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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6.12.30 "관심"
  2. 2016.05.23 "잘가"
  3. 2016.04.21 길어도 괜찮아
  4. 2015.04.12 나에게 바란다 _2
  5. 2015.04.02 오늘한시_39
  6. 2015.04.02 오늘한시_38
  7. 2015.03.29 현우의500자_116
  8. 2015.03.01 오늘한시_6
  9. 2014.10.04 "짝사랑 전문가"
  10. 2014.08.14 시선
2016. 12. 30. 18:18 내 생각

“관심”  20161223


고속버스 안, 창가에 앉으신 어머니와 복도에 앉은 작은 아들. 오론도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을 향해 가고 있는 모자를 쓰지 않은 모자. 시내를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창 밖에 산과 들이 보인다. 한국은 참 산도 많다 싶다는 생각이 또 다시 스쳤다. 그때, 어머니께서 내가 모르는 나무의 이름을 나지막이 외치시며 창 밖의 언덕에 손가락을 가리키신다.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차리기도 전에 언덕은 버스 뒤로 사라져갔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 묻자, 그건 어떤 나무이며 이 계절에 꽃을 피운다고 설명해주신다. 그리고 또 이어 무슨 꽃인지를 가리키시는데 이번에는 제법 먼 산에 핀 꽃들이다. 산이 멀어 나도 그 꽃이 어떤 꽃인지 드디어 알아보곤 어머니의 설명을 듣는다. 이어 또 다른 나무, 꽃, 잎의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나는 어머니가 신기해졌다. 어떻게 저 많은 꽃들과 나무들을 알고 계실까.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께서는 어릴 적부터 꽃과 나무를 보며 자라오셨을 것이다. 그것을 애써 외우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 그저 그것들에 관심을 갖고 이름이 무얼까 궁금해하시며 외삼촌이나 이모들에게 물어 알게 되셨으리라. 나에겐 그저 많고 많은 산이었던 것이 어머니께는 꽃나무가 있고, 열매를 선물해주는 고마운 나무가 모인 학교였다. 


그렇게 관심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사소한 관심이란 없다. 거대한 관심도 없듯이.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소중히 생각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어느 하나 허투루 보이는 법이란 없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나하나 알게 되고, 그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간다. 관심이란, 큰 힘을 갖고 있지는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한 명의 사람에게 또는 하나의 사물에게 그 사람/그것 만의 이야기를 심어주고, 또 그것으로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다시 우리에게 선물해주는 듯 하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문구가 담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 틀린 말은 아니나, 사랑보다 먼저 갖게 되는 것은 관심이 아닐까. 그것이 비록 사랑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하여도. 뭐, 현대인들은 관심 가진 게 너무 많아 탈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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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3. 02:51 카테고리 없음
"잘가"

어제 들어온 친구와 간신히 하루를 보냈을 뿐이다. 어느 바다에서 왔는지, 차에 실려 오는 동안 어지럽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어머니가 그립지는 않은지. 몇 가지의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것을 기록이라도 하듯 내 짧은 기억력 속에 담아두려했다. 하지만 이내 곧 잊어버리고 다시 몇 가지 질문을 반복했다. 내 반복된 질문이 귀찮아질만도 했는데 새로운 친구는, 질문 하나하나에 성실히 대답해준다. 내가 질문을 잊은 것 같으면 내게 다시 질문을 하라며 다그치기 까지 한다. 그 친구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넓은 몸이 횟감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살아있음을 내 질문을 통해서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주인 아저씨가 뜰채를 들고 와 내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 새로운 친구를 잡으려 하면, 이리저리 피하면서 "나는 남해에서 왔어!! 내 이름은 광어야!!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너의 삶이 부러워!!" 외치며 뜰채에 실려 나간다. 파닥파닥. 몇 번 파닥이다 횟칼에 목이 잘리고는, 부끄러운 속살이 사람들이 먹기 좋게 잘려 내 머리 위 창가로 보이는 사람들의 테이블에 놓였다. 핏기 하나 없는 하얀 몸은 이름 한 글자 적혀 있지 않았고, 고작 '자연산'이나 '양식' 정도의 분류만 허락되었다. 내 헤어짐에 눈물을 흘려도 물 속에 있는 탓에 보이지도 않았다. 매번 잊지만 또 매번 헤어질 때 생각하지만, 다음에는 수조를 떠나가는 친구들에게 꼭 외쳐주고 싶다. "잘가."

