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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12.02 벗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걸
  2. 2016.04.22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3. 2015.02.14 현우의500자_75
2016. 12. 2. 20:55 내 생각

벗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걸.’ 2016.12.02.

 

대부분의 친구들은, 졸업을 할 초등학교 인근의 중학교를 갔다. 하지만 나는 형이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체학급에서 단 10명 만이 진학을 했던 마산중학교에 지원했고 어렵지 않게 입학이 결정되었다. 굳이 형이 다니고 있다는 이유가 아니었어도, 유일하게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는 것도 큰 결정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중학교 진학이 결정되고 난 뒤, 내가 처음 한 일은 머리카락을 짧은 스포츠로 깎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두발자유화는 꿈 같은 소리였다.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나는 스포츠 머리에 익숙해져야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되려 어색한 머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졸업앨범에는 정말 이상한 모습으로 찍힌 사진이 떡 하니 남았다. 졸업앨범 사진을 정식으로 촬영하였지만,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며 복도에서 찍힌 스포츠 머리의 내 모습은 지금 봐도 우스꽝스럽다. 거기다가 그날 입고 있던 옷이 하늘색 면 셔츠였다. , 하늘색이라니. 가능하다면 같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던 동기들의 앨범을 모두 몰수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그리고 이어 두 번째로 내가 중학교 진학을 위해 한 일은 교복을 맞추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특이한 선택을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교복 브랜드는, 스마트와 엘리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교복판매점에서 중학교 교복을 맞추게 되었다. 이것도 형이 그곳에서 맞추었기 때문이었고, 브랜드가 없는 대신 그만큼 저렴했다는 것이 이유일 수 있겠다.

 

처음 교복을 받아 온 날이었다. 마산중학교 교복은 정말 특징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교복이었다. 남색 상의에 같은 색깔의 하의. 단추에는 한자로 적힌 중학교를 뜻하는 중()글자가 금색으로 반짝였고, 상의소매에도 같은 형태이지만 크기가 작은 단추들이 3개씩 붙어 있었다. 흰 셔츠는 분명 면이라고 했지만, 이상하게 삼베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칠었다기 보다 삼베처럼 실 한 올 한 올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징도 없고, 고급 교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교복을 나는 매일, 입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한참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중학생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많아질 듯 보였고, 정장 형태로 된 교복을 입으면 마치 내가 어른이 된 듯해 기분이 좋았다. 학교에서 하교 한 뒤 교복을 집안에서 입고 다니는 이런 나를 보며, 내가 곧 들어가게 될 마산중학교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 형이 나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그거, 입기 싫어도 입어야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벗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걸.’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다는 것은 지금의 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의미였고, 이렇게 교복을 입고 있으면 번듯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친척들은 나의 중학교 입학을 축하해주었고, 내게 기대하는 것들을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중학교 교복을 입을 때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며 멋진 중학생이 되어야지, 하며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형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게 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1년이 지나는 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선배들은 무서웠고, 선생님들은 더욱 무서웠다. 체벌이 당연했던 시절이라 사소한 잘못에도 선생님들은 가볍게 매를 들었지만, 그 매는 마음에 무겁게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시점이 되어서는 체벌은, 마치 경주마를 다그치듯 너희를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양 뺨에서부터 발바닥까지 이어졌다. 교복을 입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중학생이라는 신분 뿐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의무는 자질구레한 것부터 때론 억울하다 느껴질 정도로 큰 것까지 많고 많았다. 그 결과 교복은, 매주 주말 다시 입고 싶지 않은 것이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교복을 입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었다. 하늘색(난 하늘색을 좋아하는 것인가...) 운동복을 입고 졸업식을 보내며, 고등학교 교복에 대한 환상 따위는 이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고등학교에 또 올라가는 것.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히 가야한다는 분위기에 취해 대학을 가는 것. 물론 당연하지 않았던 뭇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내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오며, 그 의미를 만끽했던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군대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시력 탓에 공익을 가게 되며 겪게 되었던 차별 혹은 비판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고, 30살이 넘으며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사회적 의무들은 나도 모르게 나를 옥죄었다. 그리고 의무에 허덕인 탓에 권리는 간신히 그리고 어렵게 하나씩 얻어갔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중고등학교 입학이 그럴 것이고, 대학 입학이 그럴 것이고 취직, 결혼, 출산 등이 그럴 것이다. 이런 다양한 능선들이 눈 앞에 있을 때 그것을 정복하든 우회하든 그것을 선택함에 있어 책임은 다양하게 삶을 파고든다.

