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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8. 22:25 내 생각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애석하게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올라갈 때 시험을 본 마지막 세대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경남 마산지역에서는 2000년을 마지막으로 '연합고사'가 폐지되었고 그 이후에는 중학교 내신성적 만으로 고등학교에 배정받아 들어갔다. 나와 같은 시점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내신과 연합고사 모두가 반영되는, 걸쳐진- 다시 말하면 재수 없는 시절의 친구들이었다.


 

연합고사가 중학교 3학년 말에 있다 보니, 3의 시작은 고3만큼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비장한 느낌이 돌았다.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배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다 배웠다. 그리고 중31년 간은 문제집을 교재로 하여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함께 풀거나 한 달에 한 번 혹은 2주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있는 사설 모의고사를 풀어나가는 압박의 연속이었다.


 

모의고사는 말 그대로 모의고사였다. 학교 성적에 반영되지도 또 고등학교를 들어가는 연합고사에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당시만 해도 체벌이 너무도 당연했으므로 모의고사 '점수 하락'은 곧 '매 타작'을 의미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교육에 대한 철학도 있으시고 합리적인 분이셨지만, 성적에 있어서는 엄격했다. 그래서인지 교실의 밀대 자루는 수시로 교체되었고, 새로운 밀대자루를 사야하는 몫은 그 밀대 자루로 맞다가 부러뜨린(?) 친구의 몫이었다.

 


맞기 싫다는 이유로, 같은 반 친구 몇몇(혹은 많은)은 모의고사를 치르는 중에도 컨닝을 했다. 애초에 모의고사인 만큼 선생님께서는 문제지를 나눠주신 후 크게 감독에 신경을 쓰시지 않읫고, 교실을 나가셨기에 컨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양심 뿐이었다. 하지만 중3의 친구들은 그 양심의 참으로 얕았고 또 동시에 습자지처럼 얇아 언제나 바닥이 보였고 또 쉽게 훼손되었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교실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서로 답을 훔쳐보기에 바빴고, 그러던 사이에서도 답을 너무 많이 맞히게 되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일부러 몇 문제씩은 틀려(?) 가며 시험이 끝난 후 몇 대를 맞을 것인지를 스스로 조율했다.

 


나는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컨닝을 하지는 않았다. 맞기 싫어서 라기 보다 굳이하기 싫었던 것이 가장 컸다. 어차피 모의고사였고, 점수가 떨어져 맞는다면 그것 또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그 당시에는 생각했다. 또 나름 목표한 고등학교가 있었기에, 실전처럼 열심히 해보고자 했던 마음도 있었다. 물론 모의고사는 '너무' 자주 있었지만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모의고사가 끝나면, 우리 교실뿐만 아니라 전체 3학년 교실이 장례식장이 된 듯 했다. 적막한 즈음, 선생님께서 답안지를 들고 들어오셔서 그것을 나눠주셨다. 자기 시험지를 자신이 메기면 틀린 것도 맞다고 할 수 있기에 무작위로 친구의 시험지를 메기도록 했다. 모든 답을 메기고 난 뒤, 자신의 것을 찾아든 아이들의 표정은 한 명도 밝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회초리(라고 적기에는 두꺼웠지만.. 사실은 몽둥이)를 우선 교탁에 올려놓으시고, 자신의 직전 모의고사 점수와 이번 모의고사 점수를 함께 종이에 적어 교탁 위에 올려놓으라 하셨다. 아이들은 자신의 사망선고를 하는 유령 의사처럼 하나씩 그 종이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이후는 상상할 수 있는 그대로다. 몇몇은 울며 맞으며 빌었고, 몇몇은 부들거리면서도 참았고, 극히 소수 몇몇은 고개를 숙인 채 이번에는 맞지 않았음을 안도했다.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모의고사를 치르고 맞기 싫다는 그 욕망으로, 맞는 것을 피하고 싶어 노력했지만 결국은 어떻게든 누구든 몇 대는 맞기 마련이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완벽히 벗어났다고 할 사람도 또 다른 실수를 했다. 그때에도 생각했고, 2016년 지금도 생각하는 것이 있다.


