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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11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진짜진짜 마지막으로 쇼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진짜를 두 번을 적었는데, 조금 뒤 세 번을 적게 되는 시간이 올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적고 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은 한국에 택배 보낸 지 오래였기 때문에, 예쁜 물건이나 많이 보자 라는 생각으로 가게들만 기웃기웃 했다. 정기연 군이 여자친구 원피스를 사준다기에 따라가기도 하고, 이창선 군이 돈이 모자라다 길래, 돈을 빌려주기도 하면서 빈둥빈둥했다. 이제 공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차를 타기 위해, 다시 마마스 식당 앞에 모였을 때, 거의 다들 폴로 종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가격 비교 우위가 무서운 것이군생각하면서, 한마디 내 뱉었다.

‘YES. WE POLO!’ 원래 우리 팀 구호가 ‘YES, WE CAN’ 이었는데, 나를 포함해서 다들 폴로를 하나씩 구매했기에, ‘YES, WE POLO!’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다. 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아무리 내 눈에 불을 켜도 볼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다. 몸은 피곤했고, 아침부터 입고 있었던 옷은 땀 냄새가 날랑 말랑 하였다.

피곤한 것은 한국에서 피곤해도 되니까, 조금만 더 여기 있다가 갔으면 좋겠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투정을 부려보았다. 공항에 오니 실감이 났다. 작년 라오스에서 한국에 돌아올 때는, 울었다. 그때는 낮이어서 눈물을 숨길 수도 없었다. 공항까지 같이 와주셨던 지구촌 공생회 라오스 지부 지부장님과 휘하 직원들, 그리고 통역을 담당했던 벨까지 공항에서 와서 손을 흔들어주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라오스에서는 눈물이 났지만, 이번 발리 봉사활동은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있는 힘껏 즐거웠다. 더 피곤해져도 되니까 더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 해본들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언론의 자유!는 있으니까.

오후부터 와 있었을 짐과 상봉을 하고, 주섬주섬 짐을 다시 챙겼다. 없어진 물건이 있는가 다른 단원들의 물건은 다들 괜찮은가를 살피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공항 카트를 정렬해 놓았다. 현지 운전기사분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눴던 운전 기사의 손도 두꺼웠다. 아버지인가보다. ‘뜨리 마카시더 많은 수식어를 붙여서 고마웠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짧은 영어에, 몇 개 단어만 외우고 있는 인도네시아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환한 미소와 함께고마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어는 과거 시제와 미래 시제가 없다. 다른 운전 기사분은 브라딴 호수에서 싱아라자로 오늘 차에서 운전을 하셨던 분이었고, 손지혜 양에게 앞자리를 빼앗겨 차를 옮겨야 했지만, 뛰어난 운전실력을 갖추신 분이었다. 바비 굴링을 먹으러 가는 길에, 코카콜라의 트럭이 지나가자, 경적을 울렸고, 가까이 다가가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는 사람들입니까?’라는 질문에, 자신은 10년 동안 코카콜라에서 일을 했었다는 대답. 웃음이 선했던 운전기사 분이다. 이날에도 에피소드를 하나 만들어 주셨는데, 부두굴에 점심을 먹기 위해 도착을 했을 때였다. 나에게 다가와, ‘너랑 자리 바꿔서,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여학생, 너무 잘 잔다.’ 그렇다. 손지혜 양은 너무 잠을 잘 잤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와서 들려주는 운전기사의 순수함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눴다. 역시 손이 두꺼웠다.

 

 

공항으로 들어오니, 국적의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서는 일본어가, 또 다른 곳에서는 중국어, 그리고 우리는 한국어를 쓰고 있었고, 옆에 단체 신혼 여행 팀인 듯, 예전 게임 중에 같은 모양의 벽돌을 두 개 모으면 그 둘은 사라지면서 벽이 낮아지는 게임이 있었는데, 다들 같은 모양의 벽돌과 같이 커플 룩을 하고 있었다. 사라질까?

