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92 ‪#‎현우의500자‬ _92 손이 하나 없는 친구가 있었다. 왼손 하나 뿐이었다. 혈관기형으로 오른손에 피가 많이 쏠려 잘라 냈다며, 친절히도 샤프심과 볼펜으로 예를 들며 자신의 기형을 설명해주던 친구였다.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이 친구는 오른손에는 항상 붕대를 감고 있었다. 수술 흉터가 남아 있다고는 했지만, 붕대를 꼭 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붕대는 항상 깨끗했다. 언젠가 한 번 물었다. 너는 왜 붕대를 감고 있냐고. 굳이 필요없는 붕대를 왜 하고 있느냐고. 친구가 대답했다. 사람들이 내 없는 손을 보고 언짢아 할까봐. 같은 중학생이었음에도 친구의 배려는 깊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배려심에서 한 일이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 더보기
현우의500자_91 #‎현우의500자‬ _91 적을 추억도 떠오르지 않고 특별한 이벤트도 없이 오늘 하루 평범하게 흘러갔다. 서울 곳곳을 텉털거리는 차를 타고 휘이젓고 다니며 많은 은행을 들렀고 그 사이 잠시 들은 라디오에서 똑같은 사연을 두 번 들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자 '그만 좀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며, 그 이후 아내가 아무말 하지 않아 더 불안하다는 똑!같은 사연을 오후에 한 번, 그리고 저녁에 한 번. 같은 사연을 두 번 듣다 보니, 나도 '그만 좀 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소리 듣는 이 나 밖에 없을 것이기에 쓴 웃음 한 번 지어 버렸다. 오전에 잠시 들른 마포구청에서 내게 도장을 쾅쾅 찍어주던 남자가 뒤로 앉은 채로 물러날 때, 그가 앉은 휠체어 덕에 내 세계는 더욱 넓어졌고 그렇게 넓어졌다. 친구.. 더보기
현우의500자_90 ‪#‎현우의500자‬ _90 생일 축하한다. 언젠가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든 말이 하나 있어. 그건 '메멘토 세로'라는 말이야. 많은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알고 있지.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세로' 타동사 '태어나다'라는 라틴어를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지 않았어. 올챙이였던 우리가 태어나고 싶어 꼬리를 더욱 흔든 게 아니잖아. 단지 던져졌을 뿐이라는 철학자의 말에 동의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태어나자 마자 지금의 우리가 가진 고민이나 결점을 가지기를 바랬던 부모는 아무도 없어. 누구나 축복 받으며 태어났지.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더보기
현우의500자_89 ‪#‎현우의500자‬ _89 시동을 꺼야 한다. 스피커에서 한가득 웃음소리가 들린다. 개그우먼 김신영과 가수 나비의 웃음소리가 차 안의 먼지를 흔드는 듯, 아무런 색깔이 없는 공간에 색깔을 덧씌우는 듯 하다. 주차는 완벽했고, 사이드 브레이크는 올려져 있었으며 P는, 왜 나에게 시동을 끄지 않냐며 내 다음 행동을 재촉한다. 웃음소리다. 시동을 끄지 못하는 것은 웃음소리 때문이며 내가 이것을 끄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될 이 공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들은 즐거움이 지속되길 바란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즐거움 혹은 슬픔이라도,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손목을 잠시 비틀어 시동을 꺼 버리면 즐거움이 사라지고 다시 무(無). 때론 당연하게 생각되는 없음에 나는 공(空)이라 이름 붙.. 더보기
현우의500자_88 ‪#‎현우의500자‬ _88 공익근무요원이었다. 해군에 입대하고 나서야 내 시력이 군대를 갈 수 없을 만큼의 시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합병원에서 병사용 진단서를 떼어 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공익요원 판정을 받고 4주 간의 훈련 이후 내가 배치된 곳은 아동양육시설이었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이나 학대 받던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차량 운행 및 관리, 학습 지도 그리고 식사 준비가 내 업무 중 하나였다. 그날은 마늘 쫑대 볶음이 반찬으로 나가는 날이었다. 마늘 쫑대를 물에 데쳐 그것을 한 번 씻어 내고, 다시 볶아야 하는 음식이다. 마늘 쫑대를 물에 데치고 그것을 옮기려는데 손잡이 부분이 갑자기 헐거워졌다. 뜨거운 물이 내 왼쪽 허벅지 쪽으로 쏟아진다. 데친 마늘 쫑대를 버리지 않으려.. 더보기
