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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9

풍선 아트와 관련해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 하고 싶다. 나는 풍선 아트를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력이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아이들에게 다양한 모양의 풍선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미안한 심정은 라오스와 발리 모두에서 느낀 감정이다. 그럼 나는 풍선 아트를 언제 어디서 배운 것일까?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풍선 아트가 잠시 유행했었던 적이 있다. 학교 앞에서 다양한 풍선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와서, 아이들에게 풍선을 만들어 주면서, 홍보를 하거나 아니면 풍선을 팔기도 하였다. 그때, 초등학생 때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었고, 놀다가 지치면 공부를 하던 생활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다. 그때 풍선을 많이 사서, 풍선 아트 연습을 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니, 13살 때 잠시 배웠던 기술, 기술이랄 것까지도 없지만, 을 사용해서 다른 나라의 아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도 신기한 경험이 되었다. 처음 풍선아트를 시작하였을 때, ‘13년 뒤에, 발리에서 아이들을 위해서 풍선을 만들테니 연습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배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풍선 아트뿐만 아니라, 다른 경험들을 통해서도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신기한 감정이라는 표현보다는 자기 예언적 경험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확적한 표현일 것이다. 처음 새로운 일을 시작을 할 때나 접하지 못했던 취미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이 일(취미)을 시작을 하지만 이게 내게 언제 큰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특별한 기술을, 의지를 가지고 배우는 사람은 직업적 전문성이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새로움이 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위험 감수는 무모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말 그대로 조금씩 배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사용할 시간이 도래하였을 때, 십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내 경험 중 또 다른 경험을 하나 들어보겠다. 나는 작년(2009) 1,2학기를 일본에서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사이타마 독협대학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늦은 나이(24)에 대학을 들어 온 뒤로, 많은 대외 활동을 해 왔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직업(외교관)을 갖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본인이었지만,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교환학생이었고, 해보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교환학생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있었지, 교환학생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독협대학의 교환학생 파견 공지를 보고 난 뒤에야, 학점과 어학성적 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학성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충분히 좌절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괄호열고, 일본어능력시험2급 이상의 회화 실력을 면접 시 질문에서 해 내면 된다는 조건이 있는 것이었다. 일본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고, 일본 사람과의 대화를 하기 위해 회화에만 집중해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는 천우신조였다. 2009년의 교환학생의 경험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새로운 공부, 취미 생활로 해왔던 것이 큰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장 선상에서 언제 쓰게 될지는 모르지만,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내가 세운 법칙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준비하는 자에게는 기회가 온다.’

 

풍선 아트 하나에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군. 혼잣말이었다.

아이들에게 풍선을 만들어 주었고, 약 한달 간 삐질삐질 땀을 흘려가며 준비했던 문화공연을 시작하는 순간이 왔다.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준비했던 문화공연이기에 그곳의 무대 사정, 음향 사정 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공연을 하게 되었던 교실은 한눈에 봐도 무대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다. 잠시 좌절 했을까. 알고 보니, 그 교실이 가운데 부분이 나눠져 있는 큰 교실의 반이었고, 장막을 치우자 그럴 듯 하게 무대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학생다운 표현으로 하면, 중간고사를 망치고, 기말 고사를 공부했던 것 보다 잘 적어내어서, A학점을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성적 확인을 해보니 C가 떠 있었고, 좌절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실수하셨다며 B로 올려주셨을 때 그런 기쁨과 비교할 수 있을까. 오승식 군의 영어 사회로 공연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2시간의 공연을 예상했었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귀가해야 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고학년 학생들도 우리가 돌아가야 다음 수업을 진행한다고 하기에, 빠르게 진행했다. 정신 없이 지나갔다. 태권도를 남자 단원, 여자 단원이 힘을 합쳐 태극 4장을 하고, 남자 단원이 태극 7장을 하고, 혼자 태극을 했다. 그리고 여자 댄스, 남자 댄스를 췄고, 다같이 응원을 하였다. 응원은 동작이 크고 발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관계로 군화를 신고 태권도와 남자댄스를 해야만 했던 남자 단원들은, 군화를 갈아 신을 시간이 필요했지만, 시간 문제로 군화를 운동화로 갈아 신지 못했고, 군화를 신은 채로 응원을 했다. 하지만 왠걸, 군화를 신고 응원을 하니, 군화의 무게가 있어서 발의 회전이 빠르고, 그 움직임이 자못 섬세하게 변했다. 나 혼자만은 평소보다 더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 가지 실패했던 것은, 천장이 낮아 손을 힘 있게, 그리고 높게 펼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합창을 할 때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현지 초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도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불렀던 노래가, 대중 가요나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래라기 보다는, 유치원생들이 배우는 노래라고 현지 운전기사가 이야기 해주었다. ‘내가 유치원 시절 불렀던 노래다공식의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따지면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정도의 노래일까?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합창까지 마치고 나자 아이들은 집에 갈 차비를 했고, 우리도 이에 질 세랴 빠르게 마무리 정리를 했다. 아이들과의 마지막 악수를 나누고, 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우리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모두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때 웃고 있던 그 얼굴은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타고 왔던 차가 점심 도시락을 가지러, 잠시 멀리 떠나가 있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 이야기? 인도네시아의 어린이들과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전술 했지만 나는 합창 연습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합창곡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공연에 필요한 의상을 챙길 때, 자료집 뒤에 합창곡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자료집을 들고 왔었다. 역시 전술 했지만, 다른 단원들이 합창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뒤에서 박수 치고 있었다. ‘책 괜히 들고 왔나?’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을 때, ‘, 자료집에 간단한 인도네시아어도 적혀 있었지!’ 라고 생각했고, 자료집을 꺼내니 역시! 있었다. 내가 서투른 발음으로 인도네시아어를 하자, 아이들은 신기한 듯이 나의 발음을 따라 했다.

