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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112 #‎현우의500자‬ _112 중2 음악시간이다. 음악실에는 오후의 햇볕이 갈색 커튼에 흘러 교실은 온통 붉음교향곡이 울려퍼졌다. 성악을 전공하신 선생님께서 고운 목소리로 선창을 하고나면 변성기가 갓 지난 우리들이 여러 소음을 덧씌웠다. 노래를 한참 부르고 있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하지마라! 소리치며 벌떡 일어난다. 노래가 멈췄다. 선생님께서 왜 그러냐 물으니, 누가 계속 자기에게 지우개를 던진단다. 선생님께서 누가 던졌는지 엄한 목소리로 추궁하신다. 아무도 대답이 없다. 이번에는 눈을 감으라 하시곤 조용히 손을 들라 하신다. 분위기는 이미 험악한 수준을 넘었다. 이때 내가 조용히 손을 든다. 내가 지우개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사태를 마무리짓고 싶었다. 여느 드라마처럼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던 선생님께서 나.. 더보기
현우의500자_111 ‪#‎현우의500자‬ _111 심지어 동네 목욕탕 앞. 갑자기 혼자 목욕하기 싫어졌다.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목욕 가자. 어딘데? 우리 동네. 우리집까지 온나. 도곡에 좋은 목욕탕 있다. 거기 가자. 친구집으로 출발했다. 도착해서 친구차에 같이 탔다. 친구가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설정하는데, 도고라 찍는다. 도곡아니었나? 아니. 도고.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차는 출발한다. 아산 방조제 위에서 보이는 서해안의 석양이 아름답다. 한 시간 반이 걸려 도착한 도고면의 한 스파. 냉탕이 없는 진짜 온천이다. 일주일 간의 묵은 때를 밀고 습식 사우나에서 더러운 습관을 몸 밖으로 배출해 냈다. 어제부터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닌다. 목욕하고 나오니 춥다. 근처에 가 채쌈정식을 먹고 나와 커피를 한 잔 한다. 다시.. 더보기
현우의500자_110 ‪#‎현우의500자‬ _110 교실을 몰래 빠져나와 학교 건물을 바라본다. 밝은 웅성거림. 하얀 교실 창문들 사이 불꺼진 창문이 보인다. 우리반 교실이다. 2002년 월드컵, 한국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몇몇의 친구들이 오늘은 야자를 할 수 없는 날이라 한다. 평소에도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태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특별히' 오늘은 더욱 공부를 할 수 없단다. 그러다 다같이 야자를 땡땡이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 땡땡이를 치면, 내일 선생님께서 팔이 아파서라도 다 때리지 못할 것이라는 음침한 근거가 설득력을 얻었다. 저녁 급식은 빼먹지 않고 챙겨먹고 한 시간의 자율학습을 견뎠다. 그리고 선생님들께 들키지 않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집으로 가 티비로 축구경기를 보았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담.. 더보기
현우의500자_109 ‪#‎현우의500자‬ _109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한 번 정리해보고 싶다. 무슨 노릇인지 현우의 500자 전반의 분위기는 침울하다. 마치 새벽 아지랑이가 낀 넓은 호수가에 죽어가는 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물을 옆에 두고 죽어가는 나무는 무엇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반응들을 글로 표현했다. 또 한 번 어떤 계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글이 밝아진다. 아지랑이 흩어지고 벌새 한 마리와 풍뎅이 한 마리가 사투를 벌이는 공간으로, 다시 말해 생의 공간으로 글의 색깔이 변했다. 열어 둔 결론에는 다양한 상상들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왜 이렇게 글을 쓰는가. 나는 내 경험이 나 개인의 기억이나 추억 속에 있기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으면 한다. 공유되고 공감되.. 더보기
현우의500자_108 ‪#‎현우의500자‬ _108 주차장에서 나와 가양대교로 향하기 위해 옆 블럭으로 갔다. 옆블럭을 돌자 마자 흰 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반가웠다. 차를 재빨리 길가에 댔다. 급한 업무처리를 할 것이 있었기에 내릴 여유는 없었다.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가볍게 꾸벅하고는 목청을 열어재낀 채 "라디오 잘 들었습니다!" 하고 크게 외쳤다. 그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가벼운 목례와 함께 "아, 예."라 대답했고 양 옆에 서있던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의 웃음소리도 동시에 들렸다. 다시 차를 몰아 도로로 향했다. 외근을 다 마친 곳은 마포세무서였다. 다시 사무실에 복귀를 하기 위해 차의 시동을 걸었고, 라디오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세티스팩션. 만족이라는 제목의 팝송. 그리고 낮에 나에게 .. 더보기
