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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소비'로 이어지지 못했다.

'윤리적 소비'로 이어지지 못했다. 2013.6.19. 


1.

1989년 영국에서 시작된 '윤리적 소비(ethical comsume)'가 한국에도 제대로 상륙하는가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원래 윤리적 소비라는 것은 '인간의 권리'나 '동물의 권리' 등 환경적인 이슈와 윤리적 이슈들을 총제적으로 진단해 소비자가 상품을 선택하는데 있어 그 파급 효과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공정무역'이나 '공정여행' 등 상품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이윤이 돌아가는 체계로 정착하긴 했지만, 이런 좁은 의미의 윤리적 소비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윤리적 소비로의 확장을 도모하자는 의미에서, 그 시도는 실패했다고 본다. 


얼마 전 어떤 유업 회사의 고압적인 상품 유통 및 판매와 관련된 논쟁이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신선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우유 관련 산업에서 생산자와 유통업자 그리고 소매상의 관계에서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쟁과 같은 밀어내기가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상대적 약자인 유통업자와 소매업자의 피해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컸다. '갑'과 '을'이라는 계약서 상이나 국가가 시행하는 시험에나 등장하는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었고,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사례들이 하나둘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윤리적 소비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초기의 윤리적 소비와는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결국 우리가 소비를 하고 물건의 값을 지불하는 것은 우리의 효용 극대화라는 점에서 경제학은 틀린 진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만의 효용, 즉 우리만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왜 윤리적 소비와 연결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의 횡포 아닌 횡포에 굴복하여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유통망을 유지시키려고 하는 유통업자와 소매상들은 결코 그 상품을 통해서, 또 소비자의 소비 행위를 통해서 삶의 질 향상이나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한 유업회사의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결국은 회사와 소비자 중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야기시키는 것이 담보된다는 말이다. 이런 소비가 지속된다면 대기업은 대기업의 이익을 얻고, 소비자는 각자의 효용을 극대화하지만 그 사이의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소비가 과연 윤리적일까, 아니 최소한 공정하기는 한 것일까. 


이런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했던 부분은 결국 '갑'과 '을'의 권력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우위에 있는가, 누가 열위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대한 거대한 논의가 있었음에도 그 결과는 '다 그렇지 뭐', '억울하면 성공해야지.' '너무 심하게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정도의 공감대만을 형성시켰다.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남 모 유업이라는 회사의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하겠지만 결국은 이것이 사회의 원리이며, 약육강식의 사회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은 윤리적 소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소비라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겠지만,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거나 상품을 소비한다고 할 때 이 상품들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이 되는지 그리고 그 이익이 참여자에게 고루고루 배분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윤리적 소비의 핵심이라 본다. 손 안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세상이 된 만큼 많은 정보가 우리들의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으니 우리는 생산과 유통과 관련된 사항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사소한 노력들이 우리만의 효용, 기업만의 이익을 넘어 더 많은 주체들이 각자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닐까.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 부분은, 막상 소비를 하려는 시점에서 그것의 생산과 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꽤 많은 노력이 들어가게 되고, 또 그것들이 소비에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가격'이라는 우리가 지불하게 되는 그 액수가 소비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다. 그럼에도 만약 널리 알려진 정보를 통해서, 이 물건을 만들 때 지구촌 어딘가의 어린이가 15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는 댓가로 받는 돈이 매우 적다거나, 이 돈의 이익이 전쟁의 경비로 쓰인다거나 하는 사실들을 알고 있을 때, 우리가 그런 이유로 인해 그 물건들을 소비하지 않는다면, 회사에서는 그런 소비자의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고 자신들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개선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몇 해전까지만 해도 본인은 미국계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그 회사의 CEO였던 사람이 유대인으로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받는 연봉의 일부를 이스라엘 군대에 기부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그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 그건 뿐이었다. 나는 그 브랜드의 푸른 인어 마크를 볼 때마다 팔레스타인의 어린아이들의 붉은 피를 보았고, 중동의 평화를 지키려는 다양한 사람들이 노력이 그 커피 한 잔의 연기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했고 윤리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한 유업회사의 사례는, 누군가를 살상하는데 그 비용을 댄다거나 지역의 평화를 깨트리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닐지 모르나 결국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일부의 고통을 담보로 하는 것을 당연시 받아들이게 하는, 비윤리적인 결론을 절감하고 도출해낼 수 밖에는 없다.