슬라맛 빠기 빠기이아침인사를 하고,

슬라맛 시앙  시아앙점심인사를 하고,

슬라맛 소레  소레에저녁인사를 했다.

슬라맛을 붙이고 인사를 하면, 뒷부분만으로 대답을 하는 것이 일상회화인 듯하였다. ‘화장실은 어디니라고 물었고, 아이들 한참 토론을 하더니, 학교 쪽을 가리키길래 뜨리 마카시(고마워)’라고 하자, ‘사마사마(뭘요, 천만에요)’라고 대답했다. 한참을 그렇게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고, 아이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라기라는 말이 다시라는 뜻이라는 것을, 휴양 이후의 영어를 잘했던 운전기사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고, 아이들의 말 속에 라기라는 표현이 계속 있었던 것으로 봐서, ‘다시 발리에 오세요정도의 지극히 자의적 해석을 하였다. 다시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갈 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다.

삼빠이 버르뜨무 라기’, 다시 만날 때가지 안녕히 계세요. 여기서도 라기’.

후다닥 지나갔던 공연을 마치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 매번 점심을 먹었던 곳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무엇인가 돌아갈 때가 다가온다라는 사실을 다들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마지막으로 일을 할 것이었고, 이 일이 마치고 나면, 다시 발리에서 목장갑을 끼는 일은 없으리라. 천천히 점심을 먹은 뒤, 초등학교 아이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고, 남자 단원들은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견 교환을 하였다. 결론은 지혜로운 여자로 합의가 되는 듯 했다. 손지혜 양의 지혜와는 다른 지혜일까.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전후 처리를 하는 군인들이 이런 모습일까. 몸은 이리저리 움직였으나, 그 내실은 없었다.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둥을 세우기 위한 시멘트를 남자 단원들은 계속 만들어야 했고, 벽돌을 날라야 했고, 또 쉬어야 했다. 상대적으로 시멘트를 섞는 곳에 사람이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편하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남자 단원 거의 대부분이 건물을 짓는 곳에 있지 않고, 모래와 시멘트 가루가 있는 곳에 옹기 종기 모여 있었다. 나도 확실히 이날은 쉬었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었지만, 땀이 났다가도 다시 마를 때까지 쉬고 나서 다시 일을 했다. 오후 일은 현지 시간으로 3시 반까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날은 3시까지 열심히 일하고 30분 동안 쉬자는 생각을 몇몇 단원들은 했고, 20분을 일하고 20분을 쉬는, 공평한 작업을 하였다. 계속 쉬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워낙 시멘트를 섞는 일이 힘이 들고, 한번에 많은 양을 섞었으므로, 남자 단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해야 했기에, ‘마냥 논 것 아니냐라는 비난은 삼가 주시라.

완연히 오후가 되었고, 내 전투화는 3시부터 깨끗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깨끗하군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고생했지만 내 전투화도 많이 고생 했겠군 하며, ‘쉬시게라고 말했다. 그때 내 전투화는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옆의 다른 전투화들도 목욕재개를 마쳤거나, 마무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일이 끝났다. 다음날 수요일 오전의 환송 파티 때, 가끔씩 붉은 입술을 하고 우리를 놀래 켰던 주인 아저씨와의 간단한 행사를 마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발리의 공기 들이 마시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었다. 이날은 일을 비중 있게 한 날도 아니었지만, 오전의 공연의 여파로 피곤함이 배가 되었다.