단원들에게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공항에서의 주의점을 알려주었고 단원들은 순간 긴장했다가 자신들이 해당되는 사항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자유방임 상태로 돌아갔다. 2번의 보안검색을 하였는데, 첫 보안검색은 큰 의미가 없었다. 물이 든 물병을 그대로 들고 들어가도 제재가 없어, 공항에 있으면서도 물은 편하게 마셨다. 면세점에 들어가기 전의 보안검색은 다른 공항과 같이 엄격히 진행되었으므로, 장난은 허용되지 않았다. 짐을 붙이고, 좌석을 받았다. 54A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한다라고 적는 이유는, 한국에 돌아온 뒤, 기숙사 방을 옮기면서 좌석이 적혀 있는 항공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창가 자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하얗거나 검거나 빛나거나, 아니면 내가 자고 있거나 이 중에 하나라는 것이 내가 가진 생각이었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자리는 다리를 펼 수 있는 비상문 앞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이제 공항 면세점 안으로 들어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을 들어가자, 어찌나 면세점 느낌이 나는지. 일본, 대만, 필리핀, 라오스, 인도네시아, 태국의 면세점을 돌아다녀 봤지만, 태국의 면세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똑 같은 모습의 면세점 일색이었다. 진하게 풍겨오는 향수 냄새며, 나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명품의 가게들.

또 단원들은 게이트 앞에서 몇 시까지 모이라는 지령을 받자 마자, 쇼핑을 하러 나섰다. 이때, 진짜진짜진짜 마지막으로 몇몇의 단원들은 폴로 쇼핑을 하게 된다. 생각보다 꽤 넓었던 면세점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상점은 열려 있었고,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들이 역력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기 위한 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몇몇 단원들과 같이 다녔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 조용히 걷고 있길래 좋아라하고 걸어 다녔다. 유심히 하나하나 살펴보고, 막다른 길에 다다라 혼자서 부끄러워도 해보고, 일본사람하고 부딪혀서 스미마셍이라며 오랜만에 일본어도 써보고, 향수도 뿌려 보면서 다녔다. 폴로 매장과 폴로 랄프 로렌 매장이 있길래, 살 의지는 전혀 없으면서 입어도 보고 벗어도 보았다. 점원은 싸다고, 싸다고 사라고 했지만 나는 비싸다고 비싸다고 안산다고 했다. 우연히 지나가시던 이미숙 선생님을 만나 같이 게이트로 향했다.

 

그때, 작은 사이즈 보라색 폴로 찾았니?’

아니요.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처음 르기안에서 폴로 매장에 갔을 때, 마음에 드는 색깔이 있어서, 내게 맞는 사이즈가 있는가 해서 물어보니 없었던 옷이 있었다. 한 치수 큰 사이즈의 옷을 입어보면서 거울을 보고 있으니, 먼저 물건을 사시고 밖에서 기다리시던 이미숙 선생님께서 물을 열어젖히시며, ‘그 색깔 어울린다!’라고 외치시기에 깜짝 놀랐다. ‘늦었으니 빨리 가자라는 말을 기대했지만, 전혀 다른 말씀으로 나를 당황하게 하셨다. ‘보라색 사이즈 맞는 폴로 티 찾기 놀이는 남은 일정 동안 계속 되었지만,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게이트 앞에는 몇몇 단원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시간으로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다들 피곤해 보였다. 다들 모였는지를 확인을 하고, 여권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그런데! 전재하 군이 여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재하 군은 여권이 금방까지 있었고, 여권을 내려놓거나 한적이 없었다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다시 천천히 한번 찾아보라고 시간을 주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쓰레기를 버렸는데 혹시 같이 버려진 것인가 해서 쓰레기통을 뒤져보니 여권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쓰레기를 버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여권을 쓰레기통에 그냥 버려둔 채, 여권을 찾지 못했다면 다친 사람 없이, 잃어버린 물건도 없이 잘 끝날 이번 봉사활동이, 전재하 군의 불행으로 슬퍼질 뻔 했다. 찾아서 다행이라며, 처음 도착해서 정윤성 군이 여권을 비행기에 선물로 주고 올 뻔한 사건을 기억해내며, 처음과 끝이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비행기표를 승무원에게 보여주고, 좌석을 찾아 갔다. 좌석을 찾아가니, 게이트 앞에서 같이 기다리던 국적을 알 수 없는 어깨 넓은 남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 이거 고생 좀 하겠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혹시 자리가 남는 것이 있을지 승무원에게 물어보자, ‘아직 탑승이 끝나지 않았으니, 잠시 기다리시면 탑승이 완료되는 대로 자리를 찾아 보겠다.’ 라고 유수연 승무원이 알려주었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잠시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상냥했고 또 아름다웠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다. 물 한잔을 부탁하기에 미안했다 랄까.

