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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0. 18:25 내 생각

“어른으로 태어나다”


우리가 모르던 세상이 있어. 그곳에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데, 별다르지 않은 듯 하지만 한 가지가 달라. 그곳에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아. 그렇다고 단 한 명도 아기도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야. 오직 아기를 낳아 기를 수 있을 정도의 여유와 경제력을 가진 가족만 아기를 낳지. 하지만 그 수는 적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서 결혼을 하고, 또 아기를 낳아. 근데 그 아기, 태어나자 마자 어른이야. 남자 아이라면, 17살 정도로 태어나고 여자 아이라면 한 두 살 정도 더 이른 15살 정도에 태어나. 지금의 기준이라면 어린 나이로 보이겠지만, 이들이 이 나이로 태어나는 이유는 태어나자 마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야. 여자가 남자보다 더 어린 나이에 태어난다고 해서 기쁜 건 없어. 그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남자보다 빨리 되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태어난 여자들은 태어나자 마자 결혼을 강제로 하게 되고 또 아기를 낳지. 그렇게 어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루 정도를 세상의 공기와 시간에 익숙해진 뒤 다음날부터 일을 하기 시작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를 듯 해 보이지만, 어디서든 사람은 필요하고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일은 차고 넘쳐. 태어나자 마자 시작한 일을 죽을 때까지 하게 되는거야. 

이 곳에는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일까. 살아가다 보면 필요한 건 추억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이 첫 번째 이유야. 예를 들어 보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어린이들은 자신이 올해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를 하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 산타 할아버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돼. 누구나 한 번쯤 산타 할아버지에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고, 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들이 있어. 근데, 근데 말이야. 산타 할아버지가 실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는 게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지? 그저 어릴 적 추억 정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걸 우린 알잖아.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결국 어린 시절의 추억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 결과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욕심은 많고 또 추위나 더위에 약하고 배울 것도 많은 어린 시절을 겪지 않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진화해 온 거지. 그러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생산능력’을 갖춘 17살이나 15살 정도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거야.

근데, 처음에 잠시 말했지만 그래도 아기를 아기의 모습으로 낳는 사람들이 있어. 이 사람들은 자신만의 유전자를 진화의 과정 속에서도 지켜온 사람들인데 그 수가 적어. 이 부류의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어. 한 부류는 번거롭고 귀찮고 비용도 많이 드는 육아의 과정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 쉽게 말하면 여유와 경제력이 있다는 것이지. 이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이 사회에서 큰 권력과 유전적 우월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진화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는, 이 사람들은 ‘대기업’이라는 회사의 경영자 집단이었거나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갖는 권력 속에서 살았었어. 이들의 조상들은 그때에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어. 그들만의 어떤 공간을 만들고 살아왔다는 것도 여전해. 이런 사람들의 후손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유전자로 남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이들은 예전부터도 자신들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항상 주장해왔었거든. 이들이 아기를 낳았다고 해도 이들이 아기를 기르는 건 아니야. 아까 말해두었지만, 아기를 기르는 일을 할 사람들은 차고 넘쳐. 아마 자신의 아기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가 자신의 어른을 낳은 뒤, 부풀어오른 젖가슴을 싸게 팔 여자는 많아. 그렇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고 산타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들을 즐기며 살아. 

아기를 낳는 또 다른 분류의 사람들은, 앞선 부류의 사람보다 더욱 적어. 사실, 많을지도 모르지. 근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아. 왜냐하면 자신이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을 들키면 앞선 부류의 사람들이 그 아기를 죽여버리고, 그 부모도 죽여버릴 것이 분명하거든. 누군가 자신이 가진 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아. 그렇기에 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깊은 산속이나 사람들이 잘 살지 않는 바다의 외딴 섬에서 살아. 도시도 가끔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방음처리가 잘 된 지하의 공간에서 그들의 아지트를 만들었지. 아기 울음 소리가 새어 나가면 안되니까 말이야. 아, 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을 안했구나. 놀라지 말길. 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그 누구와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저 이 사람들의 평범함은 이 이상한 세상의 평범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조이자,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시절의 평범함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아기를 낳아서 줄어든 잠을 이겨내기도 힘들지만 아기의 옹알이와 그 웃음 하나에 피로가 풀리곤 했던 예전 선조들의 평범함이지. 중학교 교복을 사주며 느꼈던 뭉클함과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느꼈던 묘한 상실감 등을 느꼈던 것들 말이지. 지금 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전에는 숨지 않았었어. 처음에 진화가 시작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어른을 낳는 것으로 진화했을 당시, 앞서 언급했던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그런 권력과 추억을 가진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할까봐 몇몇의 사람들이 진화를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권리를 인정해주었지. 하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더 이상 권리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았어. 진화를 거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어른을 낳는데, 왜 아무런 권력도 없는 일부의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만이 그런 특권을 유사하게 가지나며 반대했고, 폭행했고,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게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없애줄 것을 법으로 요청했지. 그게 시행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 두 번째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유전자를 몰래 이어오게 된 거야.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했던 사람들이 비밀조직처럼 살아가게 된 거지.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평범해. 아니, 평범하지는 않은 듯 하기도 하다. 그들은 진화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야. 다시,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기 위한 어른, 어른을 낳기 위한 여자를 낳을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결혼하고 또 지극히 평범하게 아기를 기르며 느끼는 고통을 느끼길 바라는 것 뿐이야. 그리고 아이들도 그들이 어릴 적 느꼈던 느낌과 추억들을 갖고 길고 긴. 힘들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또 그런 추억들을 만들며 살아가길 바라는 것 뿐 인거지. 평범하지 않은 평범함을 이 사람들은 지켜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묻혀 있던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 중 한 부부가 있었어. 자신들이 낳은 갓난 아기를 안고, 이 부부는 지하실에서 걸어나갔어. 처음에 이 부부가 세상으로 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저 부부가 안고 있는 이 조그마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어. 웅성거림이 시작되었고, 아기는 엄마의 품임에도 주위의 웅성거림에 놀라 그만, 아앙앙 울어버리고 만거야. 그러자 일제히 사람들이 저 존재가 자신들은 겪어보지 못했던 아기라는 것을 깨닫고 멀리 도망을 쳐버려. 하지만 그 울음소리가 자신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고 또 그 울음 소리가 주는 생동감과 가슴을 저미는 모성애에 이끌려 몇몇 여자들이 그 아기를 보기 위해 다가왔어. 그리고 남자들 중 몇몇도 그 아기가 우는 소리가 자신을 지켜달라는 소리로 들린 듯 해 가까이 다가왔어. 어느새 아기를 안고 있던 두 번째 부류의 평범한 부부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게 된거야. 그리고 그들은 하나 같이 모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따뜻한 표정을 짓고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어. 탕! 멀리서 들린 소리인 듯 큰 소리가 났어. 그리고 더 이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어. 그 이유는 아기의 머리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야. 아기의 머리 대신 그곳에는 붉은 피와 살점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어. 그리고 이윽고, 탕탕. 다시 두 발의 총소리가 났고 그 자리에서 두 번째 부류의 평범한 부부가 총에 맞아 죽었어. 어디서 쏜 것인지도 모를 총에 두 명이 아닌, 세 명의 사람이 죽었어.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듯 자리를 서둘러 피했어. 모두가 사라진 자리,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보낸 ‘일을 하는 어른’들이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과 여러 흔적 그리고 아기 냄새를 없앴어. 이 부부의 죽음은,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의 역사에 평범하게 남아있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기. 죽다. 

