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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6.05.17 옷을 파는 노파
  2. 2016.04.01 내 걱정
  3. 2015.04.12 나에게 바란다_4
  4. 2014.12.15 자기 혁명의 시대
  5. 2014.10.24 자기 고백일지도.
  6. 2013.11.08 개나 소나 강연한다고 하니.
2016. 5. 17. 02:17 내 생각


"옷을 파는 노파"


이대역과 신촌역 사이, 나무에 옷을 걸어놓고 옷을 파는 한 노파가 있다. 옷걸이에 걸린 옷을 연신 나풀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지나가는 여대생들이나 여자들에게 옷을 권유한다. 자주 마주쳐보았지만, 남자 옷은 팔지 않는다. 옷의 질은 낡았다. 보세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헌 옷 상자에 들어있을 법한 그런 옷들이다. 하지만 그런 옷들을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들이댈 때는 사뭇 진지하다. 저런 옷이 팔릴까 정말 궁금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 옷을 사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다 얼마 후, 집으로 가는 길에 그 노파가 보이지 않았다. 활기찬 모습으로 옷을 날개삼아 펄럭이고 있어야 할 곳에 아무도 없자 순간, 걱정이 스쳤다.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닐까. 환절기라 날씨가 아침저녁으로는 추웠고, 또 그 노파는 얇은 반팔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새로 옷을 도매상에서 혹은 헌 옷 상자에서 사오거나 꺼내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그 어떤 것도 답은 아닐지 모른다. 그저, 하루가 고단해 그날은 쉬고 싶었을지도.


나는 아마 다시 그 길을 지나겠지만, 그 노파가 파는 옷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옷을 팔고 있는 그 모습을 반가워는 하겠지만, 내가 입지도 않을 옷을 사 그 노파에게 동정심이 들었다는 것을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정심이 든 마음이란, 그 노파가 가진 가난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옷을 사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데에 대한 동정이지, 다른 동정은 가진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노파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또 그것을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 삼는데 있어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함을 배웠다.


무엇보다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꾸준하게 있는 그 모습이 멋져보이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간혹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나, 편견에 대해서 쉽게 판정짓고 편한대로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는 답은 없다. 성공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꿈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이나 금전적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열정이 없다느니 젊은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느니 하는 말도 필요 없다. 꿈을 가지지 않아 되는대로 산다는 사람에게도 비난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사는 방식이 다른 것 뿐이고 주어진 삶에 대한 태도가 다를 뿐이다.


이대-신촌 거리의 한 노파는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살 것이다. 옷이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그러지는 않을 듯 하고, 노파가 그것을 깨달으면 자신이 스스로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되지 않을까.


노파도,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언젠가 깨달을 수도 있는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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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 17:00 내 생각
"내 걱정"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는 저 문장은 읽는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닮아있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것은, 어떤 불행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읽어보면 설핏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요즘과 같이 행복한 가정이나 불행한 가정 모두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또는 불행한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여러 도구들이 있는 시대에는 말이다.

행복한 가정의 닮은 모습이란 아래와 같지 않을까.

자녀와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자하기까지 한 부모. 각자의 공간이 있는 충분한 넓이의 집. 여름과 겨울에 떠나는 휴가. 건강하고 자신의 삶을 관조할 줄 아는 할아버지, 할머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꿈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자녀 혹은 꿈을 찾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활기차게 하고 있는 자녀. 끊어지지 않는 가족 간의 웃음과 대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기란 참으로 쉽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의 마음 속에 어떤 이상처럼 그 모습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이란, 결코.

상상하기 조차 싫다.

하지만 그 상상 속의 어떤 일이나 사건들은 각자의 의지와 다르게 일어난다. 또 누군가는 지금도 그 불행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모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살고 있다.

행복한 가정에서도 불행한 사건들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각 가정에는 다르게 나타난다.

아마도.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의 차이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이나 경제력의 상실, 삶에의 의지 박약 등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함에도 그것을 가족이 같이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닐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이 아닌 한 개인이라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접하고 해결함에 있어 그것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감히 '행복'한 상황이라 불러도 될 듯 하다.

고등학교 시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이 있었다.

"너희는 그냥 너희 앞날을 위해서 공부만 하면 되는데, 왜 공부를 하지 않니?"