이런 결론이 비약과 상호 모순, 혹은 그렇다면 어디 물건을 사야하는 것인가 하는 항의 섞인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런 윤리적 소비를 하려는 사람들은 많고 그런 사람들이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기획들과 프로젝트들, 또 정부의 인증 등은 생각보다 많다. 우리가 반성해야하는 부분은, 우리가 몰랐다는 것이지,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윤리적 소비를 좀 더 확장해보자. 지난 5월 초,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에서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청와대 대변인이엇던 윤창중 전 대변인이 현지에서 채용된 여성 인턴의 엉덩이를 '터치' 혹은 '그랩'하는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언론에 윤 전 대변인이 어떤 대처를 하고 있는지 전혀 보도가 되고 있지 않으므로 그 경과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윤 전 대변인의 행위는 우리가, 이 시점에서 왜 '윤리적 소비'를 언급해야 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왜 실패하게 되었는지, 역시,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인민)이 주인이 되어 국가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테네의 도시국가처럼 규모가 작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를 맞추기 위해 '대의' 민주주의라는 것을 우리 사회는 수용해왔다. 이런 대의민주주의를 정치 제도로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국민 한 명 한 명이 '유권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유권자라는 말은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국가를 원하고 어떤 정부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 우리는 윤리적 소비를 해야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인사가 윤창중 전 대변인의 인선이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대변인을 맡아 온 윤 전 대변인은 청와대 입성은 어려울 것으로 여러 정치평론가들이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예고된 참사'라는 것이 윤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의 결론이었지만, 우리 유권자이자 소비자는 여기서 논의를 접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역시 하나의 소비체이고, 우리가 그것의 선택을 책임지는 소비자라고 한다면 윤창중을 인선한 현 정부에 대해서 '윤리적 소비'를 하지 못하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현 정부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순다수 대표제에서 단 한표라도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선출되는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정통성을 가진 정부의 대표자이고 국가의 수반이다. 하지만 이런 정통성은 우리가 그들의 신민(臣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소비자로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인선에 대한 비판과 사후 동일한 실수나 정책적 오류에 대해서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윤리적 소비는, 자주 할 수 있는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선거는 매일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과자를 사먹듯, 우유를 사먹듯, 오늘 이것을 먹지 않으면 내일 저것을 먹지 라고 가볍게 소비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민주주의, 즉 국가체제에서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윤리적 소비의 주체로서 우리가 선택하고 또 그 정당성을 부여한 국가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서 명민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비윤리적 유통망을 갖고 있는 우유 회사의 우유를 사먹는 것은 중간 유통상인들의 고통만을 유발할 수 있겠지만, 지속적인 실수를 일으키거나 국가의 위신까지도,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정부를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앞으로는 미래 세대에게 너무나 많은 부담과 절망을 안겨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윤 전 대변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 역시 소비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윤리적 소비를 해야한다" 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한 명의 실수로 왜곡되었고, 언론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우리는 또, 사회는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각골난망하며 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이런 것들의 근간에는 결국 우리가 '윤리적 소비'라는 것, 이 다섯 글자가 과연 우리의 삶 속에 어느 부분까지 관여할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야만 하며 그 책임에 대해서 통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적 소비를 해야한다. 충분한 의미에서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관심이라도 가져야 한다. 자신'만'의 효용 혹은 행복을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이, 상품의 소비에서 시작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우리 모든 국민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데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이 윤리적 소비의 시작과 끝일 수 있다. 


3.

일련의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상품의 소비 뿐만이 아닌, 민주주의 국가를 구성하는 유권자로서의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시 수긍과 인정, 그리고 굴복으로 점철된 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