이상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우리가 모르던 세상이지. 진화가 일어나기 전이라, 이상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이 진화, 곧 일어날 것 같아. 그때가 되면,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산타 할아버지를 기대하는 어린이는 없겠지. 선물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 연말인데, 감기 조심하고. 내년에는 더 행복하자. 우리 모두 어릴 적 가졌던 꿈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말이지. 미래에 진화하면 ‘어릴 적 꿈’ 같은 말도 사라질 수 있으니까 말이야. 모두들, 새해 복들 많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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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0. 18:21 내 생각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처음 아동양육시설(고아원)이 공익근무요원으로서의 근무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으레 동사무소나 시청에서처럼 공익 같은 공익(?)의 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잡무를 하거나 개인적 시간이 많은 그런 공익생활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동들의 학습 지도, 병원에 차로 데려다 주는 것, 식자재 구입에서 부터 증개축을 할 때에는 건설현장 인부 같은 일까지 하였고 소집 해제 직전 몇 개월 동안은 요리를 담당해 직접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일이 힘들었겠다 싶겠지만 사실 가장 힘든 것은, 아동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 부모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만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맡겨진 아이들 등 살아오면서 직접적으로 마주할 기회가 적었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해 아침에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 나가는 일은 스스로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다.


지금도 고향에 추석이나 설날에 내려가게 되면, 아이들을 위한 사탕을 꼭 두 봉지 씩 사고 또 사회복지사와 직원분들을 위해 박카스를 한 박스 사서 들른다. 공익을 마친지 10년이 되어가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러고 있다. 제일 최근에 방문했을 때는 살짝 충격도 받았다. 내가 공익근무를 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을 간 아이도 있었고, 취업을 한 아이 그리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그곳에서 일을 할 예정이라는 아이도 있었다. 시간이 그렇기 흘렀구나 싶으면서도 이 아이들이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 부모의 재산 여부에 따라 계급이 나눠진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 내에서 이 아이들은 어떤 수저, 아니 수저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이런 시설을 나온 아동들이 자신들의 재정관리 및 경제에 관한 교육이나 조언을 받지 못해 힘들어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돈을 가져본 적이 없고 또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른다는 어려움에 빠진 시설 출신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작은 결론을 내렸다.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시설출신들에게 경제 교육 뿐만 아니라 재무관리를 도와주고 장기적인 계획을 이뤄나가는데 가족 같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돈을 단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해주고 또 일자리나 복지 등에 대한 관리 및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회적 기업. 이런 회사가 벌써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없다면 지금이라도 만들어 재무관리 전문가와 사회복지 전문가 등으로부터 시설출신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실제로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만드는지는 슬프게도 잘 모르겠다. 생각만큼 쉽진 않겠지만, 왜 지금에 와서야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됐는지 스스로가 미울 지경이다.


공익근무를 하며 이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다시 대학에 가서 고시에 합격해서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전부 진행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계획이 실패했다고 해서 아이들의 삶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지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로서 함께 그들의 경제적 삶에 도움이 되는 가족이 되어주고 싶다.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나는 요즘 공부를 하다가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사회적기업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산다. 답 알고 계신 분은 연락주시면 산타가 선물을 주실지도.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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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0. 18:18 내 생각