 

잠시의 고통을 잊기 위해 진정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망각하고 현재에만 매몰되어 버리면, 전체가 무너져 버린다.

 


그 무너져 버린 어떤 것이란, 중학생 시절의 우리에겐 고등학교 입시가 될 수도 있고, 연인에게 하는 사소한 거짓말이 불러일으킨 이별일 수도 있고, 크게는 정치인이 자신의 당리당략에 빠져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국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한국은, 중학교 3학년 당시의 어린 친구들보다 못한 듯하다. 누구나 당장의 비난과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정의감은 시궁창에, 연대의식은 쓰레기통에, 공감은 변기에 처박아 둔 듯 하다. 지금 이 시점이든, 아니면 과거든 미래든 그 상태 자체가 결과인 것은 없다. 거의 모든 것은 과정이다. 결과 같은 과정이 있고 과정인 것이 분명하지만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하지만 몇몇 정치인들 혹은 관료들은 지금이 자신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인 양, 과정이 아닌 결과로서의 향유될 어떤 것인양 마음껏 그것을 누리고 있다. 그 근저에는 권력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국민을 무시하는 아주 더러운 태도도 녹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비리나 부정의 그리고 각자도생을 보면서,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특히 그 피하고 싶은 대상이 국민의 비난이나 정권의 획득 실패나 비리 탄로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작금의 이런 망발들이 놓치고 있거나 또는 놓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권력이나 영예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실망이요 국가의 전체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게 만드는 것들이다.

 


선생님의 몽둥이보다 무서운 것은, 국민의 판단이다. 판단일 것이라 믿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의 고통이나 비난을 피하고 싶은 그 치사하고 옹졸한 마음들에 들려주고 싶어 글을 쓴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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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2. 01:30 내 생각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가끔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다. 그건 고3이었을 때 수능을 마친 뒤의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패잔병들의 모임처럼, 수능이라는 전쟁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져 버렸으니 자존심이라도 지켜보려는 친구들은 날카로웠다. 사소한 일에도 큰 시비로 번질 수 있었으니 서로 졸업 때까지 조용히 지내자는 암묵적 합의도 있었던 듯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의 한 친구와 다른 반의 한 친구가 싸운다는 소식이 복도로부터 들렸다. 이 싸움이 있기 몇 달 전 우리 반의 두 친구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불똥이 이상하게 나에게 튀었다. 그 둘의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할 사람이 나 밖에 없었는데(?왜일까?) 내가 말리지 않았다며 꽤나 욕을 들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누군가 싸움을 하면 말리겠노라- 하고 했던 허망한 맹세를, 수능이 끝난 뒤에야 지키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 ! 싸우지 마라. (한껏 짜증난 목소리로)

 

한참 서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사지하고 있던 두 친구의 사이를 슬며시 쑤셔 들어갔다. 그런 뒤 한껏 힘을 주어 둘을 떼어냈다.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때만 해도 힘이 셌던 것인지 둘은 생각보다 쉽게 멀어졌다. 우리 반 친구에게 그만하라며, 교실로 들어가자고 하는 순간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돼지쉐끼(새끼의 사투리, 쉐끼), 니는 뭐꼬?

 

? 나한테 한 이야기일까? 정말?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반 친구는 정확히 내 눈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 난 그냥 싸움 말린거 밖에 없는데? 하고 냉정을 찾았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나 역시도 무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는 느낌으로 갑자기 싸움을 시작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바라!’ 라고 시작한 싸움에 옆반 친구는 참 많이도 맞은 듯 했다. 체급이 달랐다고 솔직히 고백해야겠지만, 어쨌든 나의 싸움은 두 친구를 말리던 것보다 더 격렬하게 말림을 당하며(?) 끝이 났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갔다.

 

가보니! 나와 싸웠던 그 친구가 밀대자루를 손에 쥐고, 나를 죽일거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씩씩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나도 죽을 만큼 소변이 급했으므로, 그 친구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총총거리며 가서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들키지 않은 채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난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한 무리의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아왔다.

