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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10

태어나서 이렇게 긴 글을 적기는 처음인 듯하고, 또 중간중간 생각들을 적어 넣으면서 글을 적느라 밥 먹었다. 어디 갔다. 뭐 했다식의 글을 적는 것보다는 체력 소모가 꽤 큰 듯 하다. 읽을 때는 한번에 주욱 읽을 수 있는 분량(?)인지는 모르겠으나, 발리를 갔다 오고 난 뒤, 바로 그 다음날(13)부터 적기 시작해 오늘(27)까지 적어도 이틀 분량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놀랍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 역사가들이나, 언제나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이름을 적는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 등을 전쟁 중에 담담한 문체와 뛰어난 필체로 적어 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을 담아 낼 수 있는 명민함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마냥 부러워지는 시점이다. 사람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대화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지만, 나의 경험과 지식이 다음 세대가 혹시 걸어갈지 모르는 길을 내가 먼저 걸어간 것이라면, 나는 글로써 그 길에 발자국 하나를 남기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난스럽게 적는 듯하면서도, 발리에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을 솔직하게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무지의 소산으로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소에서 사진만 찍고 오기도 하고, 역사가 오래된 사원에 가서도 이 사원이 언제 세워진 것인지에 대한 관심보다 마냥 좋아 망둥이 마냥 뛰어 놀았던 적도 있지만, 부끄럽지만 이런 것들도 하나의 반성문이자 나를 모르는 타인이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담겨 있는 것이라 생각해주길 바란다. 아직 글 적을게 많이 있다. 끝까지 쉬지 마시고, 읽어봐 주신다면 진심으로 고맙겠습니다. 꾸벅.

이날 밤에는 다들 방 하나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다면 길었고, 생각하기에 따라 짧을 수도 있는 일정 속에서, 각자는 다른 추억을 만들었고 또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초석을 다졌다. 빙 둘러 앉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몇 분 가량 했는데, 나는 뭐 딱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팀장도 아니고, 부팀장도 아니고, 총무도 아니다.’ 그렇다. 나는 단원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를 남이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수동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는 분위기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팀장 정윤성 군의 목소리보다, 부팀장 오승식 군의 목소리보다, 그리고 가장 나이가 많았던 김영한 군의 목소리보다 내 목소리가 가장 많이 발리에서 들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조금씩 도우면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누구나 팀장과 같은 마음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서 조정자가 되려고 했다.’라고 내가 하고 싶었던 역할을 이야기 했다. 누군가는 처음의 이미지를 의지를 가지고 바꾸고자 노력하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미지가 악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구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누가 기분 좋게 봉사활동하고 와서 자신의 이미지가 좋지 않게 비치기를 바라겠는가. 하지만 나는 내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내가 성신의 해외봉사단에 뽑혀서 우리 학교로부터 다른 학우들이 낸 등록금으로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은, 내가 이곳에서 내 모든 것을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강박 관념 속에서 매우 편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몇몇 단원의 눈물이 나로 인해 힘들어서 슬펐던 것이라면, 이 지면을 빌어서 심심한 사과의 말을 올린다.

이날 저녁에는 술을 좀 많이 마셨다. 사놓은 맥주를 다 마시고, 각 방의 냉장고에 들어있는 맥주를 다 마시고, 다시 룸 서비스를 이용해서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2시 반쯤 되었을까. 기분이 딱 좋아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야지 마음 먹고 조용히 일어나서 가려 했다. 같이 방을 썼던 정기연 군과 함께 방에 갔지만, 내가 방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창선 군이 우리 방으로 전화를 걸어 나와 통화를 하고자 하였고, 쉬고 싶던 나에게 김영한 형님과의 전화 통화를 친히연결해주어, ‘다시 방으로 가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한 뒤, 나는 양치를 다하고 속옷만 입고 있었지만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다들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어찌나 이창선 군에게 고맙던지.