다른 날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이날, 우리가 일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노라면, 우리가 집을 짓고 있는 동네의 다른 주민들이 옷을 차려 입고, 머리에는 과일을 가득 이고, 통 돼지 구이도 한 마리 구워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지 운전 기사에게 오늘이 특별한 날인가 라고 물었고, 운전기사는 오늘이 아마 이 마을의 신에게 축복을 비는 날일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머리에는 과일을 가득 이고라는 표현을 좀 더 설명을 해야 할 듯한데, 과일을 어떤 틀에 끼워서 높게 만들어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으로, 높이는 약 80센티 미터 정도가 될 듯했다. 앞서서 남자가 통 돼지 구이를 들고 갔고, 나이가 많이 든 여자가 과일이 높이 쌓인 쟁반을 머리에 이고 갔고, 행렬의 마지막에 그냥 봐도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 높지 않은 과일 쟁반을 이고 갔다. 행렬은 한번에 모든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고, 마을의 사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원에서 기도가 마치는 순서대로, 과일을 이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도 10분 정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곳까지 가서야 큰 사원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우리가 일하는 곳까지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과일 쟁반을 이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도, 돼지 통구이를 들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도, 그리고 졸랑졸랑 따라 다니는 어린이들의 얼굴 어느 누구의 얼굴에도 찡그림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신들의 섬발리.

호텔에 도착하자 마자, 언제나 그렇듯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뛰어 들었다. 보통 4시 정도에 호텔에 도착했으니,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는 여유롭게 수영을 할 수 있었다. 이 날은 마지막 수영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수영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영을 하고 있으면, 해변 쪽에는 항상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이들은 액세서리나 천 등을 팔았다. 수영장과 해변의 경계는 수영장의 물 안이냐, 밖이냐의 차이뿐이었다. 손을 뻗어 보아도 아무런 것도 잡히지 않았고 내가 그들과 소통하지 못할 그 어떠한 장벽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내가 호텔 옆에서 물건을 파는 이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 잡혀서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하지만 아침 7시에 밥을 먹으러 호텔 식당에 가도, 우리와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입으로 숫자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고 있으면, ‘저들은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일 거야. 내가 사주지 않아도 저들은 삶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명확한 판단은 서지 않았다. 두 가지 다 틀린 상황 판단일 수 있지만, 무엇이 현실이었는지, 또 내가 어떻게 판단을 하는 것이 나의 통찰력에 도움이 되는지는 정답은 없는 것이리라.

빈곤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절대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개인과 시장이 노력하고, 정부가 어느 일방이 지속적인 손해를 감수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다면 절대적인 수준의 간극은 메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은 내가 지구 상의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부유한 사람들의 비교는 과욕일 수 있고, 통사(通史) 안에서 혁명의 원인이 되어 왔지만,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비교는 심장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다. 지금 내가 해결할 방안은 이것이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구분되는 그들’, ‘개발도상국선진국’, 그리고 가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간극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임과 동시에, 반드시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발리에서 참 생각이 많았나 보다. 또 혼잣말.

수영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전에 발리에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하디스 마켓에 갔다. 전날 공연을 위한 옷을, 사람수에 맞춰서 샀는데, 그 중에 꽤 예쁜 옷이 있었던지 남자 단원, 여자 단원 그리고 나도, 다시 가서 쇼핑을 하고 싶다는 주문을 외워, 또 하디스에 갔다. 나는 딱히 뭐 살 것이 없었다. 저녁에 마실 맥주를 사 놓았다고 하니, 맥주를 살 필요도 없었고, 시간도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의류를 판매하는 2층에 올라가서 혼자서 조용히 구경이나 하자고 생각했다. 이리 저리 둘러보니, 괜찮은 옷들이 제법 많았다. 영어로 발리발리라고 적혀 있는 분홍색 티를 하나 일단 발리 기념품 느낌으로 하나 샀고, 다시 또 옷을 찾기 시작했다.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멀리서 ‘50%’라고 적혀 있는 팻말이 보였다. 뭐지? 가까이 가서 보니, 다양한 브랜드의 옷이 진열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세계 각국 의류의 공장이 있다는 사실은, 르기안 지역에서 싸디 싼 폴로를 보면서 알고 있었지만, 폴로뿐만 아니라, 퀵 실버, 나이키, 버버리 등의 브랜드의 옷도 생산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반바지를 하나 샀고, 버버리 문양이 박혀 있는 카라 티를 하나 샀다. 버버리 문양이 박혀 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진품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 하지만, 굳이 진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티 자체의 디자인과 재질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샀기 때문이었다. 바지와 함께 색깔 맞춰 입으면 젊은 영국 신사의 느낌이 들었다. 환전했던 거의 모든 루피아를 사용했고, 나머지 루피아는 기념으로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옷을 사서 돌아오니,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보이는 옷을 싸게 샀다는 것을 살짝 자랑하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호텔 근처의 해변가 식당이었는데, 주말에 휴양할 때 보다는 조용한 분위기였고, 음식은 그냥 뷔페였지만, 음식의 질이 좋았고, 우리만의 식당인 것처럼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