 

잠시 배경설명.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이상한 교육을 했는데 대학처럼 학생들이 교실을 옮겨다니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시기가 잠시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교실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어 일종의 휴식공간이 있었다. 배경설명 끝. 나는 그 한 구석 모퉁이에 앉아 당시 유행하던 힐리스를 신은 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를 찾아온 한 무리의 친구들은 나의 위치와 정대각선의 모퉁이에 한껏 어깨와 미간에 힘을 주며 섰다. 굳이 분류하자면 양아치일까. 3이 되어서도 와해되지 않았고, 수능을 치고서도 저러고 있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우정인 듯 보였다. 무리 사이에서 마치 대변인인 양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평소 얼굴과 이름은 알지만 딱히 친하다고 할 친구는 아니었다. 그 역시 양아치였다.

 

니가 내 친구 때렸나?

 

일종의 보복성 방문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 한 걸음 나왔던 친구가 다시 묻는다. 돌았나?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갑자기 잘 안난다. 좀 길게 대답했던 것 같은데,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저 새끼가 내한테 먼저 욕을 했다. 나는 싸움을 말릴려고 한건데, 내한테 시비 걸고 그러면 안되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비논리적인 대답이었는데, 이 대답이 먹혔다. 무리의 친구들이 생각해봐도 싸움 말리는 사람한테 다시 시비거는 건 아니었나 싶었던 듯 하다. 한 걸음 나왔던 친구는 다시 뒤로 들어갔고, 그 무리의 친구들 중 일부는 나에게 앞으로 조심해라, 툭툭 던지며 모두 다시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나와 싸움을 했던 친구는 양아치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나름의 계파는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조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싸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치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도 적고 있냐.

 

나 한 명 조지겠다고, 우루루 몰려온 그 친구들 - 결국 다 고등학교 동창들이긴 하지만 -이 참 미웠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기가 맞았다고 친구들을 불러온 그 친구보다 무슨 일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랑 단지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려 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그 친구들이 난 참 미웠다.

 

그럴 수도 있다.

 

, 그럴 수도 있다. ‘친하다는 것 역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내가 속하지 않은 그룹이나 집단의 친함이 나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러고 있지 않은지 반성을 해보게 되는 측면도 있다. 내가 당할 때는 느끼는 것을, 가해자가 되면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진 이중성인가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감정의 근원이 친함이라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하다.

 

자주 만난다. 이런 상황.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사람과 어울리도록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다. 정치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물급 인물이나 정당에 친밀함을 느껴 거물급 인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을 막무가내로 비난하거나 또는 상대 정당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을 일삼기도 한다. 정치에서 뿐만 아니다. 오히려, 정치를 포함하는 공적 영역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의 친밀함이 주는 폭력이 더욱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는 친구라 할지라도 나는 누군가와 친하다는 것으로 거의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경우도 있고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뒤에 서줄 수 있는 용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옳은 행위인지 옳지 않은 행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을 해야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죄를 물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적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하며 내린 결론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주체적인 판단 즉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런 반인류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지금도 그 울림이 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혹은 철학적이거나 사상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도 생각은 그 충분조건은 모두 채운 듯하다. 이런 생각의 기준에 친함이 포함될 수 있을까?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친함이라는 것이 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내부적인 친함을 외부적인 미움으로 표현할 경우, 친함은 사실 친함이라기보다 추악함이다. 지키려는 것은 고작 자신의 마음 편함정도일지도 모르고 다음에 자신이 같은 경우를 겪게 되었을 때, 다른 이에게 보였던 미움처럼 같이 미워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바라건대

 

친함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면, 그 친함의 외부적 표현도 친함으로 보여주면 어떨까. 아니, 욕심을 버리고 친함의 시작으로 보여주는 건 어떨까 싶다. 친밀함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친밀함이란 결국 우연의 결과이다. 가족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연인이 되는 것도, 이러한 친밀함의 시작은 결국 우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지금 부모의 아들딸이 되고 싶어 된 사람은 없고, 친구라 할지라도 연인이라 할지라도 우연한 만남에 의해서 시작했다. 그럴 것이면, 지금은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우연한 기회나 친밀함의 시작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국제 사회나 나아가 향후 형성될지 모르는 우주 사회나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마음 많이 연 사람이 상처받는다.

