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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1

신나게 일하고 신나게 놀았다.’               10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정치외교학 권현우


모두 다 가지고 오고 싶었던 추억 만을, 덴파사 공항에 내려 둔 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하염없이 기뻤다. 발리에 있을 때 매일매일 일기를 쓰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을 글로 적기에는 내 글 솜씨가 그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아무리 큰 종이가 있다고 한 들, 아무리 좋은 붓과 펜이 있다고 한 들, ‘환희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기에는 신의 손을 빌려서라도 부족할 듯 하였다. 한국에 돌아 온 것이 마치 꿈인 양, 장자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다녔다는 장주지몽’,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신나게 일하고 신나게 놀았다.’ 이 말이 이번 해외봉사단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하기 위해서 노는 것도 아니요, 놀기 위해 일한 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시간을 써서 효율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역량들을 힘껏 발휘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시간적인 순서 속에 우리가 참여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시간을 창조했고, 발리와 대한민국 서울의 시간을 다른 의미를 가진 시간으로 흘러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늦은 시간, 발리의 덴파사 공항에 도착했다. 덴파사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한국 시간으로 새벽 1시 남짓, 현지시간으로 12시가 조금 넘었을까. 진정으로 발리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함께 7시간이 넘는 비행이 우리의 몸을 다소 지치게 했는지 단원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무도 힘들다는 말을 입으로는 내지 않았다. 세계적인 관광지로서의 발리를 구경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은 시간에 우리는 도착해 있었고, 밖을 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입국을 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도중, 발리에서 다시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출국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단의 일본인들을 보았고, 그들의 그을린 얼굴과 손에 잔뜩 들려 있는 선물들은, 10일 뒤의 우리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발리에 우리들의 안녕과 휴식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그들이 살아가야 할 집을 짓기 위해서 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은 조각상들, 열대지방이라 나무가 많은가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입국 심사장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입국 심사장에는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한국 사람들로 붐볐고, 우리 역시 북적대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입국 심사장에 앉아 있는 인도네시아인이 우리가 처음 만난 인도네시아인이었을까, 무뚝뚝한 얼굴로 여권과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고, 내가 항공편을 잘못 적어서 두 줄을 죽죽 그어 매우 더럽게 작성한 입국카드에 다시 한번 더 줄을 휙휙 그어 틀린 부분을 고쳐 주었다는 것을, 다시 한국에 들어올 때 되었으니, 그 입국 심사원에게 무뚝뚝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은 다소 건방진 것일까. 무사히 입국 심사장은 통과 했고, 물론 입국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우리의 짐을 찾기 위해, 매번 소의 되새김질을 생각나게 하는 수화물 벨트로 이동했다. 문제가 일어날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오히려 문제인양, 처음이라 긴장이라도 하는 것이 타국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며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런 해프닝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안심하고 있던 중, 보안 검색대를 지나고 세관 검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팀원 중 한 명이었던 오승식 군이 다소 뒤쳐지는 것을 확인하고, 왜 저러고 있나 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우리가 공연을 보여 줄 초등학교에 전달하려고 문화관광부에서 받아온 물건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숫가락 젓가락이 아무래도 날카로운 금속으로 인식이 되었던 듯 한데, 우리는 우리의 짐을 풀어서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짐을 풀어서 보였던 세 명의 세관 검사원에게 숫가락 세트와 전통 열쇠 고리를 주었다. 그들은 매우 기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의 그런 것을 받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그런 것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우리가 주었던 그 선물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에 대해서 난 아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세관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선물을 준 것이지 그들이 그것을 원해서, 그리고 시쳇말로 동남아에서는 뇌물이 통한다라는 말로 표현이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밝혀 두고자 한다. 그들의 기쁜 얼굴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선물을 받았다 라는 느낌이 강하디 강했으니, 나는 그것만을 기억하고 싶다.

 

 