“관심”  20161223


고속버스 안, 창가에 앉으신 어머니와 복도에 앉은 작은 아들. 오론도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을 향해 가고 있는 모자를 쓰지 않은 모자. 시내를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창 밖에 산과 들이 보인다. 한국은 참 산도 많다 싶다는 생각이 또 다시 스쳤다. 그때, 어머니께서 내가 모르는 나무의 이름을 나지막이 외치시며 창 밖의 언덕에 손가락을 가리키신다.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차리기도 전에 언덕은 버스 뒤로 사라져갔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 묻자, 그건 어떤 나무이며 이 계절에 꽃을 피운다고 설명해주신다. 그리고 또 이어 무슨 꽃인지를 가리키시는데 이번에는 제법 먼 산에 핀 꽃들이다. 산이 멀어 나도 그 꽃이 어떤 꽃인지 드디어 알아보곤 어머니의 설명을 듣는다. 이어 또 다른 나무, 꽃, 잎의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나는 어머니가 신기해졌다. 어떻게 저 많은 꽃들과 나무들을 알고 계실까.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께서는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를 보며 자라오셨을 것이다. 그것을 애써 외우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 그저 그것들에 관심을 갖고 이름이 무얼까 궁금해하시며 외삼촌이나 이모들에게 물어 알게 되셨으리라. 나에겐 그저 많고 많은 산이었던 것이 어머니께는 꽃나무가 있고, 열매를 선물해주는 고마운 나무가 모인 학교였다. 


그렇게 관심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사소한 관심이란 없다. 거대한 관심도 없듯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소중히 생각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어느 하나 허투루 보이는 법이란 없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나하나 알게 되고, 그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간다. 관심이란, 큰 힘을 갖고 있지는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한 명의 사람에게 또는 하나의 사물에게 그 사람/그것 만의 이야기를 심어주고, 또 그것으로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다시 우리에게 선물해주는 듯 하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문구가 담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 틀린 말은 아니나, 사랑보다 먼저 갖게 되는 것은 관심이 아닐까. 그것이 비록 사랑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하여도. 뭐, 현대인들은 관심 가진 게 너무 많아 탈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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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1. 00:50 내 생각

“알바 시각표” 


‘이러다가 분명, 또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받지 못 할거야. 어떻게 하지? 내가 얼마만큼 일을 했는지, 시각표를 적어놔야겠다.’ 


2004년 겨울, 아직 11월임에도 더 이상 추울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추위가 이어졌다. 내가 일했던 주유소는 바다를 메워 만든 매립지에 세워져 있어 바다와 상당히 가까웠다. 바다는 다른 건물들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의 비린 냄새와 함께 차가운 겨울 바람은 주유소 곳곳을 파고 들었다. 나는 몇 번이고 주유소 소장님께 아르바이트를 위한 대피장소, 그러니까 주유소에 들어가면 흔히 보이는 조그마한 부스를 하나 사서 설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아 벌벌 떨며 손님을 기다려야만 했다.


10월에 시작한 주유소 주유원 아르바이트도 이제 손에 익을 무렵, 10월 달의 급여를 처음 받았을 때 생각했다. ‘내가 일한 시간보다 적은 금액이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 시간을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라고 정해두긴 했지만, 매번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른 손님들의 차에 기름을 넣는 일이 많았고, 추가 근무에 대한 것은 으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추가 근무에 대한 급여를 달라고 해도 소장님은 가끔 저녁을 사주는 것으로 몇 일 간의 추가근무에 대한 급여를 지불하는 것이라 여기시는 듯 했다. 


11월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집에 있던 A4 용지 한 장에 11월의 달력을 한 장 그려갔다. 토, 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으므로 11월 한 달의 달력은 딱 내가 일을 할 날을 의미했다. 그리고 달력 위에 내 이름을 적어 소장님께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하며 드렸다. 


“소장님, 제가 이런 걸 한 번 만들어 봤습니다. 이번 달 말에 알바비 계산하실 때 편하게 하시라구요.” 


소장님은 그 종이를 받아 드시더니, ‘이게 뭘까?’ 하는 눈빛으로 내가 내민 종이와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보셨다. 그리고 이윽고 “그래, 내가 일일이 못 챙길 수도 있으니까 월말에 다 적으면 나한테 다시 보여줘.”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소장님께서 화를 내시거나 혹은 내게 지난 달 급료가 적었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내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아마도 지난 한 달 간 내 근무 중, 주유 실수도 없고 또 청소나 단골 관리 등을 솔선하여 하는 모습들을 보시며 칭찬을 하셨던 것을 떠올리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부터 퇴근하기 전 내가 몇 시에 출근을 했고 또 퇴근을 했는지를 정확히 계산해 표에 적어 넣기 시작했다. 월말이 되면, 총 몇 시간을 근무했는지를 모두 더한 값을 적어서 소장님께 드렸고 그렇게 나는 내가 일한 정확한 시간에 맞는 시급을 받았다. 그 당시 내가 한 달을 꼬박 일하고 받은 돈은 약 8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표는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왔을 때도, 같은 표를 만들어 올 것을 소장님께서 요구했고 그것을 적어 채워줄 것을 요구했다.) 


최근 대기업의 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생의 시간을 쪼개고 뭉개는 형식으로 약 4만 명이 넘는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84억에 달하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은 것이 뉴스가 되었다. 깊은 화가 났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이 더러운 옛말을 아직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기업이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몇몇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식으로 어딘가에 취업하기 전, 아르바이트는 간접적으로 사회를 배우고 또 자신의 경험을 쌓는 좋은 기회이지 않냐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다. 지금 현재의 한국에서는 아르바이트는 결코 젊은 사람만이 하는 것도 아닐 뿐 더러, 젊은 사람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더욱 보호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찬란한 시절의 가치인 ‘젊음’이라는 시간을 써서 최저시급을 받아가며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경험이 되기 때문도 아니고, 사회를 배우기 위해서도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위해 단기적으로 나마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 따위가 아니다. 삶의 유지에 필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 돈이다. 


