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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7.01.18 일상에 산다
  2. 2017.01.18 산중턱이었다.
  3. 2016.12.16 “2005년 산 포도주”
  4. 2016.04.17 어리석은 질문
  5. 2016.04.11 59초
  6. 2016.04.11 따라하기
  7. 2015.01.23 현우의500자_51
2017. 1. 18. 11:24 내 생각

일상에 산다

 

사당의 한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일이 있었고, 몇 일이 지났다. 시비 자체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할 것은 없다. 그저 어리고 안타까운 영혼들이 술이라는 악마의 피를 마시고, 괜한 사람에게 자신의 더러움을 퍼부은 것. 그 정도의 술회를 갖고 있다.

 

내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도, 화날 일도 없다. 어이가 없을 뿐. 그러나 몇 가지 느낀 바 있다.

 

더러움은 묻지 않았다. 내가 티 없이 깨끗하였다면 더러움 묻었을 것이나 그렇게 깨끗하지 않아 술집에서의 시비정도, 묻어도 묻은 티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양아치들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 아니다. 살면서 몇 가지 잘못을 했고 그것을 반성하며 살고 있다. 누구, 잘못하지 않은 자 돌을 던져라. 순수하지 않기에 더욱 더러워지지 않고, 더더욱 상처받지 않는다.

 

그리고 일상.

 

더러운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복귀할 일상이 있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건 더러운 일 뿐 만은 아니다. 슬픈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상이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화나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상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나아가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쁜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상이 있다는 건 필요한 일이다. 순간의 감정 변화가 삶 전체를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감정의 충동은 일시적이라도 삶의, 일상의 주인은 나여야 한다는 것. 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참는 것이 아니다. 이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삶 전체에 티끌 하나, 그것이 그림 전체를 망치게 두지 않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새 그림을 그릴 수는 없고, 포기할 수도 없으나 뭐, 아직 그릴 공간이 남았고 그 그림 그리는 일상.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

 

언젠가 적었지만.

 

비가 내려도 바다는 여전히 짜다. 파도가 쳐도 바다는 여전히 짜다. 시련은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시련이지도 않은 것들은 하물며. 헛헛, 웃으며 일상에 있다. 일상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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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8. 11:19 내 생각


"산중턱이었다."


산중턱이었다. 어린 시절이었으므로 오르긴 힘들었지만, 한 번 오르고 나면 높은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탁트임과 그로 인한 청량감이 들었다. 할머니의 집(할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므로, 주말마다 방문하는 곳은 자연스레 할머니의 집이 되었다, 그리고 정식명칭은 할매집이다.)은 산을 뒤로 세워진 단독주택이었다. 넓다거나 크다고는 하지 못했지만, 형과 내가 뛰어 놀 만큼의 공간은 충분했다. 그리고 결코 한 번도 빠져보진 못하겠지만 마산의 명치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합포만은 또 그만큼의 상상력을 제공해주었다.

 

할머니집에서 가까운 곳에는 우물이 있었다. 할머니의 집 바로 앞 아래쪽에는 200평 남짓 되는 밭이 있었고 그 밭과 아랫집 사이에 흙길이 있었다. 그 흙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바로 그 우물이 있었다. 생각하는 그런 우물은 아니다. 물을 길어 쓰는 우물이 아니라 물이 넘쳐 흐르는 우물이었다. 무학산 줄기에서 흐른 물이 지하로 타고 흘러 마침 그곳에서 솟아 올랐고 그 물을 사용하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시멘트로 만든 우물이었다. 우물 주위에는 이끼나 고사리 같은 것이 푸르름을 더하고 있었고, 가끔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보라색 조그만 꽃들도 보였다. 그리고 아주머니들.

