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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9.25 대학과 성(性)
  2. 2013.07.09 눈길을 살짝
2014. 9. 25. 05:32 카테고리 없음

2014.09.25.


2004년 처음 대학을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서울에 종종 올라올 일이 있었지만 내게 서울이란 '사람 많고, 얼굴 표정 어둡고, 무언가 바빠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45도 이상 들어야 하는 높은 건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차마 내가 너무 촌스럽게 느껴질까봐 적지 않도록 하겠다. (이미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잠을 잘 곳이 생기고(첫 보금자리는 2인실 기숙사였다.) 내가 소속된 곳이 있다는 사실은 내게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서울사람이 되어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표준어를 구사해보려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기에 지금도 여전히 노력중이다. 
서울에 내 24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다시 서울을 보게 됐다. 사실 '서울'을 보게 됐다기 보다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이 합당할 듯 하다. 당시 처음으로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을 '압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만나게 된 곳은 다름 아닌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줄여서 오티(OT)라고 부르기도 하고, 최근에는 한글 사용 분위기에 따라 '새내기 새로배움터'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곳 말이다. 짧게는 1박2일부터 길게는 3박4일까지 진행하는 학교가 있다고 하니, 대학은 짧게 배울 수도 또는 길게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아마 각 대학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고향에서 올라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기 시작하기 전, 오티는 말 그대로 서울 대학 생활에 대한 오티이자 서울에 대한 오티였다. 오티를 가보니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의 특성인가 싶을 정도로 전국 각지 출신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있다는 것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공립 남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있어서 수많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곧 다니게 될' 여학우들의 존재는 신선의 수준을 넘어 황홀의 수준에 이르기에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의 시점에서 약 10년 전의 여학우들의 사진을 보면, 어딘가 촌스럽기도 하고 또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동기들과 선배들의 사뭇 다른 모습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때 당시의 '첨단' 유행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에 나름 새롭다.

내가 황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여학우들에 대한 생각이 변하게 된 것. 이것이 이 글의 주제임과 동시에 내가 서울에 대학을 올라오고 난 뒤 '아, 이것이 다른 것이구나'하고 느꼈던 것이다. 생각이 변하게 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내가 무지했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인정하고 넘어가자. 내가 무지했다. 내가 무지했던 부분은 다름 아닌, 내가 너무 쉽게 여성의 상품화와 여성에 대한 희화화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시 오티로 돌아가자. 오티에 가기 전, 학교에 옹기종기 선배동기들이 모였다. 가볍게 자기 소개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니 당시 학생회장 선배가 흰 종이를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무슨 종이인가 해서 보니, 양성 평등 교육 및 성불평등에 관한 문제점 그리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 등이 적혀 있는 종이였다. 그것을 단 한줄도 빼놓지 않고 읽어내려가는 학생회장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거부감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사례를 들어가며 읽어나가면서 가끔 유머 코드를 섞긴 했지만 그것이 흰 종이 위에 적혀 있던 내용의 전체적인 맥락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때 학생회장 선배가 들었던 예시 중 대표적인 것들은 아래와 같다.

"예전에 어떤 선배가 오티에 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타입의 신입생이 있길래 친해지고 싶어 옆에 앉았어. 그리고 술을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무슨 기분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 여학생에게 건배와 함께 술을 서로 따라 주자고 이야기를 했다네. 그때 그 선배는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으나 다음날 총여학생회에서 그 선배를 찾아와 오티가 끝나는 대로 학교로 돌아가 사과 대자보를 붙일 것을 요구했대. 사과 대자보에는 선배가 했던 행위들, 예를 들면 술을 같이 마시자고 한 행위, 억지로 건배를 시킨 행위, 술을 따르도록 한 행위들에 대한 반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네. 그 선배는 총여학생회 소속의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대자보를 붙였어."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장기자랑 하면 여장들 많이 하지? 우리는 하면 안돼. 여장은 여성을 희화화하는 것이라 알려져 있어. 여장이 재밌는 이유는 남자가 여자처럼 분장을 해서 재밌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가진 특성을 부각시키고 또 그것을 통해 통쾌해 하는 것 혹은 여성에 대한 성적 상품화 등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시킨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학교는 여장을 절대로 하지 않아. 만약 누군가 이따가 밤에 있을 장기자랑에서 여장을 하게 되면, 아마 장기자랑은 중단될 것이고 그 여장을 한 학생은 리포트보다 대자보 쓰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 거야."