현우의500자_107 ‪#‎현우의500자‬ _107 권해누 앞으로 나온나. 점심시간이 지나고 5교시가 시작되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문을 벌컥 여시며 나를 부르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선생님 옆으로 가 섰다. 이어 나를 추궁하시는 선생님. 니 점심 시간에 갑순이 얼굴 때렸제? 예? 예. 물론 갑순이는 본명이 아니다. 점심을 먹으러 급식실로 가던 중 갑순이가 나를 보며 메롱을 하기에 얼굴을 때린 것이 기억났다. 다시 선생님. 니는 니 놀리는 사람 얼굴 다 때리나? 아니요. 갑순이 나온나. 사과해라. 미안하다. 선생님께서 이제는 학생들을 향해 돌아서셨다. 지금까지 권해누한테 놀림받은 적 있는 사람 다 나온나. 15명 정도의 친구들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이미 내 얼굴은 맞은 것보다 더 붉어져있었다. 아이들은 나를 보며 일.. 더보기
현우의500자_106 #‎현우의500자‬ _106 초등학교 당시 우리 가족은 보리스포츠라는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했다. 자전거를 포함해 스포츠 관련 용품 거의 전부를 팔았다. 뿐만 아니라 담배와 토큰도 팔았으니, 건강을 해치는 것과 건강을 챙기는 것을 동시에 판 셈이다. 나도 종종 담배나 토큰을 팔기도 했기에 돈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돈을 욕심낸 것은 섣부른 짓이었다. 약 한 달 간 부모님 몰래 돈을 빼내어 군것질을 하며 갖고 싶었던 학용품을 샀고, 친구들에게 과자를 마음껏 사주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늦게까지 문방구 앞에서 뽑기를 하다가 문득 가족 생각이 났다. 이렇게 돈을 마음껏 쓰면서 가족에게는 선물 하나씩 사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문방구에서 선물을 하나씩 샀다. 마침 그날 저녁이었다. 아버지께서.. 더보기
현우의500자_105 ‪#‎현우의500자‬ _105 실례합니다. 길을 물어봐도 될까요? 내 옆을 지나던 젊은 무리에게 다가가 영어로 말을 건다. 다들 당황한 듯 보였지만 한 명의 남학생이 선뜻 내게로 다가온다. 어디를 가고 싶다고 하셨죠? 제가 콜센터에 전화를 해볼게요. 내게 들은 호텔의 이름을 콜센터에 묻지만 해결이 되지 않자 직접 내게 영어로 해보라며 전화기를 건넨다. 버스 번호는 다행히 확인했지만 어디서 타는지 알 수 없다. 내게 전화를 건네었던 남학생이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정류장으로 가는 사이 무리는 하나둘씩 떠났다. 정류장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있다며, 상해 토박이라 한다. 아까 무리 중 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그. 이름은 프.. 더보기
현우의500자_104 #‎현우의500자‬ _104 트럭이 나뒹굴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은 좋은 경험이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납품하러 가는 길이었다. 바닷길로 이어지는 지루한 길이 이어졌고 언덕 하나만이 남았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안도했다. 언덕을 올라가던 도중, 아버지께서 이상한 징후를 느끼신 것을 알아차렸다. 브레이크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백 미러를 통해 보이는 것은, 한 가족이 차에서 내려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판단에 따라 한 가족의 목숨과 아버지, 나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왼쪽은 바다로 이어지는 낭떠러지였고 오른쪽은 높게 솟아 있는 논두렁이었다. 맑은 날을 즐기고 있던 가족의 차는 논두렁 쪽에 주차되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순발력을 발휘해 가족의 차를 지나 논두렁 제방에 배가 실린 트럭의 .. 더보기
현우의500자_103 ‪#‎현우의500자‬ _103 멍하니 앉아 여의도의 빌딩들을 보았다. 마포대교 중간이 아닌 게 어디냐며, 한 편으로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D'에 두어도 가지 않고, 1단을 넣어도 그리고 2단을 넣어도 차는 가지 않았다. 오후에는 목욕을 했고, 미용실에 가서 예쁘게 머리를 했지만 차는 가지 않았다. 오전 오후 잠을 푹 잤지만 차는 가지 않았다. 한참 뒤 다시 시동을 켜서 1단을 놓으니 차가 움직인다. 하지만 1단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마포대교 건너 강변북로와 만나는 지점이 마지막이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고 나와 차를,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집으로 데려다 줄 견인차를 기다리며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다. 강변북로에 멈춰서서 견인차를 기다리고 있어요. 라디오라도 있어 다행이에요. 견인차가 와서 차를 견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