 

빨랫감을 들고 나와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들. 그들의 손에도 조그마한 꽃들이 피었다. 보라색은 아닌, 붉은 꽃. 그 꽃은 사람 손과 꼭 같았다. 붉게도 피었지만 손목에 붙어 부지런히 빨래에 묻은 삶의 때와 먼지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크지 않은 동네였으므로, 내가 그 옆을 지나갈 참이면 그 꽃들은 내 손을 잡고 내 볼을 꼬집었다. ‘해누, 왔나~.’ 인사를 꾸벅, 하긴 하지만 누군지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들이다. 그저 매주 얼굴을 보고, 성씨를 붙이거나 출신지역을 붙인 ‘~으로만 불리는 아주머니들이다. (참고로 우리 할머니는 뒷길댁으로 불렸다. 길 뒷편에 살았기 때문이리라.) 꽃과 같은 손, 손과 같은 꽃들이 빨래를 하고 있는 그곳은 매주 할머지집에 갈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렀다. 여름이면 거기서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웃통을 벗고 등목을 하기도 했고, 어머니를 따라 빨래를 하러 가선 이끼나 풀잎들을 뜯어다가 흘러가는 물에 슬며시 올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우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내가 성장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 흘러 할머니께서 이사를 하셨다. 혼자 사시기엔 큰 집이기도 했고 또 그만큼 융통할 수 있는 돈이 궁색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또 다른 할머니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다 몇 해 전, 우연히 그 우물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바짝 마른 우물,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그 공간.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았고 누가 보아도 그저 둔덕이었다. 빨래를 하는 손 빨간 아주머니도 없었고, 나를 불러 세우는 이도 없었다. 나는 그 사이, 그곳을 오르는 데 힘을 들이지 않았고, 가능하면 차를 타고 가거나 할머니집 바로 뒤에 생긴 산복도로에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그저 그랬다.

 

10여 년이 지나며 많은 것이 변했다. 할머니집이 있던 동네에는 소방도로가 생겼고, 그 소방도로로라는 주차공간이 생기자 사람들은 차를 타고 동네를 드나들었다. 그 동네에 살던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또 그렇게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 채워지는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나는 청소년을 지나 성인이 되어 있었고, 메마른 우물 하나 보다 더욱 메말라 있을지도 모를 감성, 감정을 갖게 되었다. 살면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어릴 적의 추억이라기 보다 하루하루, 강하게 내리쬐는 감정 없는 논평과 시선과 그리고 생계, 그런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만약.

 

변하지 않고 만약, 그 우물이 그대로 예전처럼 흐르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푸른 이끼가 묘한 징그러움을 선사하고 보라색 조그만 꽃과 붉은 손꽃이 나를 반겼다면, 나 역시도 그 당시의 순수한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느낌으로 내가 다시 감정이 흘러넘치는 우물이 되어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길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랑은 모텔에서의 2시간으로만 상징되는 이곳에 한 방울 한 방울 감정을, 떨어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우물이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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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6. 01:41 내 생각

“2005년 산 포도주

 

10시가 넘은 시각,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글자를 보내주는 친구들에게 푸념하고 있을 때, 마침 같이 사는 친구가 집으로 돌아왔다. 부스스한 머리, 추위가 잔뜩 묻어 있는 어두운 색의 롱코트 그리고 손에 든 한 병의 포도주. 송년회를 하였다며 먹다 남은 포도주를 들고 왔다 한다. 포도주의 라벨에는 이 포도주가 2005년 산()이라는 표식이 있었다. 2005년이면,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다. 그리고 이 포도주의 고향은 프랑스다.

 

집에 있는 몇 개의 안주거리를 꺼냈다. 먹다 남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전과 몇 조각의 치킨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냉장고의 냉기를 덜어냈다. 포도주 잔을 두 개 꺼내고 접시를 꺼내 가벼운 포도주 술상이 차려졌다. 포도주는 병의 3분의 1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작은 포도주 잔을 꺼냈기에 망정이지 큰 것을 꺼냈으면 한 명이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을 양이다. 포도주 잔에 조금씩 포도주를 따른 뒤, 쨍 하는 소리의 건배를 했다. 친구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며 안주를 덜어 들고 가서 포도주를 마셨다. 나는 식탁에 그대로 앉은 채로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친구들에게 밀린 답장을 한다. 고마워. 다시 쓸 수 있게 되면 써서 보낼게.

 

비워진 포도주 잔을 다시 몇 번 적게 채워 넣으며 마시고 난 뒤, 포도주는 바닥을 보였다. 치킨이 두 조각 남았지만, 저녁을 일찍 먹은 탓에 다소 허기졌던 내가 먹어 치웠다. 안주를 모두 다 먹은 뒤, 젓가락과 접시를 탑 쌓듯 포개어 싱크대에 넣어 놓고 포도주 병을 재활용 분리수거 상자에 넣으려 일어났다. 그리고 혼잣말을 공기에 툭 던졌다.