발리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는 자리가 많이 비었다. 좌석번호 50번이 넘는 단원은 나 뿐이었던지,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 가서 앉아도 되냐고 묻자 편하게 앉으시라고 하였다. 정기연 군과 이창선 군이 앉아 있는 창가 자리 뒤에 두 자리가 비었길래 거기 앉았다. 2자리가 모두 빈자리였으므로, 의자 위에서 가로로 눕기도 하고 다리를 뻗기도 하면서 7시간을 날아 왔다. 한국 시간으로 6시 정도에 잠이 깨어, 창 밖을 보면서 지금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구름이 맑네 하면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한국 시간으로 9시 반 정도에 비행기는 활주로에 바퀴를 대었고, 이리저리 수화물을 찾고 입국 수속을 받고 하다 보니 10시 반 정도에 모든 단원이 자신의 짐을 가지고 공항으로 나와 있었다. 영화처럼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환영합니다등등의 의미를 담은 플래카드나 꽃다발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뭔가 섭섭하기도 하였다. 물론 올 사람도 없었다. 정윤성 군의 아리따우신 여자친구분은 정윤성 아저씨라고 적혀 있는 종이를 들고, 수줍은 듯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우리는 정윤성 군에게 인사를 강요했다. 손지혜 양의 다비드 상을 닮았다는 남자친구는 울산에서 올라와 있었고, 이날 생일이었던 윤희의 남자친구는 우리가 떠난 직후에 공항에 도착했다고 하나 사실 진위를 판별하기는 어렵다. 강민혜 양의 남자친구는, 발리에 출국하기 전 응원 연습을 도와주기 위해 잠시 연습하는 곳에 방문했었지만, 이날은 부끄러운지 저 멀리서 앉아서 강민혜 양을 기다렸다.

다들 무사히 도착했으므로, 이제 정말 긴장을 풀었다. 사실 해외에 나가면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또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팀으로 이동하고 행동하는 곳에서는 항상 누군가는 긴장을 하고 있어야 사고가 나지 않는다. 과도한 긴장은 본인에게 힘들지만, 작년 라오스의 경험, 또 약 1년 간의 일본에서의 교환학생 경험이 나에게 나는 긴장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항상 조심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했었다. 그렇기에 이번 발리에서도 다른 단원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 이 글을 적는 시점에 다른 단원들의 사후 보고서를 보고 있으면, 나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부분들이 적혀 있다. 딱히 내 마음에 드는 이미지는 하나도 없다. 내가 괜히 무리해서 다른 단원들의 행동 반경을 제한했거나,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요구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좋은 이미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무서운 사람이나 군기반장의 이미지는 원해서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님을 여기서 밝혀두고 싶다. 원해서 이런 이미지가 된 것은 아니지만, 앞서 계급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도 술회하였지만, 편안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이성은 계급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 제도가 가진 효율성과 의견이 일치를 이끌어 내는 것에 대해서 용이함을 느꼈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단체 사진을 찍었다. 공항에서 사진을 찍으면 항상 어둡게 나왔는데, 이번에는 우연히 조명이 좋은 곳에 우리들이 서 있었기에 단체사진이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나왔다. 진짜 마지막으로 찍는 단체 사진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기연 군과 나는 데자뷰 놀이를 잠시 하였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서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여전히 서울은 번잡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높은 목소리로 말했으며, 자동차의 경적은 학대 받고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발리보다 한국이 더 덥다는 사실을, 한국에 와서 알았고 이제 땀냄새는 나도 느껴질 만큼 났다.

11시 반 정도에 건국대학교 학군단 앞에 있는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내렸고, 점심을 먹고 가자고 내가 꼬셔 냉면을 먹으러 갔다. 오승식, 전재하, 이창선 그리고 내가 냉면을 먹었다. 박규병 군은 일이 있다며 먼저 떠났는데, 냉면을 먹으러 가는 횡단보도에서 어떤 여성분 한 분과 말 그대로 뻘줌하게 서 있기에, ‘뭐지?’ 했는데, 오승식 군이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라며 웃은 낯으로 이야기 하고 난 뒤에야, 박규병 군의 여자친구 인 줄 알았다. 부러웠다. 그래도 정윤성 군이 더 부러운.