 

평범한 사람이 이럴진대 다른 이들보다 특별한 지위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책임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작게는 카페나 구멍가게의 사장에서부터 크게는 한 나라의 대표라고 부를 수 있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쉽게 얻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과는 별도로 그것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많은 책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카페 사장은 손님들을 위해 맛있는 커피를 준비해야 하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은 공정하게 국민들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고, 정의롭게 국가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원한 지위에 해당하는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복은, 단지 교복일 뿐이었다. 그것을 입고 있다고 중학생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벗었다고 중학생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중학생이면 중학생이 해야 할 일이 있고, 고등학생이면 또 그 나름의 의무와 권리가 생기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가지로 가족 안에서, 지역 안에서, 국가 안에서 그런 의무와 권리는 생기기 마련이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해 교복을 벗고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그것이 주는 지위와 권리, 권한을 버리고자 한다면 자퇴를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손실이나 권리의 상실은 자신의 책임 범위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은 원하지 않았어도, 큰 잘못이나 학교나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람은 퇴학을 당하기도 한다. 그 교복을 입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해도 또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 해도, 그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또 다른 교복을 입고 있는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수치심을 준다면 벗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이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군인, 어머니, 아버지, 국회의원, 총리, 대통령 등 다양한 사회적지위와 직업들이 존재한다. 되고 싶어 된 것이든 되고 싶지 않았음에도 된 것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벗고 싶어질 때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벗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우선 어울리지 않고, 그것을 입고 있음으로 인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중학교 교복을 입어가며 설레고 있었을 나를 만난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을 입을 수 있는 것과는 별도로, 입게 되었으면 최선을 다하길. 최소한 그것을 입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또 친구들에게는 부끄럽지 않게 하길,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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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2. 01:30 내 생각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가끔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다. 그건 고3이었을 때 수능을 마친 뒤의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패잔병들의 모임처럼, 수능이라는 전쟁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져 버렸으니 자존심이라도 지켜보려는 친구들은 날카로웠다. 사소한 일에도 큰 시비로 번질 수 있었으니 서로 졸업 때까지 조용히 지내자는 암묵적 합의도 있었던 듯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의 한 친구와 다른 반의 한 친구가 싸운다는 소식이 복도로부터 들렸다. 이 싸움이 있기 몇 달 전 우리 반의 두 친구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불똥이 이상하게 나에게 튀었다. 그 둘의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할 사람이 나 밖에 없었는데(?왜일까?) 내가 말리지 않았다며 꽤나 욕을 들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누군가 싸움을 하면 말리겠노라- 하고 했던 허망한 맹세를, 수능이 끝난 뒤에야 지키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 ! 싸우지 마라. (한껏 짜증난 목소리로)

 

한참 서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사지하고 있던 두 친구의 사이를 슬며시 쑤셔 들어갔다. 그런 뒤 한껏 힘을 주어 둘을 떼어냈다.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때만 해도 힘이 셌던 것인지 둘은 생각보다 쉽게 멀어졌다. 우리 반 친구에게 그만하라며, 교실로 들어가자고 하는 순간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돼지쉐끼(새끼의 사투리, 쉐끼), 니는 뭐꼬?

 

? 나한테 한 이야기일까? 정말?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반 친구는 정확히 내 눈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 난 그냥 싸움 말린거 밖에 없는데? 하고 냉정을 찾았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나 역시도 무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는 느낌으로 갑자기 싸움을 시작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바라!’ 라고 시작한 싸움에 옆반 친구는 참 많이도 맞은 듯 했다. 체급이 달랐다고 솔직히 고백해야겠지만, 어쨌든 나의 싸움은 두 친구를 말리던 것보다 더 격렬하게 말림을 당하며(?) 끝이 났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갔다.

 

가보니! 나와 싸웠던 그 친구가 밀대자루를 손에 쥐고, 나를 죽일거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씩씩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나도 죽을 만큼 소변이 급했으므로, 그 친구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총총거리며 가서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들키지 않은 채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난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한 무리의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아왔다.

 

잠시 배경설명.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이상한 교육을 했는데 대학처럼 학생들이 교실을 옮겨다니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시기가 잠시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교실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어 일종의 휴식공간이 있었다. 배경설명 끝. 나는 그 한 구석 모퉁이에 앉아 당시 유행하던 힐리스를 신은 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를 찾아온 한 무리의 친구들은 나의 위치와 정대각선의 모퉁이에 한껏 어깨와 미간에 힘을 주며 섰다. 굳이 분류하자면 양아치일까. 3이 되어서도 와해되지 않았고, 수능을 치고서도 저러고 있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우정인 듯 보였다. 무리 사이에서 마치 대변인인 양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평소 얼굴과 이름은 알지만 딱히 친하다고 할 친구는 아니었다. 그 역시 양아치였다.

 

니가 내 친구 때렸나?

 

일종의 보복성 방문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 한 걸음 나왔던 친구가 다시 묻는다. 돌았나?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갑자기 잘 안난다. 좀 길게 대답했던 것 같은데,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저 새끼가 내한테 먼저 욕을 했다. 나는 싸움을 말릴려고 한건데, 내한테 시비 걸고 그러면 안되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비논리적인 대답이었는데, 이 대답이 먹혔다. 무리의 친구들이 생각해봐도 싸움 말리는 사람한테 다시 시비거는 건 아니었나 싶었던 듯 하다. 한 걸음 나왔던 친구는 다시 뒤로 들어갔고, 그 무리의 친구들 중 일부는 나에게 앞으로 조심해라, 툭툭 던지며 모두 다시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나와 싸움을 했던 친구는 양아치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나름의 계파는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조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싸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치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도 적고 있냐.

