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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5

플로라에서도, 발리 타만에서도 그리고 역시 하모니에서도 우리의 첫 일정은 수영이었다. 수영장에 다들 몸을 풍덩 했다. 풍덩풍덩. 김영한 군이 방수 장치가 되어 있는 카메라를 들고 와서 사진도 찍으며 즐겁게 놀았다. 아직 그때 찍은 사진을 확인하지 않아,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사진을 찍던 중 일어난 아주 사소한 일인데, 그때에도 생각했지만, 지금도 생각해보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 있어 글로 남긴다.

물 속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고 놀고 있었다. 단체 사진을 찍는 다길래, 나는 그냥 다같이 평범하게 찍히는 것이 싫다고 여겨,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진을 찍는 순간, 물 속으로 들어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대기 하고 있었다. ‘하나, , 이라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옆에서 카메라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물론 내가 생각한대로 사진은 잘 나왔지만,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가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단원들의 성화가 꽤 거셌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가 내 오른쪽 어깨를 손톱으로 잡았고, 그 손톱이 나에게 아주 미미한 상처를 남겼다. 손톱이 살점을 살짝 찢은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3개의 자국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 개만이 흉터로 남았다. 그냥 긁힌 것이려니 했는데 가만히 보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상처가 났다며 혼자서 조용히 얕은 곳으로 가서 아프다를 연발하며 누가 그랬는지 궁금하다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같이 즐겁게 놀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톱에 긁혔다며, 중얼거리고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기분이 좋겠는가. 아무도 자신이 나의 팔을 잡았다고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내가 더욱 미안하고 또 부끄러운 것은 왜 그래야 했었는가 하는 데에 대한 반성이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다루는 것은 좋지만, 큰 상처도 아니었고 즐겁게 놀고 있는 분위기에서 단지 나만의 기분을 위해서, 좋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된다고 판단했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또 기분이 나빠졌다고 이야기를 하면, 최소한 반나절은 그것이 지속이 되던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웃으면서 놀 것을 왜 그랬었는지. 지금 이 지면을 빌어 그 때 나를 걱정해주던 다른 단원들에게 감사의 말과 사과의 말을 전한다. 아직 어른이 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가 보다.

상처는 잊은 지 오래. 저녁을 먹기 위해서 꽃 단장을 하고 로비로 나왔다. ‘단장이라고 하는 특별한 이유는 이때 입은 셔츠가 꽃 무늬 셔츠였기 때문이다. 2006년도에 아버지의 옷장에서 꺼내 입은 이후, 해운대에 가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2009년도에는 일본, 그리고 2010년에는 발리에서도 또 한번 화제가 되는 내 셔츠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왁스를 잔뜩 발라 올린 머리, 검은 선글라스 그리고 꽃 남방을 입고 로비에 있으니 완전한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손지혜 양이 입고 왔던 옷이 꽃 무늬패턴은 아니지만 내 셔츠의 형이상학적 꽃 무늬에 지지 않을 정도의 무늬가 프린팅 되어 있는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패턴의 원피스였지만, 손지혜 양은 그 옷을 맵시 있게 소화하고 있었다. 같이 로비에 앉아 있으니 다른 단원들이 한결 같이 하는 소리가 신혼 여행 온 신혼 부부라며 부러움에 찬 목소리도 아니고, 조롱의 목소리도 아닌 이야기를 하였다.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흔들려 있어 그때의 그 느낌이 정확히 전달이 되지 않았다.

식당으로 향했다. 야자수 껍질을 숯으로 이용해서, 조리에 하루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전날에 주문했다는 오리 요리를 먹기 위해, 기대감을 품고 갔다. 또 잠시 길을 헤맨 뒤, 우리 상상했던 식당과는 다소 다른 모습의 식당에 들어갔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라기 보다, 순수한 의미로 일반 발리 사람이 외식을 하는 장소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신기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식탁에는 우리가 주문해 놓았다는 오리인지 닭인지 정확히 분간이 가지 않는 조류가 테이블 당 반 마리씩 조리되어 있었다. 다시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테이블 위에 있는 조류는 우리가 주문을 하였던 오리 요리는 오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리는 병가를 내어서 쉬고 있고, 대신 닭 친구들이 우리들의 식탁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뭐 그런가 보다. 오리는 아픈가 보다.