봉사는, ‘돈을 벌지 않는 일’이 아니다. 돈이 아닌 또 다른 가치를 벌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봉사다. 그렇기에 결코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소비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마치 ‘봉사’나 ‘의무’와 같이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아르바이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자신의 시간을 들이는 모든 경제관계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연인 사이에서도 스스로가 원하지 않은 것을 해달라며 요청하곤 그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결코 서로에게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임에도,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설명하진 못해도 느낄 수 있다. 


사람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글을 정리하며, 일본에서 유학했을 때의 이야기를 남기고자 한다. 당시 여자친구가 없었던 나는 일본인 친구들 중 한 명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기 전, 한국과 일본에 연애에는 다른 점이 있을까 해서 일본인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일본인 여자친구와 가까워질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우선 밥을 같이 먹어라. 그리고 밥을 같이 먹을 정도의 사이가 되면, 술을 함께 마셔라. 그러면 그 여자는 너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고백을 해도 된다’ 따위의 어이 없는 대답을 내게 해주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나는, 왜 그런 순서로 이어지냐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 밥을 함께 먹자고 한 이야기를 듣고 같이 밥을 먹고, 또 술을 마실 정도라면 그 여자는 너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소중한 자신의 시간을 들일 만큼.’ 


나는 시간이 소중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것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소중하기에 그 사람이 가진 시간 역시 소중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사람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두고 있을까? 한 명의 아르바이트가 어떤 일에서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언제나 대체가 가능한 사람으로 여겨지는지, 아니면 그 한 명이 소중하고 또 관계에 있어서도 유지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지 궁금해진다. 궁금해지기도 전에 우리 사회는 그 답을 이미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틀린 답을 정답이라고 우기며. 


한 명의 아르바이트라 할지라도 소중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시간은 결코 스스로가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지켜 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 모두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지켜주기 위하여 발전해 온 역사가 우리 인류의 역사이자 자유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아, 너무 멀리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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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6. 01:41 내 생각

“2005년 산 포도주

 

10시가 넘은 시각,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글자를 보내주는 친구들에게 푸념하고 있을 때, 마침 같이 사는 친구가 집으로 돌아왔다. 부스스한 머리, 추위가 잔뜩 묻어 있는 어두운 색의 롱코트 그리고 손에 든 한 병의 포도주. 송년회를 하였다며 먹다 남은 포도주를 들고 왔다 한다. 포도주의 라벨에는 이 포도주가 2005년 산()이라는 표식이 있었다. 2005년이면,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다. 그리고 이 포도주의 고향은 프랑스다.

 

집에 있는 몇 개의 안주거리를 꺼냈다. 먹다 남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전과 몇 조각의 치킨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냉장고의 냉기를 덜어냈다. 포도주 잔을 두 개 꺼내고 접시를 꺼내 가벼운 포도주 술상이 차려졌다. 포도주는 병의 3분의 1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작은 포도주 잔을 꺼냈기에 망정이지 큰 것을 꺼냈으면 한 명이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을 양이다. 포도주 잔에 조금씩 포도주를 따른 뒤, 쨍 하는 소리의 건배를 했다. 친구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며 안주를 덜어 들고 가서 포도주를 마셨다. 나는 식탁에 그대로 앉은 채로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친구들에게 밀린 답장을 한다. 고마워. 다시 쓸 수 있게 되면 써서 보낼게.

 

비워진 포도주 잔을 다시 몇 번 적게 채워 넣으며 마시고 난 뒤, 포도주는 바닥을 보였다. 치킨이 두 조각 남았지만, 저녁을 일찍 먹은 탓에 다소 허기졌던 내가 먹어 치웠다. 안주를 모두 다 먹은 뒤, 젓가락과 접시를 탑 쌓듯 포개어 싱크대에 넣어 놓고 포도주 병을 재활용 분리수거 상자에 넣으려 일어났다. 그리고 혼잣말을 공기에 툭 던졌다.

 

“2005년 산이라.”

 

내 말을 들었는지 친구가 한 마디 거든다.

 

그거 한 병에 30만원 짜리다.”

 

순간 멈칫, 했다. 이 포도주 한 병이 30만원이란 말인가. 포도주를 마시기 위한 건배를 하기 전, 2005년 산이라는 것을 보았을 때 이건 어느 정도의 가격일까 궁금했다. 친구는 그 때는 별 말 하지 않고 단지 좋은 거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2005년 산이면 꽤 오래된 것이라 했다. 나는, ‘2005년이면 우리가 21살 때인데, 그 사이 11년이 벌써 흘렀네. 11년이면 포도주한테는 긴 시간일 수 있겠네.’ 라 하며 가볍게 넘겼다. 포도주의 가치를 알았다고 해도 또 몰랐다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하룻밤의 마무리를 기분 좋게 도와주는 정도였다. 가치와 가격과는 관계 없이, 마셔서 기분 좋은 것으로 감정이 정리되는 어떤 것. 그럼에도 이것의 가격을 안 뒤, 순간 생각에 잠겼다.

 

나는 2005년 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더 숙성되었나. 얼마나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나. 사람을 물건처럼 가격으로 따진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내가 일을 하며 받았던 돈으로 비교는 가능하리라. 20, 2004 12월 당시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았던 시급이 2800원이었다. 이 시급도 원래 2700원이었던 것을 한 달 간의 근무성과를 강하게 사장님께 피력한 결과 100원의 인상을 얻어내었던 사소한 승리였다. 한 시간 2800원을 받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한다면 어떤가. 가장 최근에 돈을 번 것이 일본어 통역을 하였을 때인데, 2주 정도의 일정을 소화하고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하루로 따지면 15만 원 남짓. 단지 금액으로만 따지면 악화되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큰 성과를 내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10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포도와 설탕이 원목으로 만들어진 통에 들어가서 10년을 담겨 있던 기간과 나의 20대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두 번의 대학교 입학과 한 번의 대학원 입학, 군대 입대 실패와 아동양육시설에서의 공익근무 그리고 1년 간의 일본 생활과 2년 간의 고시생 생활 등 넓게 펼쳐졌던 삶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늘의 포도주는 나에게 조용히 이야기 한 잔을 권했던 것은 아닐까.