---

집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으로 돌아들어오려 하면 횟집이 하나 있다. 그 횟집은 특이하게도 수조들 중 한 칸에 금붕어를 키우고 있다. 오며 가며 보는 길에 횟감 생선들은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채워지기도 하지만 금붕어는 여전한 모습이다. 먹지 못하는 금붕어를 먹을 수 있는 광어나 멍게 등 해산물 사이에 키우는 주인의 생각은 알지 못하지만, 금붕어와 (대표적인 횟감인) 광어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오갈까 궁금해졌다. 그걸 글로 표현해보았다.

---

사랑 속에 태어나, 사랑 속에 살다, 사랑 속에 죽는다. 나는 이 표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힘들면서도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태도이자 노력이라 믿는다. 최근 우리 사회는 그 무엇보다 '사랑 속에 죽는다'라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이 되었다. 높은 자살률 뿐만 아니라 빈곤사 그리고 타인에 의한 살인까지. 죽음을 맞이하기 전의 사랑이 불가능했다면, 죽음 이후의 사랑이 담긴 애도와 재발 방지가 필요할 것이다.

---

분리된 수조 속의 금붕어와 광어는, 분리되어 있기에 서로의 죽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람은 다르다.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시기에 산다. 자신이 사랑 속에 살고 죽고자 한다면 타인의 삶도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고 개선시키려 해야 한다. 그게 사람다운 일이다. 사랑다운 일이다.

---

강남역 인근에서 돌아가신 분의 애도와 사랑 속에 삶을 마감짓지 못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잘가. 잘가세요.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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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1. 00:14 내 생각

길어도 괜찮아.”

 

페이스북을 시작한 것은, 2009년 일본에 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페이스북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꽤 많은 친구들이 가입을 했고, 서로의 일상과 가벼운 인사를 담벼락에 남기는 도구로서 좋은 도구라 여겨졌다. 당시의 페이스북은 지금의 페이스북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면은 훨씬 조잡했고 채팅 기능은 있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렇게 광고가 많지 않았다.

 

벌써 7년 째 페이스북을 하고 있다.

 

뭔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한 서비스를 사용한다는게 놀랍기도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나에게 있어 약 1년 반 전부터 페이스북 사용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특별한 변화는 아닐지 모르지만, 페이스북에 어머니께서 가입을 하신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몇 해 전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셨으면서도 페이스북은 하시지 않으셨다. 아마 하시는 방법을 모르셨을 것이다. 1년 반 전 고향에 내려간 김에 어머니의 스마트폰에 페이스북을 깔아드렸다. 집에 노트북도 한 대 내려보내드렸는데, 노트북보다는 폰이 쓰시기 편하실 듯 했다.

 

그리고 나는 페이스북에서 더욱착한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가입하시기 전에는, 술을 마신 뒤 다소 우울한 내용이나 특정한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글을 마구 싸적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가입 이후, 나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불편해졌을까? 답답해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물리적 거리가 먼 어머니와 더욱 심리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글을 적을 때에도 읽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적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통해 어머니께서는 페이스북을 하시면서, 작은 아들이 서울에서 어떻게 하며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보실 수 있게 되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아실 수 있게 되었다. 또 작은 아들의 글을 꼭 읽으시며 응원의 한 마디나 농담 한 마디까지 던져주시게 되었다.

 

그리고 또 나는, 내 글의 팬을 얻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적은 글은 꼭 읽으신다 하셨다.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시곤 나에게 어머니의 생각을 말씀해주신다. ‘정말 좋은 글이다.’ ‘이번 글은 좀 이해가 잘 안된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시며 내게 조언해주신다. 어머니는 내 글의 팬이다.