내가 그 방에 가자 마자, 사람들은 하늘에 별을 볼 것이라며, 다들 방에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내 손에는 새 맥주 병이 쥐어져 있었고, 돌고래가 좌뇌는 자고 있어도 우뇌는 깨어 있듯이, 나는 우뇌는 자고 있고, 맥주를 쥐고 있고 감성을 담당하는 좌뇌는 깨어 있었던 듯 하다. 별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다들 해변으로 나갈 때, 나는 조용히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 옆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이창선 군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얘는 왜 여기서 자고 있나? 기연이는 어디서 잔거지?’라고 잠시 생각을 했고,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훠이훠이.

모든 짐을 챙겼다. 처음 발리에 들어올 때 들고 왔던 가방보다 부피가 많이 늘어나 있었다. 옷이 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산타클로스처럼 선물을 가득 안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일까. 가방을 나누어 짐을 채워 넣고, 내 손에 든 가방은 옆으로 매는 것 하나와 카메라 가방 하나만을 들었다. 트럭으로 붙인 짐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공항에 돌아왔을 때 다시 상봉할 예정이었다. 

다시 차에 올랐다. 일터로 가는 마지막 탑승이었다. 우리들의 옷은 일을 하는 복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옷들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모습들이, 어제의 그 초췌한 모습들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이날은 평소에 가던 길과는 다른 길을 통해서 일터로 향했는데, 간선도로를 타지 않고 시내를 가로질러 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싱아라자 지역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마음에 담자 생각하고 창 밖을 유심히 보았다. 사람들의 표정, 중앙선을 넘나드는 수많은 자동차들, 도처에서 울려 퍼지는 경적소리, 광복 65주년을 알리는 여러 현수막들과 함께, 국기의 색깔인 붉은 색과 흰색의 천 들이 수없이 많이 보였다. 이럴 때면, 시내의 사진을 찍을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조금 아쉽게 생각된다. 마음에 담으려는 노력을 하기는 했지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사진이 좀 더 연장을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말이다.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면서 또 언제 이곳을 다시 볼까라는, 마치 전쟁이 발발하여 고향을 뒤로 한 채 떠나는 피난민과 같은 마음으로 발리의 하나 하나를 살펴 보았다. 그러던 중, 건물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2층 벽 부분에 창문이 있는 집은 거의 없고, 무엇인가 통일된 듯한 크기와 형태를 하고 있지만, 가운데 부분만은 그 어느 집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 특이한 문양들을 보았다. 10분 간 수없이 많은 집들이 있었지만, 내가 머리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가운데의 문양들은 다들 달랐다. 어느 집은 부처님의 형상이 돌출되어 새겨져 있었고, 어떤 집에는 코끼리 또는 알 수 없는 동물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의미일까. 나는 왜 저러한 문양을 이제 마지막 일터로 가는 곳에서야 보게 되었던 것 일까. 사진을 찍어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30분 가량을 달려, 마지막으로 일터에 왔다. 우리가 일을 하러 오든 오지 않든, 현지 인부들을 일을 하고 있었다. 이날은 공식적인 일정으로 헌정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우리가 기여한 집이 완성이 되면, 그것을 집 주인 아저씨께 드리는 것이 원래의 의미이나, 우리는 지붕도 올리지 못한 채 일에서 손을 떼어야 했으므로, 의미에 부합하지는 못했다. 조금 더 우리가 노력했더라면 완성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보아도, 시멘트의 양생 문제 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발리에 있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완성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발리에 다시 와야 하는 3번째 이유가 생긴다. 우리가 주인 아저씨께 노래 선물을 해 드리고, 문화 공연에서 인기가 가장 좋았다는 태권도와 인기 3위였던 여자 댄스를 보여 드렸다. 이때는 현지 인부들도 같이 공연을 지켜 보았고, 그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있었다. 우리의 차례가 끝나고, 주인 아저씨께 마이크가 넘어갔다. 아저씨께서 이야기 하셨다. ‘라기’, 다시 오라고. 발리에 다시 와서, 학생들이 기여했던 이 집이 어떻게 지어졌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 다시 발리에 꼭 오라고 하셨다. 이게 내가 발리에 다시 와야 하는 세 번째 이유다. 내가 팠던 화장실 정화조 구덩이를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주인 아저씨의 가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시설이 될 것이었고, 내가 쌓았던 한 쪽 벽이 주인의 가족이 비바람에 고생하지 않는, 또 아이들이 낙서를 할 수도 있고, 자신들의 꿈을 적을 수도 있는 벽이 될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작년 라오스에서도 도서관을 지었다. 그때 완성을 하지 못했던 도서관이 시간이 지난 뒤, 내가 속해 있는 시민단체와 함께 해외봉사를 진행했던 지구촌 공생회의 홈페이지에서 완성된 도서관의 사진을 보면서, 울컥 했었던 적이 있다. 시민단체 후배님들이 그 도서관에 채울 도서를 마련하기 위한 바자회도 열었다니 다시 한번 감격이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다시 라오스 비엔티안에 가서 그 도서관을 꼭 보리라 하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마음을 발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 다시 돌아올 여지를 부러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곳에 있을 때는, 일이 힘들거나 생활이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하다거나 빨리 익숙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일상 속에 복귀한 내 모습 속에서, 상념 없이 남을 위한 시간을 보냈고, 또 온전히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던 다양한 시간들이, 이유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보아도, 멀고 먼 발리와 라오스는, 내 진짜 고향은 경남 마산, 2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25살 시절의 마음의 고향은 라오스며, 26세 더운 여름, 마음의 고향은 발리가 되었다.

