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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8. 00:14 내 생각

행복하셨는지 물어볼 수 있다면”  20161208

 

시간 여행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건 미래의 거대한 기계보다 때론 지금의 한 장 사진이 더욱 그 효과가 클 때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갖고 있지도 않은 사진이지만,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며 어머니와의 시간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의자에 앉으신 채 형과 나를 다리 위에 한 명씩 올려놓고 또 안고 계셨습니다. 사진 속에는 세 명 모두 웃는 얼굴입니다. 어머니와 형과 나. 가장 환하게 웃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긴 파마 머리에 스웨터를 입고 계신 어머니. 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니면 바깥의 추운 날씨와 집안의 따뜻한 기온 차이 탓인지 얼굴은 붉어져 있습니다. 저는 3살 남짓 되었을까요. 몇 개 있지도 않은 치아를 빼꼼 보이며 역시 붉은 양볼 사이 수줍게 웃고 있습니다. 형도 특유의 귀여움을 잔뜩 품고 웃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의 웃음이 밝고 환했습니다. 장롱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계신 어머니. 사진은 누군가 앉아서 찍은 듯 아래에서 위로 찍힌 모습이지만, 웃음과 행복을 담기에 적절치 못한 각도란 없습니다. 그 어머니의 웃음이 지금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느 덧 저는 사진 속의 어머니와 비슷하거나 많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시간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행복과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울에 오기 전이나 고향에 방문할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어머니의 이야기라곤 했지만 특정한 어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결혼으로, 느끼게 된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는 분명 제가 기억하는 저 사진이 찍힌 당시도 포함될 것입니다.

 

저는 슬펐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제가 어머니의 행복을 빼앗아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건 아닌지 슬퍼졌습니다. 젊고 활력이 넘치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이나 추억 속에서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서글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저 역시도 이렇게 사진 속의 어머니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농담 삼아 말하곤 합니다.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가 없어져도 좋으니, 시간을 되돌려 결혼은 하지 말라 농담 삼아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 어머니가 저의 어머니여서 좋습니다. 살아가며 힘든 사이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모습. 전 그 모습이 좋습니다. 그래서 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제 기억 속에 있는 저 사진 속의 어머니께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럼 어머니는 대답하시겠지요. 힘들지만 행복합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 사고를 치거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 아이들의 아버지인 남편이 나를 힘들게 할 수 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들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수많은 힘든 일 사이에서도 저는 지금 웃을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도 있는 불행이 있겠죠. 그렇지만 그때에도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에게는 제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전 행복했던 기억으로 그리고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머니. 어느덧 작은 아들도 나이 서른을 넘기고 이제 서른셋이 되기까지도 시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합니다. 행복을 기억합니다. 어머니와 행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대합니다. 행복을 기대합니다. 어머니와의 행복을 기대합니다. 어머니께서도 기억하고 계실지 모를 사진 한 장에, 작은 아들은 오늘 가볍게 시간 여행을 했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저와 친구가 될 법한 나이의 어머니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둘도 없을 웃음을 지으시며 저와 형을 안은 채 대답하셨습니다.

 

행복합니다.

 

제 글이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보내셨을 어머니께 잠시나마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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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31. 19:52 내 생각

“행복하기 위해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말


‘언제나’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끔’ 들으면 참 틀린 말이라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도의 문제’라는 것이 있다.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돈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주거와 의료, 교육이 대표적인 그 정도를 결정짓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당장의 혹은 다음 달의 생계가 걱정인 사람이나 급하게 병원비가 필요한 사람에게, 돈에 행복을 연계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만큼 돈은 반드시 필요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살기에 충분한 돈을 갖고 있는 사람 혹은 그만한 돈을 갖고 있는 부모를 두거나 그런 돈을 벌 수 있는 사람들은, 돈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발화를 멈추어주면 참 고마운 일인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을 갖고자 하는 것을 보고 억척스럽다거나 삶에 여유가 없다거나 말한다.