이런 이야기를 버스 안에서 가만히 듣다보니 "아, 서울에 있는 대학은 여성에 대한 존중을 높이 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되었다. (여담이지만, 여성을 여성이라 부르는 것이 오히려 여권신장에는 좋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여자/남자는 단지 성별에 대한 차이를 부각시키는 반면, 여성/남성이라 함은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본성, 남자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부각시키는 표현으로 여자에게는 남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유교주의적 사상이 깊게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많이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리고 마치 '여자'라 부르면 비하하는 듯 하고, '여성'이라 부르면 높여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풍토 또한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아, 또 여담이 길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야지.

오티를 가는 버스 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오티 장소에 가보니, 여학우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선배가 했던 다른 이야기 중에, 내가 속해있었던 사회과학부 소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각 단과대학 오티에 참석해서 여성 비하 혹은 희화화를 하지는 않는지 또는 여자 휴게실을 따로 만들어 두지 않은 것을 적발하거나 혼숙을 예방하기 위한 감시의 목적으로 총여학생회 소속의 학생들이 몰래 돌아다닌다는 사실도 있었기에 여학우들이 어떨때는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2박 3일 동안의 오티 기간 중 '성'과 관련된 문제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즐거운 무박 3일의 오티를 보내고 다시 서울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총여학생회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들은 왕왕 있었다. 실제로 희롱이나 모욕에 대한 대자보를 읽어보기도 했고, 그것이 미치는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용어 하나에서도 그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는데, 총여학생회를 부를 때 줄여서 '여총'라고 부르는 것은 금지되었다. '여자총학생회'가 아니라 '총여학생회'가 정식 명칭인 만큼 줄여 부르려면 '총여'가 되어야 했고, '여총'이라 부르는 것은 남녀가 모두 포함된 '총학생회'와는 다른 별도의 조직같아 보일 뿐만 아니라, '여자'를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기에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티를 다녀온 이후 한 학기 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입대를 했고, 다시 서울에서 약 3년 간 멀어져 있었다.(당시 군입대는 실패ㅋ) 오티와 약 4개월 간의 신입생 생활 동안 받았던 임팩트 때문이었을까, 당시에는 꽤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다. 총여학생회의 감시때문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지평을 넓혔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성인권이라는 미개척지를 자의는 아니었지만 개척하게 되었고 또 그것에 대한 공감을 충분하게 하였기에 나름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향에 내려오고 고향 근처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심찮게 당시 싸이월드 등과 같은 사이트에 올라오는 여장 사진들과 여자를 두고 싸움을 하거나 선택의 강요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고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나는, 기껏해야 '여자 편 드는 이상한 놈'으로 밖에 인식되지 못했다. 나는 여기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지금도 일부 대학에서 여장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점,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거나 전통으로 여기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고 그런 대학들이 공교롭게도 서울이 아닌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빈도수가 높다는 것을 인식시켜주고 싶은 생각 뿐이다.(여담이지만, 아직도 지역 일부 체육대학에서 학우들을 때리는 것을 전통이니, 역사니 하는 대학이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내가 지방에서 대학을 다녀보지 못했으니 그 지역의 문화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여성을 희화화하는 것, 상품화 하는 것이 일부 지역의 전통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내가 가진 문제의식이 때로는 나 스스로를 불편하게 했지만 이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을 고백해야 하는 순간은 지금이 적절한 듯 하다. '전통'이니 '재미'니 하는 구태의연한 표현들을 포함해서 티비에서도 여장은 다시 웃음을 유발하는 모습으로 다가왔고 처음에는 불편했던 여러 장면들에 나 역시도 익숙해졌다는 것. 이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긴 글을 왜 적느냐.