선생님들의 이런 말들을 듣다보면, 한편으로 참 다행이다 싶고 또 한 편으로는 어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다행이다' 싶은 것은, 나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선생님이 어릴 적 자기 걱정만 할 수 있었던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위 말하는' 안정감 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에 다행이라 느꼈다. 또 한 편 느끼는 것, 어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질문이 드는 이유는, 나보다 최소 10년 이상을 더 산 사람들이 그 사이에 타인의 -그것이 비록 학생일지라도- 고민이나 고통에 대해서 저다지도 공감을 할 수 없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어른이면 누구나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통해 이해심이 넓을 것이라 여겼던 내가 '어렸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네 걱정만 해라.'

라는 말에는, 결국 부모의 배려와 학교를 포함한 사회의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고민하고 걱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릴 적에는 부모의 배려가 필요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사회가 갖추고 있는 제도나 시스템이 필요하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뉴스 한 꼭지나 신문 한 장만 들추어보아도 불운한 사건을 당한 사람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말문이 막힌다.

부모의 배려가 무엇인지, 사회의 제도나 시스템이 어떤 구조인지는 모르겠다.

부모가 된 사람도-부모가 될 사람도- 제대로 알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각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가치가 부딪히는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을 위한 어떤 제도가 필요한지가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결국 '배 부르고 등 따뜻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조건만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내 걱정만 하고 싶다. 길게 적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내 걱정만 하고 싶다. 내 행복을 위한 걱정과 고민과 탐색과 시도를 하고 싶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 역시도 행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내가 되고 싶다.

그런 사회를 바란다는 것 만으로도, 톨스토이의 저 위대한 한 문장.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장에 대해 "톨스토이 할아버지, 틀렸습니다. 훗!" 하고 콧방귀를 뀌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내 걱정만 하고 싶다. 나만 내 걱정을 하는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걱정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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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2. 01:31 내 생각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청춘이라는 시기가 그 고유의 색을 잃어갈수록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들의 수는 반대로 늘어납니다. 지금도 그 여풍이 남아 있는 '힐링'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힐링의 태풍이 지나간 뒤,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과 걱정을 모두 해결하였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지나간 뒤 더욱 많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고민이 무엇인지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받았지만 해결되는 것이 없는 시기를 지나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 다시 질문이 돌아오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힐링'은 나름 사회적 의미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스스로를 '청춘'이라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민 중 가장 큰 고민은 '꿈이 없다'일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이기도 하고 '내 삶을 바칠 무엇인가를 찾지 못했다' 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꿈이 없다'라는 표현. 이 표현 역시 힐링의 시대가 남긴 우리들의 진정한 고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청춘들은 왜 꿈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용기가 없어서'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시간과 경험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시간으로서의 용기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꿈은 결코 대형 마트에 쌓여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즉, 꿈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꿈을 찾는 과정에서 더 좋은 꿈을 갖게 되기도 하고 처음 가졌던 꿈에 대한 허상을 깨치기도 합니다.

시간으로서의 용기란, 자신이 가진 희소한 재산인 시간을 들여서라도 자신의 꿈을 찾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자신을 꿈을 찾은 사람은 1년이라는 시간 만큼의 용기를 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몇 년 동안 꿈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찾지 못했다는 푸념을 듣습니다.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 몇 년 간의 시간 동안 진정 꿈만을 찾았나요? 학교 다니랴, 연애 하랴, 타인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조건들을 쌓으랴,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보내지는 않았나요?

진정 자신의 꿈을 찾는데 사용한 시간이란, 과거에 해보고 싶었지만 할 시간이 없었던 것에 온전히 그 시간을 쏟는 시간입니다.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그것을 해 보아야겠다, 그래야 내가 진짜 이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있겠다, 생각한 그 시간이 꿈을 찾는데 필요한 시간의 용기입니다. 이런 시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경험으로서의 용기입니다. 이것은 '내 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꼭 이것은 해보아야겠다' 생각하는 용기입니다. 대학에 가지 않고 전국을 여행하며 글을 쓰는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이 청년은 대학에 가 얻을 수 있는 경험보다 전국을 누비며 얻는 경험이 자신에게 더 큰 성취감과 빠르게 꿈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가벼운 용기로는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지요.