 

슬픈 문장이다. 위의 문장을 다르게 표현하면, 더욱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 받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결국은 누가 더 친해지고 싶어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친밀함을 표현한다면, ‘? 나랑 안친하잖아?’ 라거나 왜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라는 반응이 아니라, ‘저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겠구나.’ 라거나 나도 마음을 열어볼까?’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더욱 넓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친함은 결국 폭력이 발생하는 요소였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많은 전쟁과 갈등의 근간에는 친밀함이 있었다. 더욱 친한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갈등, 자신과 같은 국적을 갖고 있거나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부터 느끼는 친밀함으로부터 발생한 전쟁 혹은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를 반으로 나누어 싸웠던 냉전까지. 이런 글을 통해서 서로 친해집시다!’ 하고 연설적으로 외치는 것이 결국 일상 혹은 세계사에 어떤 큰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친밀함에 친밀함을 연습하고 포용해나간다면, 더욱 나은 우리가 될지 모르겠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 친밀함의 범위 밖의 한 학생이 느낀 소외감 혹은 폭력의 경험으로만 끝내기는 아쉬워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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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0. 15:31 카테고리 없음

수능 3번 친 사람이 지금의 고3에게-2. 2013.11.10. 


두 번째 이야기는, 영화를 실컷 보아라. 


'굶주려 있던 독서를 해보아라'를 주제로 삼을까도 고민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을 권유하기에는, 습관의 문제와 시간 소모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점들이 스스로에게로부터 발견되어 차마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막 수능을 친 시점에서, 또 어떠한 '글자에의 강요'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영화를 많이 보라는 방향으로 선회할 수 밖에ㅠㅠ. 


영화는 생각보다 많은 종류가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로맨스 영화나 전쟁 영화, 그리고 사회적 이슈를 다뤄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등 많은 종류가 있다. 다양한 종류가 있는 만큼 우리가 무엇을 찾아서 보아야 하는지에도 고민이 생기기도 한다. 


영화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책을 통해서는 상상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영화는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 그 정보를 제공한다. 오히려 책보다 영화가 더욱 사실적이고 또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책은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로 이뤄져 있듯이 영화는, 감독이 담고 싶은 앵글에 그 생각이 담겨 있다. 예를 들면, '라쇼몽'이라는 일본 영화의 경우, 한 가지 사건을 가지고 각 인물들이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 견해가 가능한지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판단은 관객이나 시청자의 책임이라는 것을 감독은, 너무나 태연히도 맡겨버린다. 


가능하다면 좋은 영화 리스트 따위를 첨부하고 싶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좋은 영화는 없다. 개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너무나 다양해 그것을 일반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개인의 취향을 일괄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권력의 의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리스트는 적지 않겠지만,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 몇 가지는 꼭 제시해보고 싶다. 