충분한 돈을 가져본 적이라도 있어야, 돈이 행복의 절대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텐데 많은 서민들은 그런 경험을 해볼 수가 없다.


그렇기에 ‘돈이 행복에 있어서의 주요 가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과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혹시 아주 가난해서 내일 먹을 음식이 없는 사람 중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이는 정신병증에 불과하다.


‘소소한 삶 속에서 사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요.’ 라는 말. 소소한 삶이란 어떤 삶일까? 다음 달 월세나 식비가 걱정되는 삶은 소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완전한 만족까지는 아니라도 자신의 건강을 지키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거주공간을 갖추어야 할 것이며,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어야, ‘소소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인데 이거,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부자가 되는 삶을 바라는 것도 모든 사람이 생계 걱정에 허우적대는 사회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따위 소리를 그만두고, 필수재적인 성격을 갖는 주택이나 의료, 교육 등에 대한 지원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돈 많은 사람’은 왜 찾기 힘든 것일까.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도, 월세가 떨어져 보증금이 올라 전세금이 올라 쫓겨날 걱정 없이 거주할 수 있는 주거환경이 필요할 것이며 가족 중 누군가가 병에 걸리거나 치료가 필요할 때 그것이 미래의 삶 전체를 흔들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받고 발휘할 수 있는 직업 환경 등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은 반드시 행복에는 돈이 드는 법이다.


누구라도 노력해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이런 글 적지도 않았다. 가난에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지원이 필요하다. 그 지원은 결코 누군가의 것을 뺏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포용력이 높은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자신의 지질함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 사회에서, 오늘도 목소리 한 구절을 지질하게 보탠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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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8. 00:47 내 생각

"티 없는 순수함"

 

20대 초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고백했다. 단 한 번 만난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몇 해를 걸쳐 만난 사람에게도 그랬다.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기보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 속 어딘가가 아팠다. 마음은 결코 물질이 아니라는 말이 거짓이라 확신했던 순간들이 이어졌다.

 

어찌 보면 고백을 남발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단 한 번의 고백에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적은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진심의 순간을 빨리 느낀 것 뿐이었다. 확신에 찼던 내 감정과 진심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버렸지만, '고백하지 말걸' 이라는 후회는 결코 들지 않았다.

 

30대가 되어, 사랑 고백에 대한 달콤한 이야기로 회상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10 여 년 전 감정들에 섞인 이물질을- 당시에는 보지 못한- 지금에서야 확실히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물질.

 

그 이물질은, 내가 고백했던 대상들에 대한 무한한 이상화였다. 이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적이 없기를 바랬고 슬픈 영화를 보아도 그 슬픔이 마음에 남아있지 않기를 바랬다. 힘든 일을 마주함에 있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굳건한 마음이 언제나 있길 바랬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이물질이었다. 그리고 앞선 잘못된 생각과 함께 가장 내 마음에 큰 이물질로 남았던 것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아무리 깨끗한 옷을 입고 있어도, 손을 깨끗이 씻어도 나와의 관계나 감정으로 인해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생각은 흔한 말인 자괴감과는 달랐다. ‘상처받기 싫어라는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 동시에 나의 단점을 이 사람이 알게 되면 안되는데.’ 하는 불안함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래서 차일 때, 안도감이 들었다.

 

누군가 또 한 명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과 나 역시 상처로부터 지켜졌다는 생각이었다. 틀린 생각이었고, 이물질이었다. 이 세상 누구도 티 없는 순수함을 갖고 있거나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순수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겪어야했던 어려움과 느껴야했던 상처들을 품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 당연한 사실들을 품어내고 보살피고 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그 상처를 그대로 두면서도 더욱 넓은 마음으로 상처를 작은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 실수를 저질렀던 이들은 실수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지 않으려는 고난한 노력을 해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라는 큰 틀 속에 고이 담아두었던 것이다.