만약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한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이 청년은 음대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경영학과에 갔고, 졸업을 한 뒤 좋은 기업에 취업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남이 바라는대로만 살아가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물론 이 청년이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고 해서 음악가가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그 경험에 빠져들 용기 자체가 없었습니다. 실패한 이후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죠.

결국 꿈은 시간과 경험이 주는 실패 사이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꽃과 같습니다. 한정된 시간과 그 시간 동안 겪을 수 있는 경험들이, 한 명의 꿈을 찾는데 비료가 되느냐 혹은 썩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오물이 되느냐는, 용기를 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서 드러납니다.

무조건 용기를 내고, 시간을 투자하고 경험을 쌓는다고 해서 그것이 꿈을 찾고 이루는 방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을 온전히 인식한 사람은 단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을 것이고, 꿈을 위한 시간과 휴식을 위한 시간을 정확히 구분할 것입니다. 경험에 있어서도 나쁜 경험과 좋은 경험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깊은 통찰을 갖도록 노력하기도 할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경험인 책이나 사람 간의 만남을 통해 통찰은 쌓이겠죠.

저는 당신의 꿈을 응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실패할 두려움을 안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시간을 들여, 자신의 생각과 몸을 들여 맞부딪힐 용기를 가지기를 응원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꿈이 없다는 볼멘 소리를 내는 청춘들에게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용기는 이식되는 것도 아니며, 가지겠다 생각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누구나 그 안에 잠재되어 있을 뿐 그것을 있다고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않고 무시하며 사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시간을 들이고, 경험을 쌓은 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 실패는 시간의 손실과 뼈아픈 상처를 남기겠지만, 그것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자신이 행했던 노력들에 후회가 없다면 다시 새살은 돋아 날 것이고 그 살은 다른 어떤 부위보다 강한 곳이 될 것입니다.

또 꿈을 찾았다고 해서,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꿈을 찾지 못한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측은히 여기지도 말고 낮잡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꿈은 언제나 과정입니다. 이루는 순간 끝나는 꿈이란 죽음 뿐입니다.

자신의 꿈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꿈과 그 과정 역시 존중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2시간의 노력을 들여 꿈을 찾았고, 다른 사람은 1시간의 노력을 들였다고 해서 나의 꿈이 다른 사람의 꿈보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직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을 갖기 위한 용기를 갖기를, 꿈을 찾고 이루기 위하여 내 시간을 온전히 바칠 용기를 갖기를, 경험함에 있어 통찰을 갖도록 많은 직간접 경험을 해보기를, 나의 꿈과 타인의 꿈을 비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꿈의 계층을 나누지 않기를,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나에게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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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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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5. 07:04 내 생각

자기 혁명의 시대 2014.12.14. 


'자기 혁명'의 시대다.

언젠가 친구들과 혁명이 닥친다면 지금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강력히 반대했다. 혁명은 전쟁과 같다. 어떠한 대의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 대중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피폐해진다. 전쟁의 목적이 영토의 확장이라 할지라도 새롭게 얻게 되는 땅은 다수 가난한 이들의 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목적이 영토의 보전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기존의 체제에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혁명이란 그렇기 때문에 전쟁과 같다.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국가 체제 내에서 혁명가들은 자신의 입지와 의지를 관철시키겠지만 혁명의 주체가 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은 또 하나의 지배계급을 형성시킬 뿐이다. 지금의 중국을 만들었던 모택동과 그 휘하 혁명계급이 그랬을 뿐만 아니라, 체 게바라의 혁명을 받들어 이루어졌던 수많은 남미의 혁명들이 그랬다. 심지어 남미의 혁명들은 실패에 실패로 점철되어 그들의 기초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첫 문장에서 적었듯이 지금은 '자기 혁명'의 시대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함과 동시에 다시 자신을 세워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혁명의 목적을 '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젊음'이라는 시기로 나누기도 하고, '청춘'이라는 프로파간다를 암시하기도 한다. 자기계발서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더욱 더 혁명적일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만, 그 범위는 결코 자기의 몸과 정신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혁명을 부러워하며 시기하도록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체질과 습관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혁명을 보며 자신의 혁명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를, 그래서 장렬히 죽어가기를 종용하고 있다. 체 게바라를 꿈꿨던 수많은 남미의 혁명가들의 머리가 전시된 곳은 혁명기념관이 아니라 단두대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 혁명에 실패한 수많은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진정한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이미 내적 혁명에 실패한 경험이 진한 잔영으로 남아 있다.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권력에 순응하고 인간 고유의 본능인 '의지'를 버리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혁명과 복종은 그렇듯 자기로부터 연유하여 자기에게로 결론 맺어진다.