주인 아저씨와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악수를 했는데, 손이 두꺼웠다. 우리 아버지의 손과 비슷했다. 아버지가 되면 손이 두꺼워 지나 보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 아이는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지, 어머니 앞에 선 채 우리 쪽으로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 지어주고 가지는 못하지만, 새 집이 생기면 건강하게 크렴이라고 마음으로 말했다. 전해졌으리라.

다시 차에 올랐다. 후련한 마음보다는, 어떤 마음인지 형용할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어 있었다. 즐거웠던 추억의 마지막 행사를 마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 손에 장갑을 끼고 땀을 흘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인지, 다시 온다고 다짐은 하지만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무심히 차는 다시 발리 남부로 향했다.

마을을 떠난 이후로, 차에서 내렸다 탔다 를 반복했다. 기념품을 사기 위해 기념품 전문점에 들르기도 하였고, ‘코피 루왁을 만드는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였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공장과 같은 곳에서 기념품을 팔았고, 커피를 만들어 파는 곳에서는 매우 간소하게 커피의 제조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내 추측인데 커피 원두를 만드는 것을 본 사람은 나 밖에 없으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길에 할머니 한 분께서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조용히 무엇인가를 하고 게셨고, 다행히 내 옆에 영어를 잘하는 현지 운전기사가 있었기에, 하나하나 공정에 관련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발리에서는 내가 항상 마지막으로 이동했으니, 앞서 지나간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보지 못했다. 붉은 색 커피 원두가 나무에 열려 있는 것도 이때 처음 보았고, ‘루왁이라고 불리는 사향 고양이는 거북이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지만, 확실히 이때 본 루왁이 성장한 모습인 듯하였다. 배설한다고 피곤한지 자고 있었다. 루왁의 존재도, 내가 마지막에 가면서 현지 운전기사가 저기 자고 있는 동물이 다 큰 루왁이라고 이야기해 주었기에 알았다. 내가 다시 단원들에게 저기 루왁이 있다라고 말하자 단원들은 관심을 가졌다.