 

“2005년 산이라.”

 

내 말을 들었는지 친구가 한 마디 거든다.

 

그거 한 병에 30만원 짜리다.”

 

순간 멈칫, 했다. 이 포도주 한 병이 30만원이란 말인가. 포도주를 마시기 위한 건배를 하기 전, 2005년 산이라는 것을 보았을 때 이건 어느 정도의 가격일까 궁금했다. 친구는 그 때는 별 말 하지 않고 단지 좋은 거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2005년 산이면 꽤 오래된 것이라 했다. 나는, ‘2005년이면 우리가 21살 때인데, 그 사이 11년이 벌써 흘렀네. 11년이면 포도주한테는 긴 시간일 수 있겠네.’ 라 하며 가볍게 넘겼다. 포도주의 가치를 알았다고 해도 또 몰랐다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하룻밤의 마무리를 기분 좋게 도와주는 정도였다. 가치와 가격과는 관계 없이, 마셔서 기분 좋은 것으로 감정이 정리되는 어떤 것. 그럼에도 이것의 가격을 안 뒤, 순간 생각에 잠겼다.

 

나는 2005년 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더 숙성되었나. 얼마나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나. 사람을 물건처럼 가격으로 따진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내가 일을 하며 받았던 돈으로 비교는 가능하리라. 20, 2004 12월 당시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았던 시급이 2800원이었다. 이 시급도 원래 2700원이었던 것을 한 달 간의 근무성과를 강하게 사장님께 피력한 결과 100원의 인상을 얻어내었던 사소한 승리였다. 한 시간 2800원을 받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한다면 어떤가. 가장 최근에 돈을 번 것이 일본어 통역을 하였을 때인데, 2주 정도의 일정을 소화하고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하루로 따지면 15만 원 남짓. 단지 금액으로만 따지면 악화되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큰 성과를 내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10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포도와 설탕이 원목으로 만들어진 통에 들어가서 10년을 담겨 있던 기간과 나의 20대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두 번의 대학교 입학과 한 번의 대학원 입학, 군대 입대 실패와 아동양육시설에서의 공익근무 그리고 1년 간의 일본 생활과 2년 간의 고시생 생활 등 넓게 펼쳐졌던 삶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늘의 포도주는 나에게 조용히 이야기 한 잔을 권했던 것은 아닐까.

 

흔들리지 않는 통에 들어 앉아 생각했다. 사람들은 내가 여기 가만히 오래 있을수록 나의 가치를 높게 쳐 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흔들리며 넘어지고 일어나서 다시 넘어지며 그 가치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란 사람들이 자신만의 길을 열고 아픔을 겪으며 그 사이 얻을 수 있는 성취들을 이뤄나가는 중, 그들에게 잠시 기쁨을 주는 것. 아무리 내가 비싸진들 나를 마시는 어느 누구보다도 결코 그 가치가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를 마신 그대여. 자신이 만든 통 안에 갇히지 마라. 어지럽게 흔들리고 넘어졌다 일어나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며 울다가 웃어라. 그러다 가끔 힘이 들 때 나를 한 잔 들이켜 다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자유로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2005년 산 포도주 한 잔 마시며, 산미(酸味)와 생미(生味,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맛)을 생각한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어떤 것들이라도 그것이 나의 가치를 낮게 할 것이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져야겠다. 20살 이후 지난 10여 년 간의 기간을 지내오며, 쉽게 손에 잡히지 못했던 생각을, 2005년 산의 포도주를 마시며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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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7. 20:13 내 생각

어리석은 질문


운전면허를 갓 따고 운전에 재미를 붙여나가고 있던 20살이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아버지로부터 운전을 하나씩 배웠기에, 말 그대도 실용적인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운전 면허 시험장 코스는, 떨어져가며 한 코스씩 한 코스씩 익혀 나갔다. 몇 번의 낙방 결과 운전면허를 손에 쥐게 되었으니 그 재미와 기쁨은 크디 컸다.


택시를 탈 일이 있었다.


운전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시기였던 만큼 매일 운전을 하시는 택시기사님은 얼마나 재밌을까 생각하다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택시 기사님께, 20살의 천진난만함을 담아 물었다. 기사님께서는 이렇게 재미난 운전을 매일 하시니 참 좋으시겠어요. 기사님께서 나를 슬쩍 보시고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뭐든 처음에는 재밌는데, 그게 먹고 살 일이 되면 재밌지 않아요.