 

 

음료를 주문하라 길래, 별 생각 없이 맥주를 주문했다. 그러자 갑자기 음식점 직원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맥주가 없다며, 꼭 마시고 싶은지 다시 물어보는 것이었다.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있다면 마시고 싶다고 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 현지 코디네이터를 통해서 알아보니, 맥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주변의 마트에 가서 사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뭔가 맥주를 마시는 데,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맥주를 가진 것이 없는 줄 알았으면 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 번거롭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맥주를 즐겨 먹던 남자 단원 세 명이, 나쁜 짓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각자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남자 단원과 여자 단원은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크게 두 테이블로 나눠져 있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한 쪽 테이블은 더럽지만 환호했고, 다른 테이블은 깨끗했지만 배고픈 저녁식사를 하였다. 한 쪽 테이블이 남자 단원들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고, 다른 테이블이 인솔 장학주임님과 여자 단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나를 포함한 남자 단원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손을 씻으라는 물을, 다른 단원들에게 마셔보라며 권하는 것으로부터 장난을 치기 시작하면서, 그 물에 손을 깨끗이(?) 씻고 카레 향이 나는 닭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이용해서 밥과 닭 요리, 그리고 우리나라의 김치와 비슷한 것이라 생각되는 매운 향이 나는 야채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닭 요리는 카레 향이 났지만, 입 속에서의 매운 카레 향이 아니라 입술을 맵게 만드는 카레 맛이 기억에 남는다. 매운 닭 요리에 매운 야채 요리를 먹으니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입 안과 입술을 차분히 하기 위해 밥은 많이 먹었다. 남자 단원 4명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닭 반 마리는 양에 찰 리가 없었고, 발리에서 가장 즐겨 먹었던 사테즉 꼬치와, 배를 채우기 위해 구운 닭 요리를 주문했다. 사테는 우리가 익히 맛을 알고 있던 터라,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던 구운 닭 요리가 우리의 입맛에 딱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 우리는 대박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거의 일인당 한 마리 정도의 양을 소화시켰다. 소문이 옆 테이블에도 전해져 여자 단원들도 닭 요리의 맛을 알기 시작하였고, 공감대는 형성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킨 요리는 처음 먹었던 카레 향이 진했던 닭을 그냥 구운 것인데, 카레 향을 연하게 입혀서 구워주는 요리가 있다 길래 주문을 했다. 첫 요리와 향은 비슷했지만 카레 향은 연했고, 닭 고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우리의 행복 수치를 낮추지 않을 만큼의 맛을 보여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태양이 비친 곳과 비치지 않는 곳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 인양, 남자 단원들은 웃는 얼굴, 여자 단원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입은 삐죽이 튀어 나와있었다. 개인적으로 손으로 음식을 먹었던 기억은 5살 때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공장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인도 현지 카레를 들고 와서 손으로 먹었던 기억과, 작년 라오스에서 약 2주간의 손으로 먹었던 기억이 있었지만, 이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손으로 먹은 닭은 또 다른 추억으로 남아 있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요리가 닭인지 아닌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이 우리의 접시 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 진실성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닭의 머리와 그 머리 위에 있는 벼슬, 그리고 엄마 닭에게 발톱을 깎지 않았다며 꽤 혼이 났을 법한 발톱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도록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었다. 이런 증거들이 우리의 식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을 보니, 우리가 배가 고프긴 고팠나 보다.

다시 하모니 호텔 근처로 돌아오니 시간은 약 10, 현지시간으로 9시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거의 저녁을 5시 반에 먹거나, 늦어도 7시에는 먹었는데, 저녁 늦게 먹는 것도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된 듯했다. 저녁을 먹고 난 이후는 온전한 자신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번화가에 왔겠다 다들 격양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현지 시간으로 11시에 다시 호텔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잡고 안전을 위해 그룹을 이루어 르기안 지역을 어슬렁어슬렁 대기 시작했다. 현지 운전기사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 잠시 르기안 지역을 설명하겠다. ‘2002년과 2004, 두 번의 폭탄 테러가 지금 여러분이 있는 이 곳에서 있었다.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과 뉴질랜드 사람이 사망했다. 그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저기 서 있다. 저기서 사진 찍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석에는 그때 죽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테러가 있었을 때, 여기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그때의 폭발 규모를 상상할 수가 있다. 테러 지역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고막이 터지고,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폭탄을 실은 차가 와서 그 상태 그대로 폭발했다. 많은 외국인이 오기 때문에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라는 내용을 자카르타 출신의 기사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테러라는 것은 항상 나와는 거리가 먼 것, 내가 어디에 있던지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테러가 실제로 일어난 곳에서 우리는 밤을 보내야만 했다. 얼마 전,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당신을 괴롭히는 불안 요소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많은 영국인들이, 이라크 전쟁 후의 테러 위협을 지적하기 보다, 자신의 집에서 자유로이날라 다니는 파리를 실질적인 불안 요소로 대답한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상상력을 총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그것에 대한 정보와 공감대는 형성시키기 어렵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따르면 바로 옆의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음에 대해서 그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도 실제적으로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서, 다시 말해 감정의 수준을 낮출 수 있을 만큼 낮춰야 상대방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테러라는 우리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두 번 다시 모든 경험의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경험에 대해서 공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적 관광지의 번화가인지라 외국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았다. 오히려 현지 발리 사람이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기까지 했다. 국적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인, 백인, 유럽인 등의 표현으로 밖에 서술하지 못하는 인종의 사람들은 다같이 맞춰 입은 듯이 빈탕맥주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들은 조금씩 취해가는 듯 하였다. 또 다시 발리 현지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빌어 말하면, ‘백인들은 술 마시면 미친다.’