 

나 한 명 조지겠다고, 우루루 몰려온 그 친구들 - 결국 다 고등학교 동창들이긴 하지만 -이 참 미웠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기가 맞았다고 친구들을 불러온 그 친구보다 무슨 일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랑 단지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려 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그 친구들이 난 참 미웠다.

 

그럴 수도 있다.

 

, 그럴 수도 있다. ‘친하다는 것 역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내가 속하지 않은 그룹이나 집단의 친함이 나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러고 있지 않은지 반성을 해보게 되는 측면도 있다. 내가 당할 때는 느끼는 것을, 가해자가 되면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진 이중성인가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감정의 근원이 친함이라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하다.

 

자주 만난다. 이런 상황.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사람과 어울리도록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다. 정치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물급 인물이나 정당에 친밀함을 느껴 거물급 인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을 막무가내로 비난하거나 또는 상대 정당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을 일삼기도 한다. 정치에서 뿐만 아니다. 오히려, 정치를 포함하는 공적 영역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의 친밀함이 주는 폭력이 더욱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는 친구라 할지라도 나는 누군가와 친하다는 것으로 거의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경우도 있고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뒤에 서줄 수 있는 용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옳은 행위인지 옳지 않은 행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을 해야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죄를 물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적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하며 내린 결론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주체적인 판단 즉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런 반인류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지금도 그 울림이 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혹은 철학적이거나 사상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도 생각은 그 충분조건은 모두 채운 듯하다. 이런 생각의 기준에 친함이 포함될 수 있을까?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친함이라는 것이 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내부적인 친함을 외부적인 미움으로 표현할 경우, 친함은 사실 친함이라기보다 추악함이다. 지키려는 것은 고작 자신의 마음 편함정도일지도 모르고 다음에 자신이 같은 경우를 겪게 되었을 때, 다른 이에게 보였던 미움처럼 같이 미워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바라건대

 

친함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면, 그 친함의 외부적 표현도 친함으로 보여주면 어떨까. 아니, 욕심을 버리고 친함의 시작으로 보여주는 건 어떨까 싶다. 친밀함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친밀함이란 결국 우연의 결과이다. 가족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연인이 되는 것도, 이러한 친밀함의 시작은 결국 우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지금 부모의 아들딸이 되고 싶어 된 사람은 없고, 친구라 할지라도 연인이라 할지라도 우연한 만남에 의해서 시작했다. 그럴 것이면, 지금은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우연한 기회나 친밀함의 시작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국제 사회나 나아가 향후 형성될지 모르는 우주 사회나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마음 많이 연 사람이 상처받는다.

 

슬픈 문장이다. 위의 문장을 다르게 표현하면, 더욱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 받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결국은 누가 더 친해지고 싶어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친밀함을 표현한다면, ‘? 나랑 안친하잖아?’ 라거나 왜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라는 반응이 아니라, ‘저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겠구나.’ 라거나 나도 마음을 열어볼까?’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더욱 넓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친함은 결국 폭력이 발생하는 요소였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많은 전쟁과 갈등의 근간에는 친밀함이 있었다. 더욱 친한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갈등, 자신과 같은 국적을 갖고 있거나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부터 느끼는 친밀함으로부터 발생한 전쟁 혹은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를 반으로 나누어 싸웠던 냉전까지. 이런 글을 통해서 서로 친해집시다!’ 하고 연설적으로 외치는 것이 결국 일상 혹은 세계사에 어떤 큰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친밀함에 친밀함을 연습하고 포용해나간다면, 더욱 나은 우리가 될지 모르겠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 친밀함의 범위 밖의 한 학생이 느낀 소외감 혹은 폭력의 경험으로만 끝내기는 아쉬워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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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4. 19:56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75


당장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 순간 앞의 문장이 떠올랐다. 앞바퀴를 오른쪽으로 힘껏 틀며 브레이크를 꽉 잡았다. 여고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 소리 사이로 내 옷에서 나는 알싸한 탄 냄새와 머리를 크게 울리는 크크크 소리가 화염처럼 나를 감쌌다. 몇 미터나 미끌린 것일까. 순간 정신을 잃었던지, 눈을 질끈 감아버린 탓에 동공에 압력이 가해졌던 것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앞을 볼 수 있었다. 내 눈 앞에는 여고생들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지도 않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내 앞으로 갑자기 튀어나왔던 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나에게 미안하다며 슬픈 얼굴을 짓고 있다. 팔과 다리에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우선 여학생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헬멧을 벗는다. 헬멧의 왼쪽 윗부분에 아스팔트 바닥과의 마찰에 의해 심하게 갈린 흔적들이 보였다. 죽이느냐, 죽느냐 라는 질문에 한 번 답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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