그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재미가 없어지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다들 힘들게 운전면허를 딴 만큼 이렇게 운전을 하는 것 자체가 재미가 없을리 없다는 일종의 근거 없는 확신도 들었다.


그러고 시간이 꽤 지나, 법무사 사무실에서 일할 때 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점심과 저녁 시간을 포함해 약 10시간을 운전을 해야하는 업무가 이어졌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아메리카노와 담배를 물고 살았던 당시였다. 서울의 구석구석과 경기도라는 것만 알고 있던 평택 등을 직접 왕복하며 이틀에 기름 한 통을 비우며 운전을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운전이 재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내 생활비와 조금씩 모으는 저축을 위해 필요했다. 다른 재미난 일을 하는 것을 찾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고 밤만 되면 피곤해서 쓰러지기 일쑤였다. 운전은 재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고, 생계라는 항목 속에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20살의 내가 택시기사님께 했던 질문은, 살면서 경험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지를 모르는 내가 던진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쉽게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때로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론 매우 쉬워보이기도 한다. 힘들어 보이는 일들도 많은 것은 당연하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에 사람들은,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길 원한다. 간접경험도 경험일 수 있지만, 실제로 겪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경험 뿐이다.


경험을 직접적으로 하든, 간접적으로 하든 그 경험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은 경험 뿐이면 안되지만, 결국 경험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해야 한다. 타인의 경험을 읽거나 들으며 나의 경험이 될 수도 있었을, 혹은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던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20살 때, 운전에 재미를 느꼈던 나는, 택시 기사님의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하지 못했다. 이후 운전을 하지 않다가 운전이 삶의 큰 부분으로 들어왔을 때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바보 같고 어리석은 탓일 수 있겠지만, 사소한 것이라도 내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단지 경험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타인과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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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1. 17:04 내 생각

"59초"


할머니 생신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할머니께서는 깨어있으실 것이 분명해 전화를 드렸다. 여보-세요.(할머니께서는 '보'를 길게 발음하신다.) 할매, 해눕니다. 아이고. 해누가? 예. 오데고? 서울입니다.


'아이고. 서울에서 전화했나?'


예. 할머이, 생신 축하드립니더. 그래. 서울 먼데서 전화를 다 했나.


할머니께서는 아직 옛날 시외전화 시절의 기억이 있으신가 보다. 매년 생신이 되면 전화를 하는데, 서울에서 전화를 걸었으니 빨리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투의 말씀이시다. 아침 식사는 하셨는지, 편찮은 데는 없으신지 물어도 보고 해도 끊고 난 전화에는 59초라는 짧은 통화 시간이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다.


작은 손자, 해드릴 건 전화 한 통 밖에 없어 죄송한 마음 뿐이다. 명절 마다 내려가서 찾아뵈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며 손을 꼭 잡으신다. 할머니 댁에서 나오는 길, 우짜든가 공부 열심히 해라- 말씀하신다. 나는 알겠슴니더- 오데 아프시지 마이소- 하며 조그만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마음이 전해지는 거리는 서울-마산도 가깝다. 가깝다 못해 죄송함에 심장 한 켠이 찬 바람 맞은 듯 하다. 작은 손자, 얼른 자리 잡아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고마움 갚을 사람이 많다.


잠시 차가워졌다가도 다시 열을 올려 마음 다잡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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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1. 17:01 내 생각

“따라하기”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학교 근처에 라면집이 있었다. 그 가게 이름이 토라(虎). 호랑이라는 이름의 라면집에는 호랑이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저녁을 먹기 위해 꼭 이 라면집을 들렀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학생은 곱빼기를 무료로 드립니다.’라는 아름다운 문구에 홀린 탓이다.


라면 가게는 작았다. ‘일본 라면 가게’라고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좁고 기다란 가게였다. 가게 안에는 부부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셨지만 추억은 미화되는 법이니-가 계셨다. 라면과 볶음밥 세트를 주문하며, ‘오오모리데(곱배기로)’라 말하며 누가 봐도 학생인 듯 보이도록 가방을 벗어보였다.