 

흔들리지 않는 통에 들어 앉아 생각했다. 사람들은 내가 여기 가만히 오래 있을수록 나의 가치를 높게 쳐 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흔들리며 넘어지고 일어나서 다시 넘어지며 그 가치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란 사람들이 자신만의 길을 열고 아픔을 겪으며 그 사이 얻을 수 있는 성취들을 이뤄나가는 중, 그들에게 잠시 기쁨을 주는 것. 아무리 내가 비싸진들 나를 마시는 어느 누구보다도 결코 그 가치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를 마신 그대여. 자신이 만든 통 안에 갇히지 마라. 어지럽게 흔들리고 넘어졌다 일어나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며 울다가 웃어라. 그러다 가끔 힘이 들 때 나를 한 잔 들이켜 다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자유로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2005년 산 포도주 한 잔 마시며, 산미(酸味)와 생미(生味,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맛)을 생각한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어떤 것들이라도 그것이 나의 가치를 낮게 할 것이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겠다. 20살 이후 지난 10여 년 간의 기간을 지내오며, 쉽게 손에 잡히지 못했던 생각을, 2005년 산의 포도주를 마시며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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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2. 01:07 내 생각

“겨울이 되면”  20161212


날씨가 추워졌다. 무더웠던 여름은 사진과 추억으로만 남았다. 추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덜 춥다는 생각도 든다. 더 추워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여름의 장마와 가을의 낙엽이 남긴 나쁜 박테리아나 세균들이 추위에 죽기를 바라는 어흥~ 마음이 있다. 또 지금보다 더 추워야 보리밭에 보리뿌리가 들뜨지 않아 내년 보리 농사가 잘될텐데 하는 으휴~ 마음도 있다. 도시 사는 사람이 별걱정을 다한다.


이런 걱정들과 별개로 겨울이 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친형은 집 밖에 나가서 노는 걸 참 좋아했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을 시절부터 나가 놀기 버릇한 형은,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가면 놀다가 누군가의 집에서 저녁밥까지 먹고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나는 날씨가 따뜻하면 형과 같이 가끔 놀러 나갈 때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집에 가만히 앉아 벽이나 스케치북에 항칠(낙서라는 뜻의 사투리)을 하며 나의 일과와 어머니의 소일거리를 만들어 냈다. 겨울이 아닌 계절에는 형과 같이 나가 놀고 싶어도, 형은 나를 번거로워했기에 같이 나가서 노는 게 서로에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형은 나에게, 너는 너무 어리고 이해가 느려 같이 놀면 답답하다고 했다. 나는 형의 말을 듣고 울며 엄마~를 불러 찾고 있으면 그 사이 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참고로 형과 나는 한 살 차이다.)


해가 지고 어머니의 걱정이 화로 바뀔 무렵, 형은 빨개진 볼로 집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노는 게 재미있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막상 밖에 나가서 할 수 있는 놀이라곤 숨바꼭질이나 자치지, 비석치기, 다방구, 팔방, 구슬치기 등 몸뚱아리 하나와 나무 막대기나 돌조각 따위라도 있으면 되는 유치하기 그지 없는 놀이들이었다. 재미의 요소는 놀이 자체에 있다기 보다, 형은 친구들과 동네의 형들과의 시간이 더욱 즐거웠던 듯 했다. 나는 형과 노는 게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집에 돌아온 형은, 손과 발을 참으로 대충 씻었다. 손을 씻은 물에 발을 씻을 때에는 발을 세숫대야에 넣고 선 채로 아래위로 스윽슥 비비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어머니한테 걸리면 혼이 나서 그때서야 제대로 다시 씻었다. (씻는 걸 참 싫어했던 형이다 싶었다가도 성인이 되어 여자친구 만나러 나갈 때 그렇게 깨끗이 씻는 형을 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이런 형은 겨울이 되면, 한 명의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친구의 성은 ‘동’이고, 이름은 ‘상’이었다. 동상이라는 친구는 형의 귀에 딱 붙어 헤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형은 그 친구가 가렵고 아프게 괴롭혔던지 자다가도 일어나 귀를 긁어댔다. 피부가 사춘기를 지나지 않아 얇고 여렸을 때였으므로 동상에 걸릴 수 있다고 쳐도, 동상에 걸릴 때까지 노는 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형이 잠을 못들 정도로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께서는 형을 깨우고 가만히 반짇고리를 꺼내오셨다. 일어나 앉은 형은,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기다렸다. 어머니는 반짇고리에서 바늘을 하나를 꺼낸 뒤 그것을 머리칼에 몇 번 샥샥 비비셨다. 그리고 형의 귀에서 검게 변한 귓바퀴 부분을 바늘로 콕 하고 찌르셨다. 준비하고 계셨던 휴지로 바늘로 찌른 귓바퀴를 감싸며 꾹 누르면, 형은 아파했지만 휴지에는 검게 변한 피가 젖어 나왔다. 형은 ‘아, 아프다~!’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귀를 빼지도 어머니로부터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양쪽 귀 모두에서 동상이라는 친구가 들러붙었던 피를 빼내고 나면, 형은 다시 전에 없던 평화를 되찾은 듯 새근새근 잠이 들곤 했다. (형의 잠자는 모습은 참 평화로웠고 고요했다. 어머니도 나도 형의 자는 모습을 참 좋아했다.)