한국에는 매우 고가의 브랜드로서 티 한 장에 10만원이 넘는 가격을 자랑하는 폴로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가 있다. 내가 26세가 되도록 가져보았던 폴로의 물건은 셔츠 한 장이 전부였고, 그것도 설날 선물로 옛 대학 동기 형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폴로 매장이 5분에 한 곳씩 있는 이곳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가치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곳인가 하는 생각에 호기심 반, 물욕 반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보니, ‘폴로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한국인은 나뿐 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시 호텔로 돌아 왔을 때, 손에는 폴로를 하고 있는 남자의 마크가 그려진 종이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폴로 사랑은 이날부터 시작해, 어느 관광지를 가든 누군가 한 명은 항상 폴로의 물건을 샀고, 돌아오기 전 날의 마지막 쇼핑에, 어느 단원들은 다른 이의 달러를 빌려가며 폴로를 샀다. 그리고 나도 폴로 티를 샀다. 빨간 색 단색의 티. 내가 산 폴로가 한 장의 플레인 티라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절제하는 듯한 인간의 풍미가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고, 하나 있었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아 사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에 근접한 변명일 듯 하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 있는 르기안 지역은 바다와는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걸어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고, 그래서 서울의 신촌쯤 되는 곳에서 단원들은 쇼핑을 했고, 나는 눈으로 물건을 샀다. 11시 즈음이 되었을까. 호텔 로비에 사람들이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했고, 전쟁터에서 전리품을 획득한 사람의 표정인 사람과, 마사지를 받아 마치 자신의 영혼을 발리의 안마사에게 팔아 버린 듯한 표정으로, 세상 어느 순간보다 지금 자신의 몸이 가볍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났다. 

각자의 방에 들어가, 10분을 쉬었을까. 르기안에는 클럽이 있다는 사실을, 문제의 현지 운전기사가 알려주었고, 나는 그 사실을 친절하게도 다른 단원들과 공유했다. 정보는 공유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니, 그러한 숭고한 일을 나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은 내 방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언제 출발을 할 것인가 에 대한 논의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10분 뒤에 로비에서 보자. 이미 공격명령은 떨어졌다. 그냥 입고 있는 옷을 입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시내로 나갔다기 보다는, 그곳이 시내였다. 10분을 걸었을까, 아무 곳이나 들어가자 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3층 높이의 건물에서 음악소리가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현지 기사’(자주 등장)가 각 층마다 다른 음악을 틀어주기로 유명하다는 클럽이었다. 심지어 3층에 올라가보니, 홀과 베란다가 음악이 달랐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우리는 이 클럽에서 3시간 가량을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2층에 올라갔지만, 국적 모를 백색 서양인들이,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조용한 곳을 찾아찾아 3층의 테라스로 다같이 자리를 잡았다. 건물 안의 음악과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특유의 소음이 우리들이 지금, 발리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소음을 뚫고,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발리의 날씨가 더웠던지 자신의 몸을 심하게 드러낸 옷을 입고 있는 여자 직원이 우리에게 와서 음료 쿠폰을 권하길래, 한 장을 샀다. 보드카 스프라이트인가 와 산 미구엘 맥주를 한 병 마시면서 2시 반까지 신나게 놀았다. 서울에 있을 때에도 약 4개월에 한번씩은 강남의 클럽에 들러, 추고 싶었던 춤을 마음껏 추고 아침에 돌아와서 일상을 보내기도 하는 나로서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즐겁고 또 우리를 서양인도 아닌, 그렇다고 자신들과는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아시아인으로 분류되는 우리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윽한 눈빛을 즐기면서 춤을 추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내 셔츠를 바라보니, 클럽에 나 혼자 비를 맞았던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오늘만 날인가. 클럽을 나오기 전에 혼자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다. 결국 클럽은 금요일 밤을 화려하게 밝히고 다시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