 

얼마 전, A4 용지 두 장 분량의 글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어머니께서 그 글을 다 읽으셨다며, 이야기를 이으셨다. “매일 올라오는 너의 글이 갑자기 올라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게 된다.”하신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글을 매일 적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기다리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말씀 이으시며, “글이 길어서 읽기 힘들지만, 끝까지 다 읽을테니 계속 글 적어줘.” 내가 되묻는다. 글이 길어요? 그럼 좀 짧게 적을까요? 어머니 대답하시길,

 

길어도 괜찮아.”

 

되도록 길게 적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가끔 길어지면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 글 역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머니께서는 괜찮다 하신다. 길어도 읽어주시는 마음이 고맙고 또 한편으로 미안하다.

 

페이스북을 한 지 7. 지금은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훔쳐볼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꽤 멀리 살고 있는 나의 가족에게 혹은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누군가 나의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2016, 32살의 권현우라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목소리가 되었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 기쁘다. 읽어주셔서 고맙다. 누구보다 어머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들은 오늘도 하루 열심히 살았고, 내일도 오늘 보다 나은 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할겁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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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2. 01:29 내 생각

내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데
왜 굳이 남이 좋아하길 신경썼던 것일까.

그리고 나를 정말 좋아해 주는 사람들은 
굳이 그 마음 표현하지 않아도 내가 느낄 수 있었는데
왜 그걸 표현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일까.

걸어가다, 달리고 싶을 때 달리다, 춤 추고 싶을 때 추다, 
쉬고 싶을 때 쉬다, 배고플 때 뭐 먹으면서 가다가 나보다 더 굶주린 
사람 있으면 같이 먹고, 외로운 사람 만나면 안아주고 하며 살면 되지 뭐.

언제나 내 걸음 내 보폭으로 나아가길, ‪#‎나에게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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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2. 22:18 오늘한시

‪#‎오늘한시‬ _39


- 꽃신(花靴)


꽃신 벗어 손에 든다


버선이라도 
신었으면 좋으련만
밟히는 것 죄다 
발에 박힌다 
그러메 
신 신을 줄 모른다


손에 든 꽃신 이내 
가슴에 품는다


가슴에 품은 꽃신
앳된 향 풍기며 
신을 든 여인에게 
마음 떠오르게 한다


이 꽃신 어떻소 
마음에 드오



마음에 듭니다


꽃신 하나 가진 것 
나라 가진 듯 하여 여인
왕이 된 듯 
언제보다 밝고 높다


누구 만나러 간다는 말 듣고
다녀오세요 
한 마디 보내고 
뒤돌아 웃던 그 모습 
잊지 못하고


신지 않던 꽃신 신고 
찾아 나선 그 길
돌아오는 길


비가 내려
젖을까 저어되어 
꽃신 벗어 
걸어오는 한 여인


꽃신은 변치 않아요 
저도 변치 않아요


그대 미워 않을게요


비에 하늘에 원망 담아 
꽃신 가슴에 품고 올려다 본 
하늘 아래 
우산 뚫고
두 강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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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2. 22:17 오늘한시

‪#‎오늘한시‬ _38


애절애(哀絶愛)



한 사내 나무를 뽑는다


삼각삽 푸욱 흙에 쑤셔 넣어 
발로 그 대가리 쳐밟고서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게 
그의 무게 싣는다 
손잡이 배에 걸치곤 아래 눌러 
들어 올린 흙 위 
나무 뿌리 허옇게 드러난다 
알싸한 흙향 사내의 코 끝에
물방울 맺게 하고


기껏 키운 나무다 
척박한 땅 일구어 키워낸 나무다 
열매를 맺기 전 더 뿌리가 깊게 박히기 전 
캐 버리는 사내 손 부들바들 
삽 끝 흙 위 생채기 난 나무 뿌리에서 
붉은 수액 흐른다