그렇게 몇 번, 동상이라는 불청객이 형의 귀에 찾아오고 나서야 겨울이 끝났다. 한 번 동상에 걸리면 추운 겨울에 다시 놀러 나가는 게 두렵기도 했을 법 하지만, 형의 외출은 끊이지 않았다. 동상이 정말 친구라도 되었던 것일까.


요즘 아이들도 귀에 동상이 걸릴 만큼 노는지 궁금하다. 어른만큼 어린 아이들도 바쁜 시대라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을 다니고, 공부를 하느라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하는 어린이도 많다고 한다. 이 아이들에게 겨울은 어떻게 기억이 될까. ‘추운 겨울’로만 지금의 계절을 설명하는 것은, 뭔가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피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형의 귀를 보며, 신기해 했고 어이없어 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형이 나와 함께 놀아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형이 동상에 걸리면 속으로 ‘꼬시다!’라며 통쾌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다 깬 형이 어머니께 꼼짝없이 잡혀 귀에서 죽은 피를 빼 내는 것을 보며 걱정도 했을 것이다. 아프지 말지. 아프지 말지. 밖에 나가 노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형이 아프지 말았으면 했던 마음도 있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서 다시 봄이 오면, 나와도 함께 놀아달라 말하고 싶었다.


이제 같이 놀자 말하기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형은 몇 해 전 결혼을 했고, 남자 아이 한 명과 여자 아이 한 명의 아버지가 되었다. 같이 놀자 말하면 뭐라 할까. 이번에도 어리다고 할까.


겨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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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8. 00:14 내 생각

행복하셨는지 물어볼 수 있다면”  20161208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건 미래의 거대한 기계보다 때론 지금의 한 장 사진이 더욱 그 효과가 클 때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갖고 있지도 않은 사진이지만,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며 어머니와의 시간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의자에 앉으신 채 형과 나를 다리 위에 한 명씩 올려놓고 또 안고 계셨습니다. 사진 속에는 세 명 모두 웃는 얼굴입니다. 어머니와 형과 나. 가장 환하게 웃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긴 파마 머리에 스웨터를 입고 계신 어머니. 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니면 바깥의 추운 날씨와 집안의 따뜻한 기온 차이 탓인지 얼굴은 붉어져 있습니다. 저는 3살 남짓 되었을까요. 몇 개 있지도 않은 치아를 빼꼼 보이며 역시 붉은 양볼 사이 수줍게 웃고 있습니다. 형도 특유의 귀여움을 잔뜩 품고 웃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의 웃음이 밝고 환했습니다. 장롱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계신 어머니. 사진은 누군가 앉아서 찍은 듯 아래에서 위로 찍힌 모습이지만, 웃음과 행복을 담기에 적절치 못한 각도란 없습니다. 그 어머니의 웃음이 지금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느 덧 저는 사진 속의 어머니와 비슷하거나 많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시간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행복과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울에 오기 전이나 고향에 방문할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어머니의 이야기라곤 했지만 특정한 어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결혼으로, 느끼게 된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는 분명 제가 기억하는 저 사진이 찍힌 당시도 포함될 것입니다.

 

저는 슬펐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제가 어머니의 행복을 빼앗아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건 아닌지 슬퍼졌습니다. 젊고 활력이 넘치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이나 추억 속에서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서글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저 역시도 이렇게 사진 속의 어머니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가 없어져도 좋으니, 시간을 되돌려 결혼은 하지 말라 농담 삼아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 어머니가 저의 어머니여서 좋습니다. 살아가며 힘든 사이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모습. 전 그 모습이 좋습니다. 그래서 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제 기억 속에 있는 저 사진 속의 어머니께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럼 어머니는 대답하시겠지요. 힘들지만 행복합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 사고를 치거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 아이들의 아버지인 남편이 나를 힘들게 할 수 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들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수많은 힘든 일 사이에서도 저는 지금 웃을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도 있는 불행이 있겠죠. 그렇지만 그때에도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에게는 제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전 행복했던 기억으로 그리고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머니. 어느덧 작은 아들도 나이 서른을 넘기고 이제 서른셋이 되기까지도 시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합니다. 행복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와 행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행복을 기대합니다. 어머니와의 행복을 기대합니다. 어머니께서도 기억하고 계실지 모를 사진 한 장에, 작은 아들은 오늘 가볍게 시간 여행을 했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저와 친구가 될 법한 나이의 어머니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둘도 없을 웃음을 지으시며 저와 형을 안은 채 대답하셨습니다.

 

행복합니다.

 

제 글이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보내셨을 어머니께 잠시나마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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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 11:02 내 생각

‘시멘트 핫도그’ 20161203

 