 

사람을 만나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의 색깔은 검지 않고 어두웠다. 새까만 것이 아니라 회색과 하얀색도 섞여보였다. 다양한 색을 띠고 있는 얼굴과 옷, 신발에 이어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지만 그림자에도 밝음은 보였고, 그림자는 있다가도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은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람은 없다.

 

내 결론이다. 자신의 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이왕 때가 묻었으니 더욱 때를 묻히며 살자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상처를 가졌음에도 혹은 자신의 마음이나 성격, 태도 등에 부정적인 것이 있음에도 그것 또한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어두운 면을 보이고 싶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보이게 된 어두운 면을 미안해 하지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자신이 결코 하찮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냥 좋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있다. ‘티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티 없이 사람이 되려하기 보다 티 있어도 그 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 상대방의 티를 품어내는 사람, 더욱 많은 티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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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1. 17:07 내 생각

"아픈 이유"


어릴적부터 생일이 있는 4월이 되면 이유 없이 아픈 날이 있었다. 고열과 기침 그리고 어지럼을 동반한 아픔이었고, 그런 날이면 밤새 어머니는 내 옆에 앉으신 채 내 이마에 찬 수건을 올려주셨다. 아침이 되어 병원을 가면 의사선생님은 감기 몸살이라며 몇 일 분의 약을 처방해주셨고, 나는 그것을 생애 마지막 약인양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몇 일이 지나면 씻은 듯 나았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오늘(2016년 4월 10일) 시점, 이제 3일 동안 지속된 4월의 아픔에서 슬며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먹은 약에 수면제 성분이 있는지 지금 사실 좀 헤롱헤롱하기도 하고 멍하기도 하다. 하지만 무언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앉았다.


4월의 아픔에는, 이유가 있을까.


몇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환절기의 감기일수도 있고 한국의 학제상 3월에 시작한 새로운 학기에서 느낀 긴장이 4월이 되어 풀린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4월에 있는 내 생일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태어나며 아팠다는 어머니의 말씀. 낳을 때도 역아여서 목숨을 한 번 놓칠 뻔 했고, 태어나고 나서도 황달을 지난 흑달의 병세 탓에 병원에 다시 입원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몸에 남아 있는 듯 하다.


'태어남을 기억하라.'


몇 해 전 적은 글에,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메멘토 모리'가 아닌, 태어남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세로'라는 말을 만든 적이 있다. 라틴어 타동사인 'sero'는 타의에 의해 태어나다 라는 뜻을 품고 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결코 자동사가 될 수 없다. 누군가로부터 생명을 받아 태어난 존재. 그러니 태어남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누군가의 의지로부터 태어났다는 것과 가능하다면 그 태어남이 사랑으로 이뤄져 있기를 바랄는 마음을 기억하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내가 4월이 되면 아픈 이유는, 그런 탓이다. 4월의 봄꽃 피고 날 따뜻한 날, 나의 삶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를 내 몸은 아픔으로써 그것을 나에게 일깨워주는 듯 하다. 태어남을 기억해야겠다. 그것도 두 번으로 나눠어서 말이다. 4월 11일은 음력 3월 5일. 가족이 챙기는 내 생일이고, 4월 24일은 가족을 제외한 사람이 챙기는 내 생일이다. 두 번의 생일. 축하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났다는 것,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누구나 태어났다. 태어남을 기억하라. 사랑 속에 태어났을 그 때를 기억하라. 죽음은 태어남 이후의 일이니 우선 태어남 부터 확실히 기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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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1. 17:05 내 생각

"반가운 불행"


사람들이 행복하지만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불행을 통해 타인의 불행에 공감할 수 있었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면,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함께 먹고 싶은 사랑하는 가족이 없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불행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라면, '전쟁 때문에 가정 형편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상황 때문에' 서로 함께 있지 못한다면 불행일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사람은 불행을 느낄 필요가 있다. 불행을 통해 공감할 수 있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람은 자신이 아닌 사람을 통해 성장해나갈 수 있다.