첫 번째 방법, 자신이 이전에 보았던 영화들 중 마음에 들었던 영화의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보도록 해라.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면, 가까운 대학 도서관이나 공립도서관에 가면 그 영화들의 영상자료들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몇 명의 영화 감독들의 영화를 모두 다 보게 되면 그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감독의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되면 주제 의식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이는 자신의 생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거나, 자신이 하는 이야기들 중에서 몇몇의 인용구를 제시하는 효과도 있다. 감독을 선택해서 영화를 보다보면, 그 감독이 언론 인터뷰나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자신이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서 영향을 준 다른 감독을 소개하는 것을 읽게 될 것이다. 그때 다른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면 또 다른 영향을 주었던 감독으로의 이해가 넓어진다. 이쯤 되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단순한 차원의 관심을 넘어 '흐름'을 읽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만약 자신이 처음 선택한 감독이 다른 감독을 추천하지 않거나 언론 인터뷰를 꺼리는 감독이라면, 그 감독이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 그 감독과 경쟁자라고 불렸던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라. 보통 3명이나 5명 정도의 감독을 묶어 '시대의 감독'이라거나 '영화계의 트로이카' 등등 의 이름들을 붙여 그 감독들의 자존심을 건드는 기사들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기사를 통해서 다른 감독들의 이름을 얻고, 그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보게 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방법,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한 명 선정해라. 감독 선택과 유사한 이 방법은, 자신이 선호하는 배우를 한 명 두고, 이 배우가 나온 영화는 모두 보겠다라는 염원을 세워 그 영화들을 모두 보는 것이다. 영화 감독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영화 감독도 자신이 쓰지 않은 시나리오를 감독할 경우가 있을 때, 왜 감독은 이 영화를 선택했을까의 궁금증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배우 역시도 자신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시나리오 중에서 영화를 선택해 그 영화를 찍은 것은, 그 영화 배우의 생각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배우라는 직업이, 단지 전문 연기자 정도의 지위를 가지거나 정치적 이슈나 사회적 이슈에 발언을 하는 것을 마치 '월권 행위'나 '딴따라의 잘난 척' 정도로 비춰지긴 하지만, 외국의 상당수 배우들은 자신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또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당당히 밝힌다. 이런 배우들은 자신이 출연할 영화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나름의 생각과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아마도 감독들도 어떤 배우에게 그 시나리오를 보내면서, 단지 개런티의 수준에 맞추거나 연기력이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연기의 디테일을 살릴 수 있는 영화 배우의 생각에 시나리오를 송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종의 공범 확보랄까.  영화 배우를 선택해서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죽 다 보고 나면, 영화 배우의 데뷔 초기시절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관망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고, 그 배우의 최고의 작품은 무엇이나 정도을 읊을 수 있는 안목이 생기면, 그와 함께 출연하는 또 다른 배우에게 관심을 갖게 될테니, 영화 감독보다는 영화 배우를 선택하는 것이 영화를 질리지 않고 보는 더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 도 있겠다. 