2009 1,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위앙짠)의 근교, 어느 한 초등학교에서 2주간의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유스클립(Youth CLIP)이라는 대학생국제교류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였고, 보건복지부의 후원으로 진행하게 된 봉사활동이었다. 2주간 내가 맡았던 업무는 다름 아닌 도서관 짓기였다. 그곳의 초등학교는 교사(校舍)와 화장실 건물만이 있는 곳이었기에 도서관을 세울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당시 현지에서 활동중이던 시민단체로부터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라오스에 가기 이전까지 내가 손에 벽돌을 잡아본 적은, 2006년 아동양육시설에서 공익근무를 할당시 식당을 증축할 때 뿐이었으므로 완전 초짜였다. 현지의 인부-라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지역 주민들이었다와 협력하며 도서관의 바닥이 될 곳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쪽에 널찍한 공간이 형성된 뒤, 본격적으로 벽돌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평소 한국에서 길을 걷다가 집이나 건물을 새로 짓는 공사장을 지나가며 보았던 대로, 현지 인부들이 쌓아놓은 벽돌 첫 줄 위에 잘 게운 시멘트를 얇게 발랐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벽돌 줄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올려놓는 일이 반복되었다. 집중해서 몇 장 째 올리고 있었는데, 현지인 인부이자 2주간 봉사활동 끝에 친구가 된 뎅(빨갛다는 의미의 이름)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사래를 쳤다. 뎅이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라는 건 확실했다. 이어 뎅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망치로 내가 쌓아 올린 벽돌을 가볍게 툭 하고 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하며 놀라기도 전에 벽돌은 힘없이 툭 하고 쓰러졌다. 나는 당황했다. 분명 벽돌은 세워져 있는 듯 보였다. 몇 장의 벽돌이 아주 보기 좋게 줄지어 서 있었고, 그것은 내가 익히 보던 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뎅은, 그렇게 해서는 벽돌이 제대로 붙어있지 못한다며 직접 시범을 보였다. 잘 게운 시멘트를 한 움큼, 손에 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판자에 덜어내더니 그것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꽤 두꺼운 핫도그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워져 있던 벽돌 위에 툭 하고 올려놓았다. 그럼 벽돌 위로 핫도그 모양의 시멘트 덩어리의 반 정도가 드러나 보였다. 나머지 반은 아래 벽돌과 접착되어 있었다. 드러난 반 정도의 시멘트 핫도그 위에 새 벽돌을 올리자 새 벽돌의 무게에 의해 시멘트 핫도그는 납작 눌려졌고,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들이 삐죽하며 묻어 나왔다. 그것을 시멘트 칼로 긁어내자, 그때야 비로소 내가 흔히 보던 모습의 벽이 드러났다. 이어 뎅은 다시 망치를 들어, 처음에 내가 세웠던 벽돌을 넘어뜨리던 강도와 비슷해 보이는 강도로 그 벽돌을 툭 하고 쳤다. 벽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가 잘 접착되어 있었기에 벽돌은 큰 흔들림이 없었다.

 

방법을 알게 된 나는, 2주간의 시간 동안 벽돌 쌓기에 나름의 조예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실제 공사장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우스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여타 봉사자들보다는 빠르고 바르게 벽돌을 쌓아 올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덕분에 내 손과 얼굴은 거칠어져 갔지만 말이다.

 

라오스에 가기 전까지 벽을 보면, 보기만 좋은 그 평평한 모습만 생각했다. 벽돌은 아주 얇게 바른 시멘트로도 충분히 붙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벽돌을 서로 붙이기 위해서는 보이는 양보다 보이지 않는 꽤 많은 양의 시멘트가 필요했다. 그것들이 끈끈히 붙어 무너지지 않는 벽이 되었고, 건물이 되었고 라오스에서는 도서관이 되었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어떻게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겉으로 보면 별다른 것 없이 멀끔해 보이지만 사람들 사이 사이에도, 제도 사이 사이에도 두꺼운 핫도그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다. 그것이 개인 간에는 사랑일 수도 있고 가족 안에서는 책임감과 존경일 수도 있고, 사회 전체로 보면 법과 제도든지, 민주주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겉에서 볼 때는 어떻게 지탱되고 유지되는지 궁금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어떤 시련이나 고난이 닥치면 결국 이런 끈적임과 접착력이 그것을 지켜준다. 사랑, 가족애, 책임과 의무,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그것들 결국 하나로 묶으면 연대(連帶)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아껴 여기고, 누구 하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손을 잡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려 할 때 힘을 모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시멘트 핫도그가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겉모습에 신경을 써온 듯 했다. 겉으로 멀끔하면 되니, 부실공사를 한 탓에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붕괴했고, 씨랜드에서는 유치원생과 선생님을 포함한 2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세월호가 가라앉으며 사망자 295명과 실종자 9명이 발생한 것이다. 겉보기에 배는 바다에 침몰하지 않을 듯 보였다. 바다에 빠지더라도 나라가 승객들을 구해낼 것이라는, 국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 사회적 연대는 원활히 진행되지도 않았다. 불필요한 색깔 논쟁과 유가족을 비난하는 글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법적인 책임만이라도 제대로 묻길 바랐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다시 말해 벽 안에 끈끈히 묻어 있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그것은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 필요한 시멘트 핫도그 보다 더욱 중요하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공교롭게도 우리는 사회적 연대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 누구를 지킬 것인가. 누가 국가를 지킬 것인가. 지킬 것은 자기 자신 뿐인 세상에 살고자 하는가,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가. 산업화가 주었던 사회적 연대 배고픔과 민주화가 주었던 사회적 연대 민주주의를 넘어 무엇을 사회적 연대의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해 보인다.

 

일을 마치고 난 뒤 뎅과 술을 마시면, 우리는 서로를 격려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우리가 느꼈던 연대감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난 뒤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 우리 친구의 이야기이며,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며, 우리보다 먼저 더 나은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남긴 이야기들이다. 더 튼튼한 벽을 세울 것이다. 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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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 20:55 내 생각

벗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걸.’ 2016.12.02.