커피 공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적자. 생산된 제품을 파는 건물 앞에는 손님들이 오면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도록 서비스 해주었는데, 원두 커피 가루에다가 바로 물을 부어서 그것을 그냥 마시는 것이 발리 스타일이라고 했다. 전체 인도네시아 스타일인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커피 가루가 씹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설탕을 넣지 않고 마셨을 때, 원두의 진함이란. 그리고 누군가가 코피 루왁을 주문하여 마셨고, 마시지 못한 다른 단원들에게 맛을 보도록 해주었는데, 나도 한 모금 하였다. 커피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무엇이 다를까 하고 한참을 생각해도,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코피 루왁은 억지로 사향 고양이에게 커피를 먹여서 발효된 원두를 만드는 것과, 우연히 야생 루왁을 만나, 그 루왁의 배설물 속에서 커피를 추출해내서 만드는 자연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먹는 코피 루왁이 양식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커피 맛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니, 큰 의미의 차이는 없는 듯하다. 양식 회나 자연산 회나, 회 모르는 사람이 먹으면 그냥 회이듯이.

 

시간은 어느덧 점심이 되었고, 이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 이동했다. 부두굴 지역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하였고, 무엇인가 익숙한 귀의 반응과 또 딸기라고 적혀 있는 팻말들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산중턱에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고도가 높아 습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는 부두굴은 딸기가 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기서 또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데, 이곳에 딸기가 유명한 것은 맛이 있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발리 섬 안에서 여기서만 나기 때문에 유명하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서 일본어를 내가 가장 잘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2 명뿐이었고, 그 중에 내가 잘하는 것이 진실인 느낌과 비슷하였다. 딸기가 맛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해보았기 때문에 사서 먹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운전기사님들이 식당을 찾지 못해 잠시 배회했고, 찾아간 식당은 식당이라기 보다는 놀이 동산 느낌이었다. ‘놀이동산의 뉘앙스가 잘 살지 않을 듯해 부가 설명을 덧붙이면, 말 그대로 놀 수 있는 언덕(동산)’이었다. 각자가 먹을 음식을 주문하였다. 주문을 한 뒤, 단원들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여러 놀이 기구에 매달려서 하하호호 하였다. 나는 그러지는 않고, 날씨가 좋았으므로 사진을 찍으면서 돌아다녔다. 단원들의 맑은 모습들이 보기에 좋았다.

각자가 주문한 메뉴가 나왔고, 나는 베이컨 햄버거를 주문을 하였기 때문에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시를 받자 마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짐한 양은 양이로거니와 맛도 있었다. 다른 단원들의 음식을 뺏어 먹기도 하고, 또 내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햄버거가 햄버거 같지 않은, 맛있는 요리였다. 언제 또.. ..

점심을 먹고, 그 주위에 있는 재래시장처럼 보이는 관광객 대상 시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분명, 겉에서 볼 때는 일반 재래시장처럼 보여서, 발리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초입에 들어가자 마자 원 달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놀라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일터에 갈 때, 건물 2층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재래시장처럼 보였지만 그러지 않았던 곳에서 또 다른 발견을 하였다. 처음 발리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할 때, 길가에서 커피를 파는 가게들이 보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전국체인 유통망을 가진 커피와 비슷한 느낌 정도의 커피가게였다. 물 관련 문제 때문에 커피를 사서 먹지는 않았지만, 커피의 브랜드 명이 인상적이었던 것도 있었고, 간판의 모습이 과히 특이하다고 할 만하여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이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간판에 연예계에 종사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사람들의 사진들이 똑 같은 포즈로, 똑 같은 커피잔을 쥐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사람만 변했지 그 간판의 모습이나 색깔 등은 변하지 않았다. ‘신기하다라고 89일 동안 생각을 했고, 돌아가기 전날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재래시장같아 보였던 그 곳의 입구에도 그 커피 가게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근데, 가만히 보니 위에 커피를 들고 웃고 있는 사람이 밑에서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집을 보니, 간판에는 차도르를 두른 여자가 커피잔을 들고 있었는데, 가게 안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 여자가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별거 아닌 발견일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사진을 간판에 내 걸고, 커피를 팔고 있는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특이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스타벅스에 갔는데, 인어 같은 사람이 커피를 팔고 있거나, 맥도날드에 갔는데, 이상한 삐에로가 주문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재미는 한층 더 했다. 이 커피의 브랜드는 학점의 마지노선의 표현인 것처럼 ABC였다. 발리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여행할 기회가 있으시면, 간판의 얼굴을 보고 가게 안에서 같은 얼굴 찾기 놀이를 하시는 것도 재미가 있을 듯 하다.