길고 긴 기행문, 버스를 내리고 난 뒤까지가 실제 기행문이라고 한다면, 그 끝이 여자친구 있는 단원이 부러웠다라니 참 결론이 이상하다. 9 10일이라는 기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첫 날에 오후 2시에 모여 6시 비행기로 발리에 갔으니 하루가 빠지고, 돌아오는 날 밤을 공항에서 보내고 새벽 1시 비행기로 왔으니 또 하루가 빠진다. 실질적으로는 8일 정도의 일정으로 발리에서 시간을 보낸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더 길었으면 지루했을 것이고, 짧았으면 아쉬웠을 것 같은 아주 딱 좋은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계속 작년의 라오스와 비교하게 되는데, 13 14일의 일정이었고, 휴양을 위한 날이 마지막 하루뿐이었다는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당히 짧은 시간이면서 여유로운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라오스에서는 거의 하루하루 전투와 같은 생활을 보냈다. 오전에는 도서관을 짓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국제 교육과 유치원 교육을 진행하였고, 밤에는 야학을 열거나 라오스어를 배우는 등, 하루 일과가 마치고 벽이 뚫려 있는 집에 돌아오면, 얼굴만 내어 놓고 침낭에 들어가 머리를 붙이자 마자 잠들었던 기억이, 압축적으로 남아있다. 이와 비교해 보았을 때, 발리는 천국이었다. 하지만 기약된 천국은 기약 없는 현실보다 더욱 괴롭다. 돌아오니 그 일상생활이 주는 수많은 의무들이란.

이제 일정표를 보면서 적어야 하는 것은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이창선 군이 일정표를 간단히 만들어 주어, 그것에 내 기억을 덧대는 방식으로 글을 적고 있었다. 일정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이 기행문을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을 적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8 29일이고 지금 시간은 오후 4 50분이다. 끝을 내야지 내야지 하지만, 퇴고를 하고 나서 또 바뀌게 될 내용들을, 마치 어미개가 자신의 새끼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 느낌으로, 내가 적은 글을, 물론 내가 다시 보는 것이지만, 고쳐지기 전에 많이 적어두고 싶은 욕심이 있다.

신나게 일하고 신나게 놀았다. 일할 때는 열심히 일했고, 놀 때는 미친 듯이 놀았다. 발리에서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본다면, 앞서 적은 몇 가지 일들 때문에 스스로가 미워졌던 것 빼고는 아무런 후회는 없다. 이제 내일(830)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여유를 부리면서 글을 적고 있지만, 26살 여름, 학교에 숨어 있던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발리에서 즐거운 10일을 보냈노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본격적인 고시 공부를 하기 전에, 지원서를 작성해서 합격을 해 놓았던 제 10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지원서를 적는 순간, 여름방학의 10일은 확보해 두었다. 연속성이 보장되어야만 하는 고시 공부의 특성상 10일이라는 긴 시간은, 기억 속에 많은 내용들을 수장시켜 버리는 효과를 나타내었지만, 그래도 긴 고시생의 수험 기간을 시작하면서 넓은 바다와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회상의 가치와 추억의 가치가 이번 10일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옷을 갈아 입게 되었다.

나는 발리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없다. 잃은 것을 따질 수 없듯이, 얻은 것을 따질 수도 없다. 다른 단원들의 글 들에는 사람을 얻었다라고 하지만, ‘사람을 얻는 것은 발리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발리에서 같이 봉사활동을 했던 단원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발리에서 내가 얻은 것은 없다. 오히려 얻은 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이 글일 수 있겠다. 10일 전체를 기억하려 했지만, 기억할 수 없었고, 그 감정 하나하나를 담아내려 했지만 담아 낼 수 없는 이 글. 10일이라는 기간의 봉사활동과 17일이라는 기간을 사용해서 적고 있는 이 기행문이 내가 발리에서 얻은 것이라 할 것이다.