최근 서울의 모 여대 총학생회가 축제기간 중 학생들에게 요구한 '의상'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 여대 총학생회는 학생들에게 심한 노출을 하거나 교복 등 흔히들 '아청아청'이라는 의성어로 익히 알려진 '아청법' 위반을 연상케 하는 복장들에 대한 자기 규제를 요구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 마음 속에서도 양시론이 구축되어 있다. 다만 남자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로서의 입장과 여성인권의 향상이 필요하다는 입장, 이 두가지 입장에서 양시론이다. 자유에 대한 보장은 권위로 펼칠 수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 '자유'에 대한 한계가 제대로 설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규제는 억압일 수 있기에 우선 소속 학우들과의 논의가 필요했던 부분이 분명 있었다고 본다. 그와 동시에 축제라는 매개를 통해서 대학 내부의 구성원과 대학을 둘러싼 사회의 구성원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있어 여성에 대한 상품화가 만연해 있는 사회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해야 했었나 하는데 총학생회의 문제의식이 있다고 보아 찬성표를 던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녀공학 대학이라 하더라도 총학생회에서 여성의 상품화와 희화화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같은 성명을 낸다 하더라도 찬성할 것이다.

2004년에 들어갔던 대학과는 다른 대학에 2008년에 입학하기도 했던 나는, 2008년 입학 대학이 '축제 때 가장 물 좋은 대학'이라는 명성(?!)을 얻은 것 역시도 간과하지 못한다. '컨셉'을 잡아 운영한다고 하여 승무원 복장을 한다거나 간호사 복장을 한 여학우들이 주점을 운영한단다. 학생들은 그것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고 매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니 결국 '시장주의'의 답습을 대학에서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문제의식도 없이 '자정'하지 못하는 것은 말그대로 문제 그 자체일 수 있다.

티비만 틀면 나오는 걸그룹의 복장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고, 몸매를 드러낸 것으로도 부족한지 성인이 채 되지 못한 멤버에게 성행위를 암시하는 춤을 추도록 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사회를 구성하는 양대축 중 하나를 구성하기도 함과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섹시함에서 나온다'는 이념을 주입시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사회라고 특별히 그런 이념에 반항하고 대항하고 대학만의 양성평등을 구축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에게 무조건적으로 즐겁고 옳은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상대방에게도 옳을 것이라 인식하는 것, 또 이런 문제들을 직면함에 있어 내부적인 토론이나 그것을 넌지시 혹은 의도적으로 밀어넣는 사회에 대한 토론이 부재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사에 치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매사에 전혀 치열하지 않고 단지 '좋은게 좋은거지'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다보면 차별은 당연시 되고 억압은 마치 자유로운 것인양 인식될 것이다.

2004년 대학 신입생으로서 느꼈던 그때의 그 문제의식은 지금은 많이 희석되어버렸지만, 오히려 그 때보다 지금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의견을 구함에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의 소유라기 보다 공유 그리고 토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더욱 굳건해졌다.

어찌들 생각하시는지.

p.s 서울과 지역에 대한 구분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경험의 미천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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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9. 18:17 카테고리 없음

눈길을 살짝 2013.7.9 


여름이 되니, 자연스럽게 여자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옷이라는 것이, 중세 혹은 근대의 의미인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이거나, 더 이전 고대에서의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거나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가리기 위한 의미를 넘은지는 오래인 듯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헐벗은 채로 살던 중,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치부를 가리게 된 것이 '옷'의 계기라고 하기에도 현대적 의미의 옷과는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듯 하다. 


옷차림이 가벼워 지는 것에 한계가 있는 남자들은 옷보다는 옷 안의 몸에 더욱 신경을 쓴다. 깡마른 몸매보다는 어느 정도 근육질의 몸매가 보기 좋은 것은, 고대 올림픽의 동상에서 나타나는 남자의 아름다움을 보면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하지만 몸을 단련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는 반면, 여성의 옷차림은 그 한계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길에서 만나는 헐벗은 여성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그리고 내가 눈길을 보낸 것에 스스로 민망해 다시 빠른 속도로 눈을 다른 곳으로 향한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닐지라도, 드러내놓고 보기에는 민망함과 쑥스러움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여자들이 여름이든 겨울이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님에도, 남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계속 같은 패션을 유지할까?