 

대부분의 친구들은, 졸업을 할 초등학교 인근의 중학교를 갔다. 하지만 나는 형이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체학급에서 단 10명 만이 진학을 했던 마산중학교에 지원했고 어렵지 않게 입학이 결정되었다. 굳이 형이 다니고 있다는 이유가 아니었어도, 유일하게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는 것도 큰 결정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중학교 진학이 결정되고 난 뒤, 내가 처음 한 일은 머리카락을 짧은 스포츠로 깎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두발자유화는 꿈 같은 소리였다.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나는 스포츠 머리에 익숙해져야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되려 어색한 머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졸업앨범에는 정말 이상한 모습으로 찍힌 사진이 떡 하니 남았다. 졸업앨범 사진을 정식으로 촬영하였지만,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며 복도에서 찍힌 스포츠 머리의 내 모습은 지금 봐도 우스꽝스럽다. 거기다가 그날 입고 있던 옷이 하늘색 면 셔츠였다. , 하늘색이라니. 가능하다면 같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동기들의 앨범을 모두 몰수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그리고 이어 두 번째로 내가 중학교 진학을 위해 한 일은 교복을 맞추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특이한 선택을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교복 브랜드는, 스마트와 엘리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교복판매점에서 중학교 교복을 맞추게 되었다. 이것도 형이 그곳에서 맞추었기 때문이었고, 브랜드가 없는 대신 그만큼 저렴했다는 것이 이유일 수 있겠다.

 

처음 교복을 받아 온 날이었다. 마산중학교 교복은 정말 특징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교복이었다. 남색 상의에 같은 색깔의 하의. 단추에는 한자로 적힌 중학교를 뜻하는 중()글자가 금색으로 반짝였고, 상의소매에도 같은 형태이지만 크기가 작은 단추들이 3개씩 붙어 있었다. 흰 셔츠는 분명 면이라고 했지만, 이상하게 삼베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칠었다기 보다 삼베처럼 실 한 올 한 올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징도 없고, 고급 교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교복을 나는 매일, 입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한참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중학생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많아질 듯 보였고, 정장 형태로 된 교복을 입으면 마치 내가 어른이 된 듯해 기분이 좋았다. 학교에서 하교 한 뒤 교복을 집안에서 입고 다니는 이런 나를 보며, 내가 곧 들어가게 될 마산중학교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 형이 나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그거, 입기 싫어도 입어야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벗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걸.’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다는 것은 지금의 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의미였고, 이렇게 교복을 입고 있으면 번듯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친척들은 나의 중학교 입학을 축하해주었고, 내게 기대하는 것들을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중학교 교복을 입을 때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며 멋진 중학생이 되어야지, 하며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형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게 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1년이 지나는 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선배들은 무서웠고, 선생님들은 더욱 무서웠다. 체벌이 당연했던 시절이라 사소한 잘못에도 선생님들은 가볍게 매를 들었지만, 그 매는 마음에 무겁게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시점이 되어서는 체벌은, 마치 경주마를 다그치듯 너희를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양 뺨에서부터 발바닥까지 이어졌다. 교복을 입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중학생이라는 신분 뿐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의무는 자질구레한 것부터 때론 억울하다 느껴질 정도로 큰 것까지 많고 많았다. 그 결과 교복은, 매주 주말 다시 입고 싶지 않은 것이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교복을 입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었다. 하늘색(난 하늘색을 좋아하는 것인가...) 운동복을 입고 졸업식을 보내며, 고등학교 교복에 대한 환상 따위는 이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고등학교에 또 올라가는 것.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히 가야한다는 분위기에 취해 대학을 가는 것. 물론 당연하지 않았던 뭇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내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오며, 그 의미를 만끽했던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군대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시력 탓에 공익을 가게 되며 겪게 되었던 차별 혹은 비판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고, 30살이 넘으며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사회적 의무들은 나도 모르게 나를 옥죄었다. 그리고 의무에 허덕인 탓에 권리는 간신히 그리고 어렵게 하나씩 얻어갔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중고등학교 입학이 그럴 것이고, 대학 입학이 그럴 것이고 취직, 결혼, 출산 등이 그럴 것이다. 이런 다양한 능선들이 눈 앞에 있을 때 그것을 정복하든 우회하든 그것을 선택함에 있어 책임은 다양하게 삶을 파고든다.

 

평범한 사람이 이럴진대 다른 이들보다 특별한 지위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책임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작게는 카페나 구멍가게의 사장에서부터 크게는 한 나라의 대표라고 부를 수 있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쉽게 얻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과는 별도로 그것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책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카페 사장은 손님들을 위해 맛있는 커피를 준비해야 하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은 공정하게 국민들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고, 정의롭게 국가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원한 지위에 해당하는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복은, 단지 교복일 뿐이었다. 그것을 입고 있다고 중학생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벗었다고 중학생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중학생이면 중학생이 해야 할 일이 있고, 고등학생이면 또 그 나름의 의무와 권리가 생기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가지로 가족 안에서, 지역 안에서, 국가 안에서 그런 의무와 권리는 생기기 마련이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해 교복을 벗고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그것이 주는 지위와 권리, 권한을 버리고자 한다면 자퇴를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손실이나 권리의 상실은 자신의 책임 범위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은 원하지 않았어도, 큰 잘못이나 학교나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람은 퇴학을 당하기도 한다. 그 교복을 입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해도 또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 해도, 그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또 다른 교복을 입고 있는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수치심을 준다면 벗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이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군인, 어머니, 아버지, 국회의원, 총리, 대통령 등 다양한 사회적지위와 직업들이 존재한다. 되고 싶어 된 것이든 되고 싶지 않았음에도 된 것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벗고 싶어질 때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벗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우선 어울리지 않고, 그것을 입고 있음으로 인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중학교 교복을 입어가며 설레고 있었을 나를 만난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을 입을 수 있는 것과는 별도로, 입게 되었으면 최선을 다하길. 최소한 그것을 입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또 친구들에게는 부끄럽지 않게 하길,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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