자기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시대의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같다. 시대의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 혁명이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자기 혁명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시대의 혁명은 자기 혁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외부적 요인에 불과하다. 시대의 혁명이 성공한다면 다시 일어나야 하는 수많은 자기 혁명은 자기 학대로 갈 가능성이 높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개인화되고, 미시적인 수준에서 밖에 머무르지 않는 사회에서 '혁명'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단지 '이상주의자'라 적힌 종이를 던지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지 모르겠다. 그 종이를 뭉쳐 던지는 것이든, 투표를 한 뒤 접어 던지는 것이든 그것은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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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4. 02:48 카테고리 없음

자기 고백일지도.  2014.10.24. 


사실 난 '꿈'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막연하게만 느껴졌고 누군가 억지로 심어주어 가지게 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라는 것이 그다지 아름답거나 찬란한 '꿈'처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직업적' 꿈은 정해놓아 누군가 나에게 '넌 꿈이 뭐니?'라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꿈을 이야기하곤 했기에 나에게 '꿈'은 가지지 못한 사람이 칭얼대는 어리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년 동안 내가 1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외쳐오던 외교관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외무고시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면, 큰 바다로 나가 범고래를 잡고자 출항했던 배가 큰 바다에 도달했을 때 들려온 소식이 '범고래는 사라졌다' 는 식의 상황처럼 말이다. 이미 바다에 나와 있었고 바다에 나오기 위해 소비해야했던 시간, 노력과 비용은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돌고래라도 잡아가자 생각하여 차선책이었던 대학원 입학을 하였지만 결국 대학원이라는 곳도 휴학을 했다. 내가 원했던 범고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지출한 매몰 비용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향후 돌고래를 잡기 위한 비용을 대는데에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꿈'이라는 단어가 우스울 때는 전혀 몰랐다. '그것도 없이 어떻게 살아?'라는 쭈볏거리는 반응을 대놓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꿈이 있다'라는 것이 내 자신감의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그러다가 꿈을 이루는 것이 좌절되고 난 뒤 그것의 소중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크기와 종류에 관계 없이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 사회적 지위나 지금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꿈을 '변경할 수'는 있을 지언정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 그리고 꿈을 가지기에 앞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점, 그 조사에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주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 또 꿈을 이루는데에도 비용이 든다는 점, 꿈을 포기 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꿈'을 꾸어야 한다는 점. 다시 말하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래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다른 꿈들을 폐기해 버리면 안된다. 꿈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선택한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른 꿈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꿈으로 넘어가는데 있어 공백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첫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다. 두 번째 꿈, 세 번째 꿈.. 이렇게 순서가 내려올 때마다 가끔은 '포기'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상황이 올 것이고, 이것을 흔히들 '실패'라고 부르지만 이때에는 좀 다르다. 단 하나의 꿈만이 있었던 사람에게 포기나 실패는 그 사람의 삶을 종결지을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일일 수 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있는 사람에게는 포기든 실패든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실패가 경험이 된다'는 말은 다음 꿈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위의 이야기는 내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대학원 휴학 이후 취업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여러 기업이나 공단 등에 원서를 썼지만 합격자 발표를 보지 않았다. 합격을 했을리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직장인'이라는 직업은 내가 아직 선택하기에는 낮은 순위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난 두 번째 꿈에도 진심을 다해 도전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몇 번째인지도 모를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고 여러 준비를 한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바라보건대 지금의 내 상황은 '공백기'이지만 이 공백기가 길어지고 있다. 큰 의미가 없는 일들을 하루 하루 해나가면서 마치 그것들이 나를 지탱하는 것들인양 생각하고 있었고, 주변의 친구들을 만나 '내가 공백기다'라는 것을 자기 비하와 자기 확신이 반반 섞은 채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자기 비하는 첫 번째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의 비하였고, 자기 확신은 두 번째 꿈에서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지금 내가 해야할 것은 자기 비하도, 자기 확신도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꿈에 대한 실현 노력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