품을 수 없는 것 키워봐야 뭐할거냐 
세울 수 없는 것 일으켜봐야 뭐할거냐 
높다리 자란 모습 볼 수 없을 바에야 
자라다 자라다 같은 모습 될 바에야 
뿌리 채 뽑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잘라버린다 그 것 
잘라버린다 그 아이사랑형제자매 모두


토막내 잘라버린 나무 두고
돌아가는 사내
많은 사람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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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29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6


소풍날이다. 머리맡에 잠들기 전 싸놓은 가방에는 과자가 가득했고, 음료수는 시원하도록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온 뒤 부엌으로 향했다. 가게 뒷편에 집이 있었고 겉보기에는 현대식 빌딩이었음에도 부엌은 묘하게 재래식 부엌의 느낌을 풍겼다. 어두운 부엌 조명 아래서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일어났나. 어머니께서는 김밥을 싸고 계신다. 눈을 부비며 김밥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마주 앉는다. 대발에 김과 조미된 밥을 놓고 고명이 들어가자 어느새 김밥이 되어 나온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슥슥 썰어 나의 입에 하나를 쏙 넣어주신다. 어머니께서는 김밥의 꼭다리를 드시며, 큰 일 할 사람은 이런 거 먹으면 안된다 하신다. 김밥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생님께 드릴 것 그리고 혹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를 위한 것까지 준비하시는 어머니. 깨소금 흩뿌린 김밥 도시락은 나의 자랑이자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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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1. 09:34 오늘한시

‪#‎오늘한시‬ _6


마음에 써 내려가는 시
첫 줄을 적는다


시가 될까 마는 
가사가 될까 마는


그것도 아니면 
소설이 될까 마는


이야기가 담기는 그 어디라도 
종이를 준비해야


외로운 남녀 
입 모아 사랑 외치는


들리는 이 많지 않은데


누구 한 명 들을까 하여
귓엣말 외쳐본다


이미 쓰여진 시 
그대는 읽어주기만 해 달라


그 입으로 
내 시와 사랑을 읽어달라


- 소개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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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4. 02:19 카테고리 없음

"짝사랑 전문가"  2014.10.04.


'전문가'라는 호칭을 받는 데에 있어 얼마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모르나, 나는 분명 '짝사랑' 분야에 있어서 이미 전문가의 수준을 넘었다. 태초에 짝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처럼 짝사랑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개척해나가고 있는 본인을 볼 때면 때론 대견스럽기 까지 하다.


첫 짝사랑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당시 매우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이 첫 감정을 감히 '짝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그 여학생만을 생각해왔다는 걸 보면, '사랑'의 필수 조건인 '헌신'이 비추어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거의 매주 그 여학생의 집에 전화를 걸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할머니가 받는 통에 어느 시점에 가선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렀다. 가끔 할머니께 그 여학생에게 전화를 바꾸어 달라고 말하고선 그 여학생이 전화를 받으면 놀래 끊곤 했던 그 볼바안간 소년은 어디갔을까. 그 여학생의 집 앞에 있는 공중전화에 가서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라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아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마음은 참으로 순수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사를 갔었고 나는 결국 할머니와의 친분을 첫 '짝사랑'의 추억으로 남기게 되었다.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짝사랑이 얼마나 단편적인 것인지 또 그 마음이 얼마나 순수했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바라지 않고 단지 좋았던 그 마음이 내 사춘기의 초반을 형성했다. 성인이 되어서 고향의 길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그때의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오히려 나를 피한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에 지금은 우정이라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고등학교 때는 오토바이에 빠져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매주말마다 라이딩을 나가서 바다와 대화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1학년 생일이 지나자마자 원동기 면허를 땄고 붉은 오토바이를 타고 마산의 해변을 달리곤 했었다. 생각해보니 이 때에도 한 명 있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문학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이 문학동아리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던 친구의 누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던 동아리였고 별 다른 생각없이 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이 동아리는 마산의 다른 여고와 연합동아리였다. 내가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주말마다 여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하거나 방학 때는 '모꼬지'를 가는 등의 일정이 있었다. 이 때 내가 좋아했던 소녀는 중학교 당시부터 알던 소녀였다. 매일 밤마다 집에 있던 무선전화기를 몰래 내 방으로 들고 와 밤 늦은 시간에 1시간에서 2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았었는지 통화는 언제나 길었고 즐거웠다. 고백을 해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고백은 실패로 돌아갔고, 어느 날 동아리 다른 친구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백하던 날 나를 먼저 집으로 보내려 했던 그 여학생은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뒷모습 보이기 싫다. 먼저 가라.'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어쨌든 시간이 지나 동아리 친구들과 다같이 만났을 때 고등학교 동기 친구가 소녀의 귓불을 쥐어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소녀는 지금 결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때 당시 사귀던 친구와는 다른 사람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대학에 들어왔고,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는 실로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유행하던 'MSN 메신져'로 고백을 했다가 다시 메신저로 차이기도 하고, 노래를 잘부르던 동기를 좋아했다가 다른 친구와 그녀가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인연은 인연이군' 하며 꽤나 어른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해가 지난 후 들어온 후배에게 사랑이라기 보다 관심을 보여 먼거리를 오가기도 했고, 돈이 필요하다던 그에게 돈을 붙여주기 위해 목돈을 마련해보기도 했다. 물론 돈은 보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다시 대학에 들어온 이후에는 짝사랑이라기보다 편한 사랑의 시작이라 생각했던 만남,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불편했던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기도 했고, 하루를 사귀었다가 다음날 '이건 아닌거 같다'라는 이야기를 들어 차이기도 했다. 참으로 다양한 짝사랑을 해보았다.