다른 단원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예품 쇼핑에 분주히 돌아 다녔고, 나는 딱히 사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카메라로 소일하고 있었다. 계속 날씨가 좋았으므로 사진은 찍는 족족 잘 나오는 듯 하였다. 사진실력과 상관없이 자연이 주는 출사 기회였다고나 할까.

특기할 사항은 없었던, 유일하게 하나 있다면 분위기가 정말 좋았고 음식도 맛있었던 식당을 뒤로 한 채 다시 차에 올랐다. 가던 중에 환전소를 하나 발견했는데, 차를 타고 지나가던 중이어서 선명하게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인상 깊어 찍어두었다. ‘허가 받은 환전소쯤 될까. 영어로 적혀 있었는데, 누가 봐도 한눈에 보기에는 정말 허가를 받은 곳인가를 의심하게 되는 환전소였다. 다 지워져 가는 글씨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환전만으로는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든 것인지 다른 물건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이런 장면들이 별 의미 없이 지나치고 가면, ‘낡은 환전소정도로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허가 받은이라는 공식성을 띄고 있는 표현이 지닌 이미지와 낙후된이라는 느낌이 어울리지 않아 나는 즐거웠던 것이다. 예를 들면, ‘최신 스마트 폰을 파는 가게라고 적혀 있는데, 그 글씨가 붓글씨로 적혀있다거나, 현판으로 걸려 있다고 생각하면, 잔잔한 웃음은 줄 수 있는 느낌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고 붓글씨현판이 낙후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2시 정도에 부두굴에 있는 식당으로부터 더 남쪽으로 내려왔다. 40분 가량을 차에서 보내고 도착한 곳은 창고와 같은 기념품 판매점이었다. 기념품 판매점에 도착하기 전에, 4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차 안에서 운전기사분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다른 단원들과 영화와 미국의 드라마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지 운전 기사들을 이끄는 운전기사 분의 차를 타게 되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하면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게 되었다. 커피 공장에 가서도, 나에게 커피 제조 과정을 알려주기도 했고, 차에 있을 때에는 간판에 적혀 있는 인도네시아어를 내가 물으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고유한 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의 영향으로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게 되었고, 고유 문자라고 불리는 것도 사실은 태국어와 비슷한 것으로써, 일부 지역에만 통용되는 것을 국가가 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알게 된 기억에 남는 인도네시아어는, OLEH-OLEH 즉 기념품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도 한 통신회사가 올레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광고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와 발음이 동일해 신기하게 생각했던 참에, 뜻을 알게 되니, 우리가 들렀던 곳들에서 자주 보였던 저 말이 기념품이라는 뜻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남부로 가는 길이었을까, 아니면 커피 공장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와 운전기사분과의 대화를 잠시 옮기겠다.

 

: ‘발리는 참 아름다운 섬인 듯합니다.’

운전 기사 : ‘발리는 아름답지요. 외국인이 보기에는 아름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기내 방송으로 지상 마지막 낙원, 발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와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운전 기사 : ‘, 발리는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같이 발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크게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쉬는 곳과 살아가야 할 터전인 곳은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지요.’

: ‘그렇군요. 그렇다면 운전기사님은 발리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운전 기사 : ‘아실지 모르겠지만, 발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힌두교가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섬입니다. 제가 발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힌두교의 섬이라서가 아니라, 힌두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마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마을에 정착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처음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그 사람을 도와주면서, 빨리 정착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마음들이 요즘에는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발리는 사람들의 착한 마음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 ‘, 그렇군요. 지난 번에 일터에서 돌아오는데, 마을의 신전에서 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 표정들이 그렇게 밝았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겠네요. 또 다른 발리 사람들만의 특징은 없습니까?’

운전기사 : ‘있어요. 발리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은 오늘을 살고 있지만, 마음은 희망 찬 내일 속에서 살고 있어요. ‘내일은 더 나은 날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아요.

