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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3.28 "종이 한 장"
2016. 3. 28. 18:06 내 생각

"종이 한 장"


2005년, 혼자 전라도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다닐 적의 이야기다. 목포와 광주를 거쳐 전주에 도착한 나는, 그때는 유명했지만 한적했고 지금도 유명하지만 사람으로 북적댄다고 들리는 한옥마을을 들리기도 하고, 경기전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전북대학교에 들러 아침 학식을 먹기도 했는데, 아마 사진첩 어딘가에는 그 식판 사진이 남아있으리라.


전주 여행을 즐기던 중, 한지를 만드는 공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껏 기대하고 찾아간 곳은 그저 평범한 마을이었다. 회색 콘크리트 벽 사이로 '한지 공방'이라는 네모난 플라스틱 간판이 보였다. 한쪽에는 한지로 만든 여러 물건들을 파는 곳이 있었고, 쇠문 안으로 보이는 곳에서는 누군가 분주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창문으로만 채광을 하는 듯 했다.


날씨가 좋았던 봄날이라, 하얀 한지풀이 가득 담긴 목욕탕 욕조같은 큰 통에서 아지랑이가 설핏 보일 정도였다. 그때 그곳을 찾아간 사람은 나 혼자였다. 하지만 한지를 만드시고 계신 아저씨께서는, 나와 같은 관광객을 자주 접해보셨는지 내가 있든 없든 하시던 일을 묵묵히 하고 계셨다.


아저씨의 왼쪽 팔뚝에는 조잡한 문신이 보였다. 순간 쫄았지만, 내가 한지를 훔쳐갈 생각이 없는 순수한 여행자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 경탄의 눈빛과 신기하다는 표정을 한껏 지으며 아저씨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한지풀에 담겨져 있는 큰 판떼기를 아저씨는 앞뒤로 흔들었다. 판떼기는 기둥의 노끈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아기 한 명이 타면 좋은 그네 같아 보이기도 했다. 몇 번의 흔들거림을 반복한 뒤, 아저씨는 그 판떼기를 한지풀에서 완전히 건져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내눈에 보이지 않았던 판떼기 한 구석의 실을 집어 한지 한 장을 들어냈다.


부서지지도 않고, 퍼지지도 않고 그 형체 그대로 흐물흐물한 물 먹은 한지가 판떼기로부터 분리되었다. 아저씨는 익숙한지 그 한지를 이전에 만든 한지들이 켭켭이 쌓여 있는 옆으로 조심스레 옮겼다. 옮겼다 라기 보다 '얹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왜 한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까.


그 한지 한 장, 참 얇았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반투명상태의 한지 한 장이 마르면 불투명한 한지가 될 것이고, 예전 우리 선조들은 거기에 글을 적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한지에 글그림을 입히기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한지 한 장은 참 얇았을 것이지만, 그 얇은 한 장의 한지가 모여 책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 좋은 아찔함이 느껴졌다.


대학원에 복학하고, 이제 3주 정도가 지났다. 아직도 누군가가 적응했냐 라고 물으면, 글쎄..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 사이 많은 책을 읽었고, 논문과 다른 학우들의 의견들을 들었다. 읽었고, 또 읽었고 또 쓰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어떤 '지식'의 창출자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한지 한 장의 얇음이 떠오른 것이다. 얇아도 그것이 한 장 한 장 쌓이면, 언젠가는 두께를 만들고 그 두께 속에 사람들은 글을 적고 그림을 그렸다. 한지도 그럴진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더욱 얇디 얇고, 또 기껏 기억해놓으려 애써도 사라져버리는 머리 속 뇌이니 그저 묵묵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다들 '성공'을 바라는 듯 하다. 나와 같이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학문적 성공이 그 목표가 될 수도 있고, 가수가 되고자 하는 연습생에게는 데뷔가 그 성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 아니, 대부분이라고 해두지- 가만히 살펴보면 한 번에 덜컥 되는 것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들은 당연하다고 해도, 그것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 역시 필요한 듯 하다.


종이 한 장의 얇기는 얼마나 얇을까. 오늘 내가 익힌 지식은 또 얼마나 미천할까. 가수라면, 오늘 내가 연습한 노래 한곡이 얼마나 많은 틀린 음정이 있었던가 를 생각해보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만두지 않는다.


한 번에 일어서는 아기는 없다. 한 번에 책을 쓰는 사람도 한 번에 유명해지는 사람도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꾸준히 얇은 한지 한 장 올려 놓듯이 그렇게 해내 가면 되는 것 같다.


복학하고 공부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요즘, 나에게도 위로가 필요할 듯 하여 글 한 번 남겨둔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을 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꾸준히 뭔가를 하다보면 남들이 알아봐주든 알아봐주지 않든 뭔가는 해내지 않겠냐고, 위로도 한 번 던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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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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