그러다가 또 한 명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아마 2010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짝사랑은 그 어느때보다 성숙했던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도 결과는 '짝사랑'인 슬픈 결말이지만 당시는 그런 예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날 고향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이리저리 빠져나가는데 서울이 그리 아름다울 수 없었다. 건물 하나 자동차 하나 가로수 하나하나가 예뻤다. 그녀의 집이 있다는 북한산이 저 멀리 보이는 듯 하여 혼자 피식 웃기도 하였다. 항상 나에겐 어색했던 서울이, 그녀가 살고 있다는 이유로 서울이 그리 가깝고 아름다워 보이긴 처음이었다. 고백은 하였지만 당시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고 지금까지 사귀고 있다. 그녀에게 주기위해 처음 만난 날부터 고백을 하기 전날의 순간까지의 내 기억 모두를 담은 편지는 전해주지 못했다.


이 길고 긴 짝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얻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짝사랑 전문가'라는 칭호이고 또 하나는 한 가지 결론이다. 그 결론은 간단하다. "내가 좋아할 정도의 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그녀를 좋아한다." 이것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는 대상의 특징이 특이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닌 탓에, 누구나 관심있게 바라보면 매력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그 대상들은 나를 택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아니라면 나는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짝사랑 전문가로서 지금도 누군가 짝사랑을 하고 있다면 이렇게 충고해주고 싶다. 고백을 해야하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그 어느 때에 고백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공하지 못한다. 매 순간을 지금으로 만들던지 아니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한 가지 충고 더.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자신을 더욱 가치있게 한다. 한없이 어둡고 비관적인 세상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좋아한는 감정을 가지는 한 빛을 찾을 수 있다.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추는 밝은 빛이 될지 아니면 잠시 반짝이는 별똥별이 될지는 본인에게 달렸다. 밝은 빛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감정 자체만으로도, 짝사랑만으로도 세상을 살만한 곳이 된다. 그러니 짝사랑이라도 하자. 매우, 짝사랑 전문가로서 우수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p.s

위에 언급된 짝사랑이 전부는 아니다. 몇 사례, 아니 몇 십 사례는 생략되었음을 알려드린다. 

인류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가치는 사랑이 아니던가.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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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4. 03:14 카테고리 없음

시선 2014.8.14. 