 

내가 마지막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같은 차에 타고 있던 다른 단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혼자서 묵묵히 저 말을 음미하다가 다시 다른 대화 주제로 넘어갔다.

 

: ‘그럼 운전 기사님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으시겠어요. 운전을 하시면서 말이죠.’

운전 기사 : ‘, 하지만 이렇게 단체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나라는 정해져 있어요. 한국이나 일본에서 단체 여행객이 많이 오기 때문에, 주로 그들과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일본은 규모가 작은데, 한국사람들은 항상 단체로 와서 단체로 가지요. 반면에 유럽인들이나 호주 사람들은 두세명 씩 와서 오토바이를 빌려, 그들끼리 여행하는 것을 즐깁니다.’

: ‘한국사람은 뭐든 단체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하하.’

 

사실이 그랬다. 발리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2명이 오토바이를 하나 빌려서 발리를 돌아다니거나, 큰 가방을 메고 자유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인들을 울루와뚜 사원이나 폴로 매장에서 만나게 되면, 항상 큰 버스에 다같이 와서 단체 관광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의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배낭여행이나 자유여행이 보편화 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패키지 여행이나 정해진 루트를 순회하는 정도의 여행에 만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릴 적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그것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그리고 나서 직접 가서,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느끼겠다는 여행 습관이 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는 자유여행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자신이 갔었던 나라에 대해서 회상할 때, 유명한 관광지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세계 지도가 아니라, 한 도시의 지도를 펼쳐 놓고 그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곳을 이야기 하면서 이 곳에서 나는 빵의 향기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라던지, ‘내가 이 곳에서 가져 오고 싶었던 것은 그 할아버지의 미소였어.’라는 식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것도 나름 여행의 깊이를 깊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다시 기념품 매장으로 돌아오면, 나는 숨겨져 있는 보물찾기 놀이를 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좋은 가격에, 발리를 대표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매장을 빙글빙글 돌았지만,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하나 찾은 것이 있긴 하였는데, 진주목걸이 소녀를 카피한 그림이 마음에 들었지만, 크기가 너무 크고, 또 가격이 싼 가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지 못했다.

다들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복귀했고, 다른 단원들의 손에는 꾸러미꾸러미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나는 선물도 사지 않는 냉혈한인가하고 1초 생각했지만, ‘이미 사놓은 것이 많군하고 스스로 위로했다.

이제 해는 저물고 있었다. 이번 일정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발리의 석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가기 위해 차에 올랐고, 지는 해와 함께 나의 마지막 발리의 장막도 내려가는 듯 하였다. 우리가 간 바닷가는 꾸타 해변이었다. 발리의 대표적 관광지로 손 꼽히는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서핑을 즐기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는 서핑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노란 머리와 푸른 눈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새로운 파도를 만들었다가도 파도는 다시 바다 속으로 사라졌고, 그 파도를 찍느라 석양을 찍느라 내 셔터는 바삐 움직였다. ‘왜 이렇게 좋은 곳을 가는 날 저녁이 되어서야 왔을까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였다. 구름 속에 태양이 완전히 가리고, 사진을 찍어도 얼굴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과 그 파도, 그리고 여유롭게 해변가에 앉아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편안한 마음 속에 나도 어느 샌가 경계를 풀어 놓았다.

 이제 진짜 돌아가야 하는 밤이구나.’

왜 이제야 왔냐며 투덜투덜 대면서, 마지막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이동했다. 저녁을 먹은 곳은 우리가 휴양하던 토,일요일을 보냈던 하모니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타임 머신을 타고 토요일로 돌아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식당의 이름은 마마스 레스토랑우리말로 표현하면, ‘엄마 식당쯤 될까. 독일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이 식당은 테라스가 있고, 음악이 있고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 마지막 르기안의 모습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니, 영락없는 관광지의 모습이었지만 언제 다시 볼까 하는 생각에 조명이 살짝 흔들렸다. 저녁식사는 스테이크류를 먹었다. 충분히 배부르게, 행복하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