세 번째, 세계적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 중 개막작을 골라서 보라. 세계적 영화제에 출품을 할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 그런 영화들 사이에서도 개막작으로 선택되는 영광을 얻는 영화들은 극소수이다. 매해 그 영화제의 얼굴이라고 볼 수 있는 개막작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는 영화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다. 박수를 칠 수 있는 영화라기 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했거나 사람들의 본성을 일깨우는 영화들이 꽤나 많이 선택되는 개막작은, 그 만큼 그 시대와 사회가 어떤 것들을 주도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영화들이다. 거의 매년 세계 각지에서 영화제는 진행되고 있지만, 각 영화제 마다 드러내는 상징성이 다르고 영화제가 요구하는 영화들의 메세지도 다른 만큼 개막작을 챙겨보는 것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높일 수 있다. 영화제 개막작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제 수상 작품 중 최고작품상(감독상)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개막작은 그 영화제의 얼굴이라고 본다면 최고 작품상(감독상)은 심장이라고 볼 수 있다. 최고작품상은 그 영화제에 참석한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의미에서 심장이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영화를 몸이라고 본다면 최고작품상은 그들에게 새로운 피를 솓구치게 한다는 의미에서도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영화제들은 유명세를 띤 감독들에게만 최고작품상을 주기도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근거 없이 최고작품상을 시상하는 영화제는 없고, 그 수상한 감독들은 그것을 칭찬이라기보다 오히려 더욱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채찍질로 받아들이곤 하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고전 영화들을 찾아 보라. 책에 '고전'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사람들은 농담삼아 이렇게 평가한다. "누구나 제목은 들어봤지만, 누구도 읽어보지 않은 책". 이런 평가는 영화에서는 좀 덜한 편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전 영화를 몇 몇 장면만을 보고 난 뒤, 그 영화의 모든 것을 본 양 행동하기도 한다. 영화는 짧게는 40분, 길게는 3시간까지 꽤 긴 시간을 영상과 음악, 연기 등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재미, 감동, 의미를 선사한다.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몇몇 장면이 마치 전체를 대변하는 양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 영화를 꼭 한 번 찾아서, 영화 전체를 다 보기 바란다. 지금의 영화 기법과는 다소 다른 기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화질이나 조명, 음향 등이 지금의 영화와 비교했을 때 기술적으로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클래식'하다고 생각해 버리고 그 영화의 의미를 잘 파악하면서 보길 바란다. 잘 찾아보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영화도 있고, 지금 이 시대의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연출력과 앵글을 갖춘 영화들도 있다. 고전 영화들이 가지는 의미는, 새로운 영화가 주는 '신선함'보다는 오랜 친구가 주는 '푸근함'이나 위인들이 주는 '따끔함'과 같은 것들이 그 속에 숨어 있다. 그리고 고전 영화 중 흑백 영화들이 주는, 또 다른 상상력의 공간을 스스로 채워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하겠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그냥 보라. 아무런 기준도 없이 영화관에 찾아가거나 DVD방에 찾아가거나, 정식 다운로드 사이트에 들어가서 아무런 영화나 한 번 보길 바란다. 그 기준이 재미일 수도 있고 감동일 수도 있고, 깨달음일 수도 있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우연히 본 영화가 정말 재밌을 수도 있다. 정말 슬플 수도 있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만 우연히 선택한 그 영화가 여러분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모든 것에 기준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은 말이다. 사람은 합리적이라고 하지만, 여러 심리학자들이 밝혀놓은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감정적이어서 합리성을 찾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라는 연구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런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기준이나 선호를 가진다는 것은, 기껏 위에 길게 적어 놓았지만, 사실 말이 잘 안된다. 아무 영화나 선택해서 그 영화가 마음에 들면, 여러분에게는 최선의 영화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영화를 보면 된다. 그런 관점에서 아무 영화를 보는 것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수능을 막 마친 고3 수험생들에게 '글자'에 대한 압박을 주기 싫어 책을 추천하지 못하겠다고 적어놓고선, 이렇게 또 길게 글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직접 일일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글이라는 매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두 번째 이야기, 영화를 실컷 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수능을 마친 시점에서 많은 학생들이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을 생각보다 가치 없게 보내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적었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는 어떤 이에게는 시간 낭비일 수도 있고, 단지 또 다른 방법의 회피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수많은 영화감독이나 작가들이 이야기하듯이 원없이 영화를 보았던 시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를 떠올려본다면, 수능시험을 막 마친 지금의 고3학생들은 다시 못올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 방학동안 영화를 실컷 보아야지, 휴학을 하고 영화를 실컷 보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의 부모님은 아마 입영일자를 조정하고 있거나, 딸이라면 뜬금없이 '시집'이라는 말을 꺼내시게 될 것이다. 다시는 못올 4개월의 긴 시간동안 영화를 열심히 즐기면서, 대충대충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세 번째 이야기는, 책을 읽어라. 


역시 세 번째 이야기는, 다시 더 정리해서 올리겠다~ㅎㅎ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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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9. 12:58 카테고리 없음

수능 3번 친 사람이 지금의 고3에게. 2013.11.9.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그런 욕심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재수는 일반적이었다고는 하나, 심지어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중에도 수능을 치고, 소집 해제 이후에도 수능을 친 욕심은 보통 욕심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3번의 시험을 통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하고 싶던 공부를 실컷한 본인에게는 그 시간들이 아깝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수능을 처음 친 지금의 고등학교 3학년들에게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또 글을 적는다. 


첫 번째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재수해라. 


농담이다. 


재수는 필수였던 시기가 있었다. 수시전형의 확대로 인해 학교는 마치 수시생들의 임시 거처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고 평준화되어 버린 학교는, 말 그대로 고등학교 졸업자를 만들어 내는 시기가 있었다. 또한 교육 정책은 잦은 변경으로 인해 수험생들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심지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는 채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어느덧 졸업"이라는 다섯 글자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시기도 있었다. 이럴 때는 재수는 마치 필수인 양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교육의 굴레로 들어갔다. 