공항을 나오는 길에는 많은 환전소들이 있었으나, 내일 발리의 덴파사 시내에 있는 규모가 큰 은행에서 환전을 한다는 말을 듣고 환전을 하지 않았다. 이때 환전 하지 않은 것이 나와 정윤성 군과 김성환 군을 그날 밤 다소 배고픈 잠을 들게 한 원인이 될 줄은 몰랐다. 공항 건물을 빠져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현지 해비타트의 코디네이터를 만났다. , 그전에 발리를 상징하는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리향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받았다. 발리의 어디를 가나, 그 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니, 발리의 상징이라고 불릴 만 했다. ‘동남아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현지 코디네이터를 만났다. 동남아시아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한국 사람이라고 말을 해도 순간적으로는 믿을 만큼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클라라는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우리를 환영했다. 짧은 환영을 받은 뒤, 우리는 세 대에 차에 나뉘어 첫 번째 숙소로 향했다. 왜 차를 나눠 타야만 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처음에는 다들 같이 놀 수도 없고 계속 같은 차를 타지 않는 이상 현지 운전기사와도 대화를 나눌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 등이 불만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발리는 그렇게 도로사정이 좋지 않고, 버스로 이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선호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어쨌든 저쨌든 우리는 나눠진 차에 타고 첫 호텔이었던, 플로라 호텔로 갔다. 플로라, 즉 꽃이라는 이름의 호텔이었는데, 호텔 입구로 들어가는 허름한 골목길을 보면서 여기 무슨 호텔이 있나 라고 생각했던 것을 반전 시킬 만큼의 좋은 호텔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 했던 시간이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사람들이 없었던 것뿐이지, 발리에서의 마지막 날 오후에 우리가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지나치게 번화한 거리를 보면서, 처음 발리에 도착한 우리에게는 그런 번화하지만 다소 추하기도 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발리 섬의 수줍음이리라 생각했다. 플로라 호텔에서 짐을 간단히 풀고, 우리는 다같이 한 곳에 몸을 담갔다. 그곳은 숙소의 사이에 있는 노천 수영장이었다. 하늘에는 달이 없었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하늘은 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장시간 비행에, 정신 없이 입국심사 등의 다양한 일들을 겪고 왔지만, 아무런 피곤한 기색 없이 발리에 왔는데 수영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와서 김치를 먹어보지 않은 것과 같다 는 느낌으로 수영장에 몸을 담갔다. 물은 깊은 곳과 얕은 곳이 있었지만, 다들 자신의 수영 실력에 맞게 적절한 장소에서 놀았다. 이 수영장을 시작으로 우리는 각 호텔에 있는 수영장에서 각자의 피로를 풀게 되고, 또 지속적으로 우리가 발리에 와 있다는 스스로에게 각인 시키게 된다.

 

 

한바탕 수영이 끝났을까, 오늘만 날이 아니라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서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비행의 여독을 풀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도 잠시, 수영을 지나치게 열심히 한 것일까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같이 방을 썼던 정윤성 군과 김성환 군과 함께 했던 배회가 단순한 배고픔이 원인이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하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먹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마트를 찾아야 했고, 우리는 무작정 호텔의 입구를 나와 밝은 간판이 빛나고 있는 마트를 찾아갔다. 불현듯,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화폐인 루피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인도네시아이고 마트는 가격표가 루피아로 적혀있는 것이 확실했다. 달러로 계산을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당시에는 발리의 물가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달러계산은 머뭇거리게 되었다. 달러로 계산한다는 것이, 생각해보면, 부산이나 서울이 아무리 세계적 관광지가 된다고 한들, 아무 마트나 들어가서 외국인이 이 없다며 달러로 계산해 달라고 한다면 점장이 아닌 이상 그런 사태를 해결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나 가게 점원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결국 주린 배를 움켜지고 이왕 나온 김에 좀 더 돌아다녀 보자고 생각한 우리 세 명은 끝이 어딘지 모를 도로를 따라서 걸었지만, 가면 갈수록 어두운 길이 되어 버리는 마당에 여성복을 팔고 있는 가게에서 우리는 돌아와야 했다. 그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는 길의 끝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봤던 해변 중에 가장 긴 해변, 그리고 석양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고, 앉는다면 천국이고 눕는다면 꿈 속이며, 서 있다면 영화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되는 듯한 느낌의 해변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난 그 때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의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기를 주저하게 되고, 또 주변의 상황에 비추어서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결정하다 보면, 종국에 가서는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누군가가 데려다 주는 길은 우리의 노력의 분량이 적어 힘들지는 않지만 그때의 감동은 우리가 스스로 찾아 헤매다 얻은 감동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그 어두운 도로의 골목이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처음 와 본 인도네시아의 섬이었고, 우리는 배가 고팠고 그리고 너무나도 늦은 시간이었다. 억지로 짜낸 핑계였다.

투덜투덜, 호텔방에 들어와 배를 움켜 쥐고 잠들었다. 사실 배를 쥐고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배고픈 것보다는 피곤한 것이 더욱 나에게 달콤한 잠을 선사했던지 매우 숙면을 취했다. 아침이 되었는지도 모르게 해는 떴고, 무의식적으로 다시 수영복을 입고 아침 수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