좋은 이야기만 적는 것이 아름다운 기행문의 끝일 수 있으나, 이번 발리 해외 봉사활동을 겪으면서 생각했던 문제점을 적으면서 기행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교내에서 진행되는 해외봉사활동이므로, 지원자는 학교 학생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문제점이 생기는데, 일반 기업이나 사회단체에서 시행하는 해외봉사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서 적은 지원서, 1차 합격 이후 모의 면접까지 해가며 면접을 준비해서 뽑힌 봉사단원들은, 자신이 이 봉사단에 뽑힌 것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여긴다. 자신의 경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과정을 겪고 뽑힌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계관이나 봉사정신은 다시 자신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라는 데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교내 해외봉사활동은 선발된 사람들은 자신이 선발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뽑힌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거나, 학교에 딱히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을 더욱 확신시켜 주는 것이 참가비 40만원의 역할인데, 내가 이곳에 오는데 돈을 내었다는 명분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 정도는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한다. ‘봉사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남을 위한 행위라고 한다면, 사전 연습이나 단체 활동이라고 인식되는 것을 할 경우에는 그것에 참여하는 것 자체도, 해비타트를 통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만이 봉사가 아니라, 다른 단원들을 배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봉사이다.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해야 할 때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만 해, 개성을 확보해야 할 때의 구분을 성신의 해외봉사단은 시작부터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안한다면, 사회봉사 1,2를 의무적으로 들은 학생들을 선발하거나, 교내 활동에 기여한 학생을 우선 선발, 혹은 봉사단체의 추천서를 받은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고, 또 선발 절차를 다층적으로 만들어, 쉽게 뽑히지 않았다 라는 인식을 스스로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이나 어디를 가든, ‘나는 우선 나를 대표하기 이전에, 건국대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명확히 가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주최하는 해외봉사는 국가성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개발도상국에 가서 선진국민 대한민국이 당신들에게 베푸는 은혜라는 인상을 심어주도록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를 자유롭게 대표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무리 건국대학교 재해복구봉사단 조끼를 입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방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나는 뽑혀서 갔다 왔으니, 더 어렵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학우들의 등록금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해외봉사단 예산에 건국대학교의 이름을 빛내는 사람들이 되도록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로, 예산 집행의 타의성이다. ‘타의성이라는 것이 다른 이의 의견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의미라면, 성신의 해외봉사단은 학생복지팀이라는 다른 이의 의견이 봉사에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 한다. 특히 예산과 관련한 부분에서 제한된 예산을 사용하여, 학생들의 자율성을 막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물론 현지 해비타트와의 연계 필요성 때문에 학생들이 창의성을 발휘해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적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고정된 일정, 제한된 예산, 학생들의 참신성 발휘 기회 상실성신의 해외봉사단의 틀로 굳어진다면 다른 장소에서 같은 추억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해외봉사단이 될 것이다. ‘해외 봉사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최근에는, 건물을 짓는다거나, 벽화를 그리기, 의료 봉사 등 봉사활동의 내용 측면에서는 이미 관례화 된 것 이상의 참신성을 발휘하기 어렵고, ‘문화공연이라는 틀 내에서는 태권도, 난타, , 합창, 사물놀이에 국한되어 버린, 다시 말해 가서 무엇을 할지는 항상 정해져 있는 해외 봉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해비타트나 의료봉사 등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봉사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의료봉사 의 경우 전문 인력이 필요하지만, 해비타트나 벽화 등은 전문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노동에 가깝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의 발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의 범위를 한정해 버리는 결과가 초래한다. 문화 공연에서도 학생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넣어, 시도하지 못했던 것을 시도해보는 등의 새로운 도전이 더욱 내용이 풍부해지는 해외봉사가 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예산 부분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

세 번째는, 숙소의 문제이다. 숙소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문제는 숙소가 지나치게 좋았다는 것이다. 해외봉사를 가기 전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이, 이 해외봉사를 가기 위해서 사용되는 자금을 우리리 그곳에 가서 봉사를 하는 대신에, 그곳 현지 법인이나 단체에 그 돈을 기탁하는 것이 더욱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굳이 발리까지 가서 해비타트를 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는 일손이 필요했다는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목적으로는 우리가 직접 해외에 나가서 더 넓은 세계를 보고,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길러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시선의 높이에서 현지의 삶을 바라봐야 하고, 그들과 공감하기를 노력해야 한다. 신분제가 남아 있어, 평생 노동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과 낮에는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휴양을 즐기러 온 서양 사람들과 함께 일류 호텔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부자의 아량에 지나지 않는다. 일이 힘이 들고, 기후가 맞지 않는 외국에 갔기 때문에 잠을 자는 곳은 좋은 곳에서 자는 것이 좋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바로 우리가 우리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그들과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그들과 같은 밥을 먹으면서 보내야만 한다고 대답해 줄 수 있다. 너무 좋았던 호텔에서의 잠은 꿀 같이 달콤했으나, 그 달콤한 잠은 한국에서도 자지 못했던 잠이었다. ‘홈 스테이까지는 아니라도, 우리의 살갗에 인도네시아 발리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의 향기라도 느껴질 수 있는 곳에서 잠을 자는 것은 어떨까.