나쁘게도 '공백기'가 익숙해졌다. 두 번째 꿈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단지 공백기를 하루하루 '즐겁지 않게 즐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스스로 분석하기에는 '내적 내전의 패전' 즉,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나만의 전쟁에서 졌다고 분석하지만 빨리 다시 전후 복구를 해야할 것임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두 번째 꿈이 자신에게 열정을 불어 달라며 손을 내밀지만 애써 외면하며 가만히 자리에 앉아 소꿉놀이나 하고 있거나 아니면 첫 번째 꿈을 아쉬워하며 회상만 하고 있다. 그리고 첫 번째 꿈의 실패 탓인지 두 번째 꿈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 긴 가래떡을 뽑아내는 기계에서 가래떡을 자르듯이 첫번째 꿈과 두 번째 꿈이 '딱'하고 끊어지면 좋을텐데 구질구질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직도 첫 번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았을까. 아니면 두 번째 꿈, 세 번째 꿈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큰 것일까.


직장인 친구들이 보면 부러워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새벽까지, 먹고 쉬고 쉬고 먹고 책보다가 영화보다가 글 쓰다가 쉬고 먹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단 1초도 편하지 않다. 내가 편하지 않은 이유는 '나이가 서른이니 이제 돈을 벌 때가 되지 않았니', '친구들은 적금 들고 결혼하고 집사고 하는데 넌 뭐하니', '대학원까지 입학해놓고 지금 놀고 있으면 어쩌자는거니', '일단 현실을 바라보고 취업을 해서 돈을 좀 모아야 하지 않겠니' 등의 이야기에 의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만 하고 선택할 두 번째 꿈이 내게서 더욱 멀어지고 있는 듯 하여, 내가 다시는 꿈을 선택하지 못할 듯 하여, 꿈을 선택하지도 못할 만큼 패배자가 되어 이번 삶을 '이리저리' 살다가 끝낼지도 모를 듯 하여 불편한 것이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참,

'공백기'의 나는 참 나약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내 성격 중 정말 나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이렇게 나약하면서도 아무런 근거 없도, 그 어떤 통계적 조사도 없고,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기대나 응원이나 비난이나 힐난이나 그 무엇이 나에게 가해지더라도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그 앞에 붙어야 할 세 글자, '무엇을'. 이것을 찾아야 한다. 아니, 채워야 한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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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8. 06:39 카테고리 없음

개나 소나 강연한다고 하니. 2013.11.8. 


제목이 좀 강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제목을 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개보다는 소에 가까우니, 나 스스로에게 하는 평가라고도 할 수 있다. 


강연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학이나 교육과정에서 듣는 '강의'와는 좀 다르다. 강의는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일정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체계적 수업을 뜻한다면, 강연은 하루나 이틀 정도, 아니면 몇 시간 정도의 시간을 들여 한 가지 주제로 적은 수의 강사가 시간을 채우는 것을 강연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강의와 강연의 차이를 굳이 꼽고 싶지는 않지만, 그 중 한가지를 꼽자면 '깊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의가 강연보다 더 깊은 수준을 가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강의는 긴 시간을 두고 하는 만큼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첫 강의와 마지막 강의까지 염두해 두어야 할 만큼의 체계를 가지는 반면, 강연은 짧은 시간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임팩트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되기에 강의와 비교했을 때 만큼의 깊이를 도모하지는 못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우리나라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해 두는 것이 옳다고 해야겠다. 지금은 '강연'이라는 것이 워낙 큰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고, 전문 강연자를 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이 강연의 큰 틀로 데려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의 TED가 그것이다. TED는 전문 분야에 오랜 기간 종사해 온 사람이나 자신 나름대로의 이벤트나 역사를 가진 사람을 초청해 약 20분 간 강연을 하도록 하는 무료 강연 사이트이다. 물론 강연을 보는 것은 무료이지만, 실제 강연장에 등록을 하여 듣는 강연을 꽤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이런 TED가 우리나라에 도입되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어떠한 정보나 지식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강연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 강연시장이 확대되자 마자 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표적 왜곡 현상 중 하나는, 자기 자서전에나 쓰여져야 할 내용이나 마치 자신의 겪은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양, 강연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읽어나가는 것이다. 강연이라는 것이 짧은 시간에 임팩트를 주는 것이 장점이라고 한다면, 이런 '자서전류'의 강연자가 하는 이야기들이란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는지를 구구절절히 설명하는 것, 그것 뿐이다. 자신이 겪은 일과 그 강연을 듣는 사람이 겪을 일들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강연자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나도 했는데, 당신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당신이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에게 모든 문제가 있는 것 마냥 굴게 되고, 강연자가 지금 위치하고 있는 지위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때문에 더욱 노력하고자 믿게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왜곡 현상은, 강연 컨텐츠의 질적 하락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열리고 있는 강연들의 목록을 죽 뽑아보면 대부분의 강연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대상의 '꿈' 강연이나, 정치인의 '정치 인생' 강연이나,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육아' 강연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확한 자료를 찾기에는 다소 시간상 부족함이 있으므로, 수치를 대기를 어려우나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저 세 가지가 축을 이룬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강연 컨텐츠의 질적 하락을 가장 선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은 '꿈' 강연이다. 여기서 말하는 꿈이란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 꾸는 꿈은 물론 아니다. 아마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에 대한 강연을 우리 사회에서 한다고 하면, 그의 유명세를 제외하고 그 강연에 몇 명의 사람들이 올 것인지 궁금해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꿈을 강연한다는 사람들의 강연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꿈을 가지는 것이다.'