글을 시작하기 전에..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2년 간 하던 공부에서 실패를 한 후 방안에 쳐박혀서 책만 죽어라 읽던 시절이 있었다.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경우는 더이상 읽을 책이 없는 경우와 먹을 것이 떨어진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친구의 부질 없는 전화를 받았을 경우였다. 친구는 하루 한 번씩 전화를 해서 아무말 없이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기를 기다렸다.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화를 건 친구의 성의를 봐서 '살아있다' 라고 짧게 대답을 한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럼 다시 전화가 왔다. 전화가 와서는 집 앞에 와있으니 당장 나오라는 것이다.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친구가 고시원 입구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만나기 위해 왔다며 어슬렁거리고 있는 친구에게 돌아가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친구의 시간은 내 시간보다 소중해 보였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별 말없이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으러 가서는 애써 공부와 관련없는 이야기들을 쏟아 내곤 했다. 친구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마치 '신'이 된다며, 다른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우습게 넘겨버리고, 오직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인 것인양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정치 이야기를 할 때 내가 가장 생기가 돈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친구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가끔 내게 정치 이야기를 묻곤 한다. 나는, 처음에는 내게 정치 이야기를 시킴으로써 내가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친구의 농락에 놀아나기 싫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어느 샌가 몇 술갈의 밥이 내 입에 들어가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친구의 잘못을 꾸짖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는 그렇게 욕을 먹고 또 밥값을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는 그렇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친구는 지금도 가끔 전화를 건다. 어찌나 내 삶에는 친구의 전화가 필요한 순간이 많은지, 이 친구는 시기가 지날 때마다, 마치 여름만 되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내가 어떤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전화를 걸어 내 생사를 확인하곤 했다. 이렇게 적고 있으면 내가 마치 '예비 자살자'같이 들리곤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군가의 생각보다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죽고 싶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음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기에 죽음이 내게 주는 위안 따위는 내 고민의 자양분을 받아 먹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은 내일이 두려울 때도 있다. 내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오늘을 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듯 할 때도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언젠가 거두어들일 사과에 대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과나무든 자두나무든 심지어 땅에 심어도 나지 않을 타이어를 심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주어진 오늘을 살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의미로 밖에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런 시절도 다 지나고 내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이 이제는 다소 줄어든 것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터라 우연히 지원했던 대학원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본질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밥벌이'의 문제 정도 되시겠다. 다시 고민에 휩싸인 나에게 친구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했고 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집 밖을 나가는 것을 극히 줄이기 시작했다. 친구는 이제 집을 찾아오지는 않고 내가 살고 있는 번화가 주변에 와서 이렇게 전화를 하곤 한다. '커피나 한 잔 하자' 그리고선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고 간다. 다행히 지금은 집에 쌀이 있다. 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쌀이 있으니 내심 뿌듯함 마저도 느껴진다. 이렇게 적고 있으니 헤어나올 수 없는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실상 행복에 겨워있다고 표현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큰 행복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처럼 사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은 사소한 계절의 변화에도, 하늘에서 비가 내려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또 내가 어제 적은 것처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함을 느낀다. 행복이라는 것이 크지 않으니 쉽게 행복은 채워질 수 있고, 쉽게 채워질 수 있으니 더욱 잘 쌓인다. 그렇게 쌓인 행복으로 나는 무엇을 하는고 하니 이렇게 글을 쓰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실은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지만, 이야기들을 하고 다니거나 좋은 기회나 좋은 사람을 찾아 다니곤 한다. 글을 쓰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읽는다'는 행위에 있어 지나친 수동성에 다소 질린 면도 없지 않아 좀 더 적극적인 행위를 해보고자, 쓰게 된 것이다. 작년 이맘때와 지금의 나는 달라진 듯 하다. 어떻게,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답을 찾아과는 과정에 있어 작년보다는 올해 더욱 단단한 마음과 깨끗하지는 못할지언정 더욱 넓어진 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여전히 변함없이 나에게 힘보다는 비난을 주고, 격려보다는 비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히 느끼게 된다. 가족의 가치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태양은 수소 가스를 불꽃으로 만들며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죽기 전에 태양이 먼저 사라지는 일은 없을테지만 태양 역시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나의 가족이 나에게 주는 사랑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으며 그것의 영원성을 내가 '영원히' 믿을 수 있기에 굳이 가족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딱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부모님의 노화를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직 해드리지 못한 것들이 많다. 사랑은 영원할 지언정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세는 무심하게도 한 살 두 살이 덧씌워지고 있다. 내가 삶에서 조급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빨리 성공하지 못하거나 결혼하지 못하거나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것에서 조급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얼굴에 다시는 펴지지 않는 주름이 생기는 것을 막지 못한 조급함이요, 기력이 없음을 토로하는 어머니의 짧은 탄식 한 마디를 막지 못한 조급함이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밥을 아무리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있어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시간을 바꾸지 못하면 그 시간을 더욱 소중히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몸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함께 할 수 있는 방이 있다면 나는 그 방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단 두 층. 가족의 방과 내 방. 언제나 내가 갈 수 있는 그곳으로 가기 위하여 더욱 지금 있는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밖에 없다.