라면을 기다리는 동안 하는 일이란, 주인아저씨가 라면의 면을 삶다가 한 가닥 끄집어내어 제대로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후루룩 먹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다른 손님들이 어떻게 먹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일본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는 가게의 손님들을 보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어떻게 라면을 먹는지 꼭 확인해야 했다.


따라 하는 것.


우리나라와 일본은 사는 방식이 닮은 듯하지만 달랐다. 일본 사람들의 관습과 습관이 있었고, 그것은 외국인인 내가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었지만 지킬 수 있다면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라면을 먹는 방법도 다른 사람들을 보며 배웠다. 사실 라면 뿐만 아니었다.


일본어도 그랬다. 다른 것도 그랬지만.


처음 한 학기, 4개월 내도록 따라만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귀로는 유심이 듣고 눈으로는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입술을 보았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의 말과 입술을 보는 것과 같았다. 일본어뿐만 아니었다. 그릇을 세 손가락으로만 드는 법, 인사를 일본식 예의에 맞게 하는 법, 수업시간에 공부를 하는 척 하며 딴 짓을 하는 법 등을 배웠다. 그리고 나아가 일본 문화로 사고하는 법까지 배웠다. 사고하는 법이라 거창하게 적었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생활을 하는 것 정도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따라 하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가는 곳이나 겪는 것 혹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따라한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탓에 따라 했다. 하지만 따라 하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다름 아닌 ‘제대로 따라 하기’다. 누군가를 따라하려 하면 주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따라 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누구를 따라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따라하는 사람을 따라하면 된다. 예를 들어,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이나 전통 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따라하면 된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사회 내에서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갑자기 따라 하기?


다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가는 곳이나 겪는 것 혹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따라 한다. 앞서 적은 문장과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따라하고 싶어도 따라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많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럴 때는 무엇을 하면 될까.


책을 읽으면 된다. (지겨운 결론이지만, 언제나 참인 결론인 듯 싶다.) 고전을 인간 문명의 정수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이상하게 생긴 할아버지, 할머니, 형, 누나, 오빠, 언니들이 우리보다 과거에 살면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또 이렇게 해보니까 해결되더라 – 하는 것을 친절히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먼저 살았고 또 죽어간 뛰어난 혹은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적어 남긴 사람들의 책이 고전이다. 이런 고전에는 따라할 것들이 가득 차 있다.


몇 해 전 한국사회에서는 ‘힐링’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힘들어하는 수많은 ‘아프니까’ 청춘남녀 뿐만 아니라 몇 번을 흔들렸는지도’ 모를 어른들 모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위로는 받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해답이나 시도해 볼만한 도전들을 찾지는 못했다. 다들 처음 겪는 일이었을 고민들과 어려움에 대해서, ‘괜찮다’라는 말 한 마디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괜찮다’ 한 마디 해주면 된다는 걸 알았으니 ‘따라한’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결론이 이상하다. 나도 안다.


일본 라면 먹다가 따라하라고 하다가 고전 읽으라니. 결국 나도 이 글을 적으면서, 누군가 나를 따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거나 힘들 때, 순간의 감정이 언짢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위로를 받기보다 나 이전의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둔 뼈아픈 충고나 그 속에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것이니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그런 마음. 따라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고 그 방법을 또 누군가 따라할 것이다. 그렇게 고전은 이어지고 삶은 새로워진다. 행복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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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3. 09:45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51


1960년. 우리가 헤어진 때는. 그로부터 50년이 더 흘렀지만 아직 우리는 만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이며 둘이 되어 버린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한 서먹함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둘 사이를 막고 있었던 것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멀게 느껴진다. 누구는 자유를 이야기했고, 누구는 우리의 안전을 이야기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지금은 헤어져야 한다며, 헤어짐을 그리고 그리움을 남겼다. 우리 사이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여전히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설국의 바람이 건너갈 적, 그 바람이 부러운 이유는 조약으로 가로막지 못한 하늘에겐 등록이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종전의 회한과 패전의 죄책감으로 우리는 헤어짐을 받아들여야 했다. 잘못은 명백했으나 헤어짐은 베스트팔렌의 그것보다 더욱 간명했다. 쓰가루 카이쿄. 혼슈와 홋카이도를 건너는 공해 위의 파도는 쓰가루 연인의 애가보다 높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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