 내의 폭행으로 인한 사망사건과 성추행 사건이 연달아 밝혀지면서 내가 비판했던 근거와는 다른 논법으로 '진짜 사나이'의 폐지 주장이 있었다. 실제 군대는 사람이 맞아 죽어 나가는 곳인데 TV에서 보는 군대는 너무나 평화롭고 개인의 내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는 듯하기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런 폐지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된 것이 '여군 특집'이다. '진짜 사나이' 제작진은 분명 지난 특집을 계기로 한숨을 돌렸을 것이다. 시청률을 회복한 정도가 아니라 기록에 남을 만한 시청률을 남겼다고 하니, 야구 감독으로 치면 구원투수의 등판이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여군 특집은 본인도 재밌게 보았다. 군대 문화의 사회적 반영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기 보다 그들이 좌충우돌 그리고 여자들 간의 진한 우정과 같은 것이 엿보였기에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배우 라미란과 홍은희는 아들을 둔 것으로 방송에 비춰진다. 아마 이 아들들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향후 입대를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라미란과 홍은희 이 두 사람에게 군대는 아들이 반드시 한 번은 거쳐 지나가야 할 관문일 수 있다.


뜬금없이 여배우들의 아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들이 군대를 가게 되었을 당시가 지금과 같다면, 결코 우리는 더욱 나은 군대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고 공식적인 '휴전' 상태에서 단 한걸음도 진보하지 못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과 의견이 존재한다. 적군의 도발을 막기 위한 억지력으로서의 군대, 자국의 국민과 재산을 방위하기 위한 수동적 목적의 군대 또는타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적극적 목적의 군대, 마지막으로 국제사회 내에서 자주적인 국방력을 갖추는 것이 국가의 위신에 걸맞는 행위라는 인식에 의거한 보유 등 다양한 보유 목적이 있을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수동적 목적에서 창설한 자위대를 적극적 목적으로 변경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고, 한국의 경우는 억지력으로서의 군대로서 주한미군과 그 보조를 맞추고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군대의 존재 목적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목적은 부수적이라고 밖에 판단할 수 박에 없다. 본인의 의견은 군대의 존재 목적은 "평화"를 위해서라 보인다.. 관념적 개념이 아닌, 실체적 평화 즉 외적으로는 자국에 공격이나 무력 행사를 할 의지나 시도 자체가 사라진 상황이며, 내적으로(국내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적에 대한 관용과 평화에의 경향성 나아가 사상적인 갈등이 해소된 상황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들은 역사 속에서 경주되어왔지만, 거의 대부분의 노력은 실패했다. 평화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국가별로 달랐던 것이 주된 원인임과 동시에 자국 위주의 평화를 무력으로 이루고자 했던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1945년 국제연합이 창설되고 난 뒤, 전쟁에 대한 법이 마련되기도 했고 인종학살을 금지하는 조약이나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 등 국제 사회는 국가별로 상이한 평화에 대한 정의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았다. 그 문제가 남은 공간은 바로 '국제'가 아닌 '국내'였다.


다시 한국의 군대, 아니 한국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시점이 되었다. 한국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진보주의자'로 구분되어진다. 평화의 주체가 대한민국으로 설정되고 평화의 객체 즉 평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는 주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이 된다. 북한과의 평화를 위한 방법은 과거 박정희 정권부터 시작하여 노태우의 북방정책, 김대중-노무현의 햇볕 정책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선핵포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나 그 실효성은 오리무중인 것이 현실이다. 북한과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으면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오리가 아니라 백리무중일 수 있으니 여전히 우리에게 '평화'라는 단어는 정치 지형에서 일부를 대표하는 양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게 옳은 것인가.


평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진보와 보수는 동일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 그 목적은 다시 평화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를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는 오히려 평화를 카오스로 만듦으로서 정권 유지 혹은 정권 탈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군대는 그 본연의 목적인 평화의 달성에 이르는 길은 찾지 못하고, 과거 조선 말기에 일어났던 '군역의 요역화' 가 일어나기도 하고 군대의 일원인 군인조차 지키기 못하는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의 대상이 반드시 북한일 필요는 없다. 북한에 대한 평화에 골몰하고 있는 사이, 군대는 결국 고인 물이 되었고 고인 물에 대한 자정 작용을 해야할 정치는 그 고인물을 퍼마시며 자기의 배를 부르게만 하고 있었다. 북한에 한정된 평화로는 더이상 새로운 군대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지 못한다. 아니, 새로워질 필요까지 없을지도 모른다. 새롭지는 않을 지언정 기존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할 시도라도 해야할 터인데 그 시도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의 대상은 '세계'가 되어야 한다. '전지구적 평화'라는 구색만 좋은 슬로건이 아닌 과거 발칸 반도의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내-외적 평화가 잘 구축되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지금 평화학이 필요하다. 평화에 대한 담론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을 경우 결국 기존의 군대는 유지될 수 밖에 없다. 군대 내부에서 평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과 전지구적 평화에의 여정을 준비해야할 뿐아니라 군대 외부, 즉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도 평화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단지 한시적인 논의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평화에의 이상적 지향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정부들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대북정책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국제 사회 내에서의 대한민국의 지위에 있어서 우리가 그다지 성공적이었거나 높은 지위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평화에 대한 아이디어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아이디어를 짜내어도 모자랄 시간에 이미 구축된 정치 지형의 패러다임에서 네편-내편을 나누어 싸우고만 있었던 것이다.


평화학.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국제 사회의 평화를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진짜 사나이'가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일지 모른다. 군대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군대의 필요성과 목적 그리고 그것이 지향해야 할 방향 등에 대한 국민적인 토론이 이뤄진다면 평화학의 기초는 마련될 것이다. 기초 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이 우수하기 뛰어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평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내 가족의 이야기이며 내 아들의 이야기이며 '여군 특집'에 나왔듯이 내 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 평화학이자 평화이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학 그리고 평화에 대한 일상적 담론이 형성되기 좋은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