밤이 늦었고,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노트북 옆에는 담배와 책이 쌓여 있다. 하나는 정신을 해치고, 또 하나는 정신을 살린다. 균형을 잡아보려 해도 균형 잡는 것이 쉽지 않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있음'으로 인해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해야하는 것 중 하나가 글쓰기이다. 



글을 시작하며..


레이져에 질량이 있는지 물리학과 재료공학 등을 전공하는 다양한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친구들의 대답은 '모르겠다' 였고, 또 다른 친구들은 '레이져에 질량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측정할 수 있을 만큼 큰 질량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듯 하다'는 애매한 대답을 남겼다. 다른 일부의 친구들은 '없다'라고 단정지었다. 극단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조건임에 틀림이 없다. 


뜬금없이 레이져의 이야기, 그것도 레이져의 질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레이져에 질량이 있다면 높은 고층 건물이나 건물 안의 천장과 같이 우리가 손을 닿아 거리를 잴 수 없는 것들에 레이져를 쏨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량 손실을 계산하여 높이나 넓이를 계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거짓말이다. 레이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으면, 여기다 적지 않고 공대 교수들에게 메일을 보냈겠지.


레이져에 질량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오늘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시선에도 질량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안구(눈알) 질량 말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시선 말이다, 시선.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에도 질량이 있다는 증거는 많다. 심지어 누구나 실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가령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바로 앞의 사람의 뒷통수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어 보라. 그럼 분명 누군가는 뒤를 돌아 보게 된다. 당신이 째려보고 있든 그냥 멍하니 보고 있든 관계없이 당신이 지켜보는 사람은 당신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실패한 사람은 카페나 도서관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명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어보라. 그럼 당신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당신을 보지 않는 척 하면서, 당신을 흘끔흘끔 처다본다. 어떻게 그 사람들은 당신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까.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분명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그런 시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고 그 결과가 싸움이든 사랑이든 어떤 형태로든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과학적이면서 비과학적이고 상식적이면서 비상식적인 분석이 필요할 듯하여, 나는 시선에도 질량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한 곳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떤 남자 한 명이 나를 보고 있다.(혹시 몰라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남자다. 이 블로그를 적고 있는 사람은 남자다. 그리고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왜 쳐다보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 시선에 질량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했고 그 남자에게 속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 내가 집에 가서 글을 쓸 거리를 던져주었다는 것도 있지만, 항상 시선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에 질량이 있다는 다른 증거가 필요한 순간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가 대표인 증거의 하나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쳐다보면 서로의 눈동자를 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눈동자가 아니라 시선의 질량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시선의 질량을 교환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눈에 시선을 보내면 그 시선에 맞게 동등한 양의 시선을 다시 다른 눈동자로 보내게 된다. 이런 시선에는 색깔이 있어 '당신을 좋아합니다' 라는 의미를 담은 핑크색 시선이 있기도 하고, 심하게 다툰 연인의 경우에는 '당신이 싫어'라는 의미를 담은 검은 색 시선이 있기도 하다. 이 시선의 질량과 색깔을 확인할 수 있는 몸의 기관은 바로 '맹점'이다. 맹점은 빛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조직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선의 질량을 재기도 하고, 또 그것의 색깔을 알 수도 있다. 어라? 맹점이 시선의 질량을 잰다고 한다면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 중 하나이다. 빛을 받아들이는 맹점은 앞으로 들어오는 빛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시선의 질량을 받아들일 때에는 앞뒤옆 가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생각한 이론이 무너질 수 있으니 이렇게라도 우겨야겠다. 맹점이 시선을 느끼고 그 시선이 가지고 있는 질량 뿐만 아니라 색깔을 느낀다는 것은 많은 실험의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화나 영화에서 표현되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 사이의 하트 뿅뿅이라던지,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불꽃 등으로 이미 많이 표현되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시선의 질량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것이 가진 색깔이나 형태에만 집중을 해왔던 것이다. 