'꿈을 가진다면 여러분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꿈을 실현시기키 위해서는 당신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꿈을 이룬 사람들은 도전을 했다. 당신도 도전을 해야 한다.'  등등


이런 이야기들을 그들이 말하는 '꿈을 찾지 못해 힘들어 하는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 하고 있다. 일종의 '자서전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저런 꿈을 이루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강연을 통해서 자서전의 한자락을 채워보고자 하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스타강사'가 되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담보로 남들이 꿈을 갖도록 하는데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다.  


꿈을 갖는 것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꿈을 가지는 사람과 꿈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연'의 한 컨텐츠로서 누군가에게 꿈을 가지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꿈을 가지지 못한 것은 그사람의 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 그 사람은 꿈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꿈을 가지라는 강연을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직업의 특성과 그 직업은 선택한 계기 등을 알려주는 강연을 한다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은 꿈을 찾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우선 '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알려주고 나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마도, 정확한 설문조사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꿈'에 대한 강연을 듣고 난 뒤, 그 강연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조사해본다면, 단지 그 시간 동안 '꿈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정도의 반응만 나와도 아마도 그 강연은 좋은 강연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이런 비유를 하곤 한다. 말이 목이 마르다고 해서 강가에 데려가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말이 물을 마실 것인지 말 것인지는 말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비유 말이다. 하지만 본인은 이 비유에, 조금 다른 의미를 첨부하고 싶다. 말이 목이 마른지 마르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사람이다. 사람은 말이 목이 마르면 스스로 강을 가든 아니면 주인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든 그러한 변화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 '물을 마시는 것은 중요하다' 며 강가에 끌고 가 놓고선 '왜 물을 마시지 않느냐' 라고 하는 것은 다소 억지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꿈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는 따위의 강연을 할 것이 아니라 '꿈을 가지고 싶을 때, 어떤 꿈을 가지는 것에서 궁금한 사항에 생기면 물어보라' 라는 정도의 호기심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강연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 다른 내용이지만, 말이 물이 아닌 사이다나 콜라, 혹은 주스를 먹고 싶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의 꿈이 다양한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무리가 조금 감정적이 될 듯해 다음으로 미뤄야 겠다. 


결론이랄까, 간단히 결론만 적도록 하면. 


강연이라는 것을 하는데 있어, 강연자에게는 생각보다 큰 책임이 따른다. 학교 수업이나 대학 강의의 경우에 있어서는 일상성에 포획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연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원해서 듣는 것이거나, 자신의 상사나 선생님이 학생들이나 직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이 있는 강연을 신청한다. 이런 강연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꿈을 찾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잘못된 도전을 생각하기도 한다. 


마냥 꿈을 좇아 가라는 강연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책임감 있는 강연 시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적었다. 


그러니 개나 소나 강연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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