아닐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김정운 교수는, 그의 한 칼럼에서 한국 여자들에게 '왜 노출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대답들 중 일부는 '자신이 만족하기에' 그렇게 입는다고 했지만,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기 만족'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에서 느껴지는 '자기 과시'가 더욱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나는 '자기과시'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눈길 한번 주세요. 


'눈길'이라는 표현은 매우 가치중립적인 표현이다. 아직 성적(性的)으로 오염되지 않은 단어라는 말이다. 본인도 이 글을 통해서 '눈길'에 어떠한 성적인 의도를 담을 생각은 없다. 오히려 '성'을 넘어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관심'이라는 것을 '눈길'로서 표현하고 싶다. 여자의 노출로 나타나는 '관심', 그리고 멋진 정장을 빼입은 남자, 비싼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오렌지족 등이 원하는 '관심', 그것의 필요조건은 '눈길'인 것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이 바라는 것을 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의 의견에 완벽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행동하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거나, 심지어 걸음을 걸을 때조차 우리는 다른 사람의 욕망 혹은 관심에 일정 부분 기대어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늘씬한 다리를 보여주는 핫 팬츠, 가슴이 훤히 보이는 듯한 탱크탑이나, 오히려 숨겨져 있기에 더욱 자극도가 높아지는 스키니진이나 롱 원피스 같은 경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눈길을 준다. 남자들만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눈길을 준다. 이런 눈길들을 받는 사람은 눈길을 받는 것을 짐짓 모르는 채 행동하지만, 사실은 거의 모든 눈길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타자의 관심을 욕망하는 우리 인간들은, 공기가 없이 못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길 없이도 제대로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진단을 나는  내려보고 싶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눈길은 관심이라 생각한다. 눈길을 주고 받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의 의미가 상대를 애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일 수 있고, 저 옷은, 저 가방은 어디서 산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관심일 수 있다. 모든 관심을 포괄하는 것이 우선 눈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눈길을 주는 것보다는 눈길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한다. '눈길 한번 주세요' 라고 자신의 이마나 옷에 적어놓고 살 수는 없으니 자신의 패션이나 얼굴, 차 등을 통해서 눈길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눈길을 받는 그 순간, 자신은 다른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무에게도 눈길을 받지 않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눈길을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사람은, 눈길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가족으로부터도 눈길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눈길을 준다. 거울을 보면서 가장 눈길을 많이 주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길을 걷다 보면, '눈길 한번 주세요' 라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여름이 되면 특히 그 소리들이 소음이 될 정도로 많이 들린다. 일일이 눈길을 주기에는 내 눈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있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내 눈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줄 수 있기에, 눈을 감기보다 귀를 막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눈길을 살짝, 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관심이다. 관심을 주고 받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판단해보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만 눈길을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화성인 바이러스'에 나올 정도로 심한 노출을 하거나, 과장된 화장 혹은 특이한 분장을 하게 된다. 이런 모습들은 다른 사람들의 귀과 눈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들은 더욱 관심에 굶주려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안쓰럽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잘못된 '눈길' 하나를 지적하고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외모적으로 특이하거나 인종이 우리나라 내에서 소수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장애인이나 쉽게 접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신기하다'거나 '불편해보인다' 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눈길을 준다. 이런 눈길을 주는 것 자체는 악의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눈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악의로 받아들이거나 불편함으로 느낀다. 눈길 그리고 관심이 인간이 원한 것이라고는 할지라도 보호받아야 하거나, 위치만 바뀌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곰곰히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받는 상처의 크기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길에도 윤리가 있고, 방식이 있겠지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눈길, 즉 관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에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바탕이 되기를 바람해 본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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