시선은 질량을 가지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증거는 또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그들의 직업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시선이 가진 질량 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시선을 받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연예인 혹은 유명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시선 질량 계산기'와 '시선 질량 저장용기'를 타고나거나 혹은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만들기도 하고 키우기도 한다. 때때로 일부 사람들은 시선 질량 계산기와 질량 저장용기를 갑자기 엎어버리는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성공한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은 이 도구들을 잘 관리하고 더욱 크게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한다. 선천적으로 강한 질량 계산기와 큰 질량 저장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정치인, 유명인 혹은 연예인이 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평생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갈구하며 살게 된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사람을 '애정결핍'이라 부르기도 하고, '관심병자'라는 현대적 용어를 사용해 사람들의 관심 즉, 시선을 갈구하는 사람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시선의 질량은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두 무색 즉 아무런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시선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또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시선에는 일정한 색깔이 입혀지게 된다. 앞서 설명했던 대로 사랑을 할 때는 핑크빛이 또는 갈등을 할 때는 검은 빛을 띠기도 하지만 이런 색깔은 일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평소 시선의 색깔이 정해진다. 삶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만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시선이 어둡다. 그리고 그 시선의 질량 역시도 매우 기분 나쁜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반대로 밝은 생각과 타인에 대한 믿음 혹은 희망을 주고자 하는 사람은 그 시선의 빛이 밝다. 간혹 어두어 질 때도 있겠지만 다시 그 빛깔을 찾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무서운 이야기일 수 있다.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시선의 질량이 전해지는 형태도 다르고, 그 색깔도 다르게 된다고 하니 지금 나의 시선은 어떤 색깔인지 어떤 형태로 남에게 전해지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었을 때 몰려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개인의 몫이다. 시선의 색깔과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기나 어린 아이들과 만나면 된다. 


아기나 어린 아이들이 여러분의 눈을 보고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살펴본다면 여러분이 어떤 시선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진단법은 결코 당신이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실험 방법이 아니다. 아기나 어린 아이들 역시도 외모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좋아한다는 실험결과와는 별개로 여러분이 아이의 눈만을 보고, 아이 역시도 편안한 상태에서 여러분의 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면 외모와는 관련없이 여러분 시선의 형태와 색깔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선. 


시선은 질량이 있을지도 모른다. 실컷 질량이 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어 놓고선 '있을지도 모른다'니.. 하지만 엄밀한 실험을 통해서 확인되지 않은 것을 사실인양 말하는 정도는 이미 충분하 내가 즐거울 만큼 거짓말을 했으니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러분들이 나의 글을 읽고 "진짜 시선이 질량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한 번 직접 실험해보시는 건 어떨까 한다.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하지 않아도 여러분과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혹은 지나가는 아무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서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여러분의 시선의 질량(형태)와 색깔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이 좋은 반응인지를 굳이 말해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글을 마치고 나서.. 


위의 '글을 시작하기 전에...'를 지울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밝히지 않아야 할 점도 아니고 과거의 내 모습에 있어 내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나와의 대화에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 이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기록일 수 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나와의 대화를 내가 원했을 때 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은 '좋아서' 적는 것이다. 글을 적고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웃어주거나 또는 한 번 즈음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들을 던져주는 것이 나는 참 좋다. 그래서 적는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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