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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갑을 문화 그리고 계층 사회

'갑을 문화 그리고 계층 사회'  2015.1.21. 


JTBC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한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정 게스트로 합류한 네팔의 '수잔'이라는 청년이 고정 게스트가 되기 전 '인턴(?)'으로 한 번 방송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게스트와 MC들로부터 네팔의 문화와 종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카스트'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네팔 역시 힌두교 문화권이므로 카스트 제도가 있으며 결혼 상대의 결정, 직업의 결정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카스트 제도의 틀 내에서 정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 MC 뿐만 아니라 여타 국가들의 게스트들은 '아직도 그런 신분제와 같은 제도가!' 하는 놀라움과 동시에 문화다양성을 인정하는 뉘앙스를 동시에 풍겼다. 


최근 다양한 사건으로 불거지긴 했지만, 한국 사회의 '갑을' 문화는 역사와 전통이 깊다. 사실상 일본에 의한 갑오개혁이 시행되기 이전에 오천년의 역사는 신분제 사회였다. 크게는 왕족과 양반, 서민 그리고 노예(근대적 단어이긴 하지만.)로 구성된 신분 사회는 그 구조를 변경시키려는 일부의 노력들은 여지 없이 실패로 끝났다. 갑오개혁 역시도 신분제의 철폐를 통한 평등 사회 구축이라는 대의를 갖춘 듯 하지만 사실은 조선 말기 이미 문란해 지기 시작한 신분제를 국가가 나서서 그것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그를 통해 세수 확보를 도모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식민정부에 소속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기준이 되었고, 몇몇 친일파는 기사 작위를 받아 조선 이전과는 또 다른 신분을 갖게 되었다. 


최근의 갑을 문화에 대한 비판에 대해, 마치 '역사적으로 갑을 문화가 정착된 국가이니 문제 삼을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군정기 이후 1948년 독립 이후 우리가 취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갑을 문화와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계층 문화를 우리 스스로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데 더욱 큰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자와 연구자들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니 좀 더 전문적인 해석은 여타 학자들의 저서를 통해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유주의의 핵심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정도 내에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 없이 펼칠 수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 다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결정으로 그 방향을 이루는데 도와주는 사람을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뽑는 절차이며 과정이다. 이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본인은, 한국 사회의 갑을 문화, 계층 문화는 사실 자유주의도 아니며, 민주주의도 아닌 상황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의 핵심 의제를 시쳇말로 표현한다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라 요약할 수 있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은 극소화되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 화가가 되겠다는 어린 학생이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 어느 시대에도 경제적 지원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어떤 시대와 어떤 사회와 비교한다 할지라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지원은 막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림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화가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경제적 지원은 일상화되어 있다. 화가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분야라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이미 '노력'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꿈들로 가득차 있다. 혹자들은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사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며, 노력을 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며 반문을 하겠지만 노력을 해서 성공한 그 일부의 사람들이 결코 한 사회의 평균이 될 수 없기에, 되지 않았기에, 여러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 누구나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다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라는 말에 부정적인 어투를 본인은 과감히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한가.


민주주의 핵심 의제 역시 흔히 쓰는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원하는 미래는 내가 만든다."라 할 수 있다. 작게는 구의원에서 크게는 대통령까지, 각자가 원하는 마을, 사람, 나라의 모습을 그리며 투표를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투표는 번거로운 일이 되었고, 누군가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러한 태도에 크게 반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민주화 이전의 시대의 사람들은 그러한 태도에 자신의 목숨과 청춘을 바쳤지만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다시 한 번 확립된 이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내 통장의 잔고를 더욱 늘려줄 수 있는 사람을 유명인으로 만들어 주는 법'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세금 제도와 교육 제도를 끈질기게 요구했음에도 점점 더 삶과 유리되는 방향으로 정치가 이끌려 가는 것은 그러한 '올바름'이 '경제적인 혜택'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경제에 종속된 '카스트' 사회가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고 카스트 제도에 대한 검색을 해 본 결과 "학벌 사회, 한국 사회 카스트 만들어" 등의 글을 읽었다. 대학 서열이 한 사람의 신분이 되어 버리는 위험성을 경고한 글이었지만, 이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일 수 밖에 없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명문 대학을 나왔다고 그 사람이 카스트의 정점이나 그 언저리에 머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어떤 대학을 나왔든 그 사람이 사장이 되거나, 의사, 변호사, 판사 등 사회적 지위와 동시에 경제적 혜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대학의 이름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같은 대학 내에서도 '인문계열' 학생과 '공학 계열' 학생들 사이의 취업 시장에 있어서의 카스트 제도는 만연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어느 덧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계급은 없지만 계층은 있는 사회' 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층이 어디 인지를 자신 스스로, 그리고 타인을 통해서 확인받기 시작했다. 대기업 직원이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미생'이라 부르기도 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기도 하며, 결혼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 등 개인적인 부분에 까지 그 계층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대기업 총수와 그 일가들의 행태를 보며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라는 연민의 시각 마저 보이며 일부 사람들의 경제력-권력 독점을 내면화시켜버리고 있다. 


앞서 한국 사회의 갑을 문화-계층 문화의 역사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의 갑을 문화-계층 문화를 역사적 '유물'로서 보전하자는 취지가 결코 아니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하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감히 역사를 만들 수 있는 힘이 개인 각자에게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100년 뒤, 200년 뒤의 역사가들에게 최소한 이런 한 줄의 글은 쓰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2000년 대의 한국은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와 유사한 경제적 카스트 제도를 강화하며 유지하여 왔다." 그리고 그 카스트 제도가 활성화 되는데 있어 가장 주체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일부 대기업 총수나 권력층이 아니라, 99%라 스스로를 위치 짓는 민주주의 시민들에 의해서 성립-활성화되었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이며,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훼손하는 제도라고 욕하기 이전에 우리는 스스로 카스트 제도의 나쁜 원형을 우리의 손으로 소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힌두교 카스트 제도 내에 같은 계급끼리의 연대 혹은 연대 의식을 우리 사회는 결코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어느 사이인가 연대는 '전경련'이나 '국회의원 의원회관'에서나 통용되는 말이 되었지, 필부필부의 집이나 한적한 도로 위 혹은 어린 아이가 뺨 맞아 쓰러지는 어린이집 숫자 매트 위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은 아니게 되어버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길고 지루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찾아야 할 연대, "잃어버린 연대를 찾아서"라는 책이 나온다면, 프루스트의 저 책보다 훨씬 더 긴 시간과 지루함 그리고 때로는 일부 몇몇의 피가 붉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야아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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