현우의500자_87 ‪#‎현우의500자‬ _87 KBS홀이요. 택시를 타면서 기사님께 행선지를 크게 말한다. 기사님이 나를 돌아 보시고는 너 혼자냐 하고 물으신다. 네. 기사님이 KBS는 왜 가냐고 물으신다. 공연하길래 친구랑 같이 보려구요. 친구 기다렸는데 안와서 택시 탔어요. 기사님께서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택시에서 내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다시 앞문을 열어 타라고 하신다. 나는 왜 그러시는지 알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한다. 기사님께서 이야기하신다. 내가 KBS까지 데려다 줄게. 근데 바로는 못가고 다른 손님들도 좀 태워드리면서 갈게. 네. 나는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들떠 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곤히 잠에 빠졌다. 기사님께서 나를 깨우신다. KBS 다왔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보니 웅장한 건물 앞이다... 더보기
현우의500자_86 #‎현우의500자‬ _86 싼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 앞 계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인스부르크에서 출발하여 베네치아까지 침대칸을 타고 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다. 습도 탓인지 바지 안쪽이 쓸리듯 아프다. 침대칸에는 나와 4명의 홍콩인 그리고 피곤했던지 아무 말도 없이 잠이 든 여자가 있었다. 아침에 깨어난 여자는, 내가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아무말 없이 수줍은 미소만을 보일 뿐이다. 그 미소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좁고 복잡한 베네치아는 미로 그 이상이다. 피아짜, 즉 광장에만 있는 우물의 덮개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인 듯 마음을 트이는 상쾌함이 있다. 강 같은 바다 건너, 다시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 앞 계단.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생면부지 백인이다. 혹시 뮌헨 다녀.. 더보기
현우의500자_85 ‪#‎현우의500자‬ _85 흑흑. 당신은 조선인이 아니오.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에게 어찌 이럴 수 있소? 나는 조선인이오. 하지만 지금은 황국의 군인이오. 황국의 군인으로서 일본을 지키겠다 목숨 걸고 나온 이상 나에게 조선은 없소. 흑흑. 내 비록 억지로 끌려와 일본군들에게 조리돌리곤 있지만 당신과 같은 조선인이 나를 이렇게 대한다면, 난 정말 내가 가진 것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심정이 될 것이오. 이러지 마오. 정말, 이러지 마오. 난 오늘 꼭 그대와 잠자리를 해야겠소. 내 비록 부모의 나라를 버린 몸이지만 내게는 아직 조선의 피가 흐르오. 조선의 피를 당신에게 남기겠소. 그러니 제발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흑흑. 당신의 그런 말에 내가 고마워나 할 것 같소? 당신은 결국 일본군과 같은 족속이오. 그러.. 더보기
현우의500자_84 ‪#‎현우의500자‬ _84 5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우리가 탄 기차가 우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부랴 기차에서 내려 원래 가려던 방향의 기차로 옮겨탔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오사카. 기차는 도쿄에서 출발했다. 이미 7시간 이상 기차에, 몸을 순대의 소처럼 꾸역꾸역 넣고 왔는지라 몸은 천근만근이다. '청춘18표'라는 이름의 기차표. 기차 시간만 정확히 맞추면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큰 돈을 들이지 않고 갈아타며 갈 수 있다. 정확히는,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갈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한참을 달리던 기차가 마이바라(米原)역에서 멈춘다. 12시가 가까워 온 시간, 더 이상 오사카행 기차가 없다는 역무원의 말. 결국 역 앞에서 노숙을 하기 위해 맥주를 몇 캔 준비한다. 역 앞에는.. 더보기
현우의500자_83 ‪#‎현우의500자‬ _83 14년 설이다. 온가족이 과일을 먹으며 둘러 앉았다. 어린 조카들의 재롱을 보며, 근황이나 향후 계획 등을 두런두런 나눈다. 습관처럼 켜놓은 티비에 한라장사 결승전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전통가요를 부르는 가수가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티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 티비에서 아는 이름이 들렸다. 박정진 선수 입장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일요일마다 절에서 같이 놀았던 동생이다. 서로의 부모님들도 젊은 시절을 같이 보내셨다. 씨름선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라장사 결승전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모두가 티비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한 판 한 판 시합이 끝날 때마다 정진이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았다. 결과는 패. 한라장사가 된 다른 선수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