재수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필요하지도 않은 재수를 하도록 종용하는 것도 아니다. 재수가 필요한 학생들은,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재수생이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 같은 학생이 아니라, 고등학교 3년의 성실함이 뒷받침된 학생이 재수를 하여야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명확한 사람이라도 재수 기간은 꽤나 길고 험난하다. 공부를 하는 것 자체도 힘들겠지만, 주변 친구들의 대학생활을 보면서 자신은 즐기고 있지 못하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하루하루를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수하라는 것은, 농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길게 적은 이유는 1년의 공부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판단하고 난 뒤에도, 재수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으므로 자신의 마음 가짐을 우선적으로 점검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었다. 


다시, 진심으로 이야기 해주고 싶은 부분으로 돌아가야겠다. 


첫 번째, 제2 외국어를 배우도록 해라. 흔히들 제2외국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고등학교 당시 인문계 학생들이 반을 나누는 데만 필요하지 막상 제2외국어 수업에는 딴짓을 하는 정도의 과목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제1외국어인 영어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2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물론 그런 의심은 들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대학을 들어가든 대학 졸업 이후 취업을 하기 위해서든 반드시 다시 배우기 마련이다. 4년제 종합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교양영어라는 수업을 반드시 들어야만 졸업이 가능하고, 일부 학교에서는 졸업 사정의 기준을 공인영어성적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를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영어는 '시키는 대로, 필요한 만큼'만 해도 충분한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2외국어는,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일어일문학과나 중어중문학과 등 외국어 관련 전공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인문학부나 공학부의 학생들은 제2외국어를 배울 시간을 따로 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수업 시간은 적게 듣지만 대학생활은 수업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팀플 활동, 과외 활동 그리고 봉사 활동, 학회 활동 등 다양한 활동들이 복합되어 있으므로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지금 수능을 딱 치고 난 이 시점에 제2외국어를 한 번 시작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지금이 11월이니 내년 2월 말까지 학원을 등록하거나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고 하면 4개월의 시간이 난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의 언어 들 중 자신이 가장 관심이 가는 언어 하나를 선택해서 '기초만 잡겠다' 라는 심정으로 한 번 들어보길 바란다. 기초가 잡히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난 뒤에는 혼자 공부해도 실력을 쌓을 수 있다. 


제2외국어를 배우라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스펙'이 된다거나 취업에 도움이 될런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고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취업은 아직 한참 멀리 있는 이야기이므로 현실성이 없다.


본인이 생각하는 제2외국어를 배워야하는 이유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만 사용해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거나 일상회화 뿐만 아니라 토론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면 그 나라 자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한 나라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단지 한반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벗어나게 해주고 그런 노력들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재밌기 때문인데, 세계에 대한 이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해진 듯 해서 반성하고 있다. 


제2외국어는 재밌다. 영어는 우리가 배우고 싶어서 배운 언어가 아니다. 학교에서 억지로 가르쳤기 때문에 배운 것이 사실이고, 수능에 정식 과목으로 있는 만큼 영어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결코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은 영어든, 제2외국어든 언어는 재밌는 것이다. 어떤 언어이든 그 언어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한 나라의 국어로 지정되기 까지는 많은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는 그 나라의 문화 또한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접해보지 못했던 다른 나라의 문화를 그 나라의 말로 배우는데 재미는 당연히 수반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를 즐기면서 공부하고 또 자신이 선택한 제2외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난 뒤 영국인이나 미국인, 혹은 중국인, 일본인, 독일인, 프랑스인 등 제2외국어를 구사하는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 통역없이 직접 이야기를 해보면,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면 무엇이 즐거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지금부터 대학 입학 이전까지 제2외국어를 한번 배워보자. 잘나간다는 중국어나, 굳이 필요없을 듯한 일본어 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예전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도 그냥 배워보고 싶었던 언어가 있으면 지금이 기회이니 꼭 한번 '시작이라도' 해보길 바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영화를 실컷 보아라. 


두 번째 이야기는, 좀 더 정리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다~ㅎㅎㅎ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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