네 번째는, 사전 참여에서의 강제성 부재이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발리에 출국하기 전에 모여서 공연 준비와 여러 회의들을 하였다. 하지만 이때 전원이 참석한 적이 없다고 기술한 바 있다. 이는 첫 번째 문제점과 결부되어 있는 문제로 내가 기여하지 않아도 나는 발리에 간다.’라는 것이 불변의 사실이기 때문에, ‘가서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연습에 빠지는 단원들이 있었다. 연습을 하는 것이 실력을 높여서, 전문 가수나 댄서의 수준으로 올라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 팀원들이 사전에 많이 모여서 서로를 알아가고, 그를 통해 각국에 가서도 원활한 의사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고 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습 일정 및 시간을 사전에 정해놓고, 스케줄 내에서 참석이 불가능한 경우 사유서를 제출토록 하고, 사유서를 내었다고 무조건적인 결석이 허가되는 것이 아니라, 검토를 거쳐 인정되는 것과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인정되지 않는 결석이 일정 횟수 이상이 되었을 경우, 경고를 부여하고, 경고의 수준을 넘은 경우 몇몇이 되었든 남은 사람만 간다는 철저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규칙은 강제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어서 사람들의 자율성을 해치지만, 단원수가 많지 않은 성신의 해외봉사단 같은 경우에서는 한 명의 결석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태이므로 상호간에 조율을 통해 적절히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다. 본인도 장학금 연수입네, 귀향입네 하면서 결석이 잦았던 것에 대해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기 해외봉사단원들의 더욱 알찬 봉사활동을 위해서 이런 제언을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원들 내부의 문제인 카메라 수의 제한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는 것은 자유에 맡길 상황이다. 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일을 하는 도중에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담당하기로 한 단원이 사진을 전담해서 찍고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찍지 않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단원들은 자신의 카메라로 자신을 일하는 모습을 찍는 등, 전체적인 규율에 벗어나는 행위를 하였다. ‘여행 갔다 오면, 남는 것은 사진 뿐이더라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여행일 때 이야기이다. 우리는 봉사활동을 간 것이었고, 또 몇 일되지 않는 봉사시간 중에 자신의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행위라고 판단된다. 사진을 찍으러 봉사활동을 가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인식시키고, 사진을 찍느라 일의 효율성에 피해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스스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문제점에 적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이상으로 내가 생각한 문제점이었다. 쉽게 바뀔 수 있는 문제도 있고, 많은 논의와 절차의 변경을 통해서 바꿔야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학생들의 경험 폭의 확장과 전인적 교육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성신의 해외봉사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된다. 위에 서술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패스트 푸드의 상호를 연호하는 행위, 학생답지 않은 소비 행위 등은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되어 적지 않았다. 문제점을 적었지만, 성신의 해외봉사단의 발전을 위한 제안이자 제언이지, 그 가치를 깎아 내리거나 폄하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문제점에 대한 의견 제시에 따른 책임은 내가 지겠다.

가볍게 시작한 글이, 문제점을 열거하고 나니 갑자기 무거워진 느낌이다. 발리는 지상의 마지막 낙원이었다.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며, 신혼여행으로는 가지 않겠지만, 꼭 다시 한번 더 가서 꾸따 해변에서 서핑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

처음에 많이 들었다. ‘발리에 무슨 봉사활동을 하러 가냐’. 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미국이든, 우리나라 안이든 발리든 가야 한다.’ 라고. 나는 발리에 봉사활동을 갔다 왔고, 그곳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줄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곳에서 살 사람들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발리에서 이번 여름,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보았으며 가장 좋은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가장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자연의 광대함과 사람의 따뜻함과 봉사의 숭고함을 알게 해준 건국대학교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나는, 신나게 일하고 신나게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