반가운 불행.


많은 사람은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을지라도 가끔은 불행했으면 했다. 불행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타인의 불행으로까지 확장시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가운 불행의 끝은 영원한 불행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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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 17:00 내 생각
"내 걱정"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는 저 문장은 읽는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닮아있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것은, 어떤 불행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읽어보면 설핏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요즘과 같이 행복한 가정이나 불행한 가정 모두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또는 불행한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여러 도구들이 있는 시대에는 말이다.

행복한 가정의 닮은 모습이란 아래와 같지 않을까.

자녀와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자하기까지 한 부모. 각자의 공간이 있는 충분한 넓이의 집. 여름과 겨울에 떠나는 휴가. 건강하고 자신의 삶을 관조할 줄 아는 할아버지, 할머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꿈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자녀 혹은 꿈을 찾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활기차게 하고 있는 자녀. 끊어지지 않는 가족 간의 웃음과 대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기란 참으로 쉽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의 마음 속에 어떤 이상처럼 그 모습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이란, 결코.

상상하기 조차 싫다.

하지만 그 상상 속의 어떤 일이나 사건들은 각자의 의지와 다르게 일어난다. 또 누군가는 지금도 그 불행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모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살고 있다.

행복한 가정에서도 불행한 사건들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각 가정에는 다르게 나타난다.

아마도.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의 차이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이나 경제력의 상실, 삶에의 의지 박약 등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함에도 그것을 가족이 같이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닐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이 아닌 한 개인이라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접하고 해결함에 있어 그것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감히 '행복'한 상황이라 불러도 될 듯 하다.

고등학교 시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이 있었다.

"너희는 그냥 너희 앞날을 위해서 공부만 하면 되는데, 왜 공부를 하지 않니?"

선생님들의 이런 말들을 듣다보면, 한편으로 참 다행이다 싶고 또 한 편으로는 어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다행이다' 싶은 것은, 나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선생님이 어릴 적 자기 걱정만 할 수 있었던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위 말하는' 안정감 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에 다행이라 느꼈다. 또 한 편 느끼는 것, 어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질문이 드는 이유는, 나보다 최소 10년 이상을 더 산 사람들이 그 사이에 타인의 -그것이 비록 학생일지라도- 고민이나 고통에 대해서 저다지도 공감을 할 수 없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어른이면 누구나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통해 이해심이 넓을 것이라 여겼던 내가 '어렸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네 걱정만 해라.'

라는 말에는, 결국 부모의 배려와 학교를 포함한 사회의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고민하고 걱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릴 적에는 부모의 배려가 필요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사회가 갖추고 있는 제도나 시스템이 필요하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뉴스 한 꼭지나 신문 한 장만 들추어보아도 불운한 사건을 당한 사람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말문이 막힌다.

부모의 배려가 무엇인지, 사회의 제도나 시스템이 어떤 구조인지는 모르겠다.

부모가 된 사람도-부모가 될 사람도- 제대로 알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각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가치가 부딪히는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을 위한 어떤 제도가 필요한지가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결국 '배 부르고 등 따뜻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조건만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내 걱정만 하고 싶다. 길게 적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내 걱정만 하고 싶다. 내 행복을 위한 걱정과 고민과 탐색과 시도를 하고 싶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 역시도 행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내가 되고 싶다.

그런 사회를 바란다는 것 만으로도, 톨스토이의 저 위대한 한 문장.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장에 대해 "톨스토이 할아버지, 틀렸습니다. 훗!" 하고 콧방귀를 뀌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내 걱정만 하고 싶다. 나만 내 걱정을 하는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걱정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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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28. 19:21 내 생각

"마음 둘 곳"


사람은 살면서 두 가지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듯 하다. 하나는, 마음 둘 곳을 찾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


마음 둘 곳을 찾는 것이란 별거 아닌 듯 하지만 꽤 어렵다. 가족이 있어도 그 안에서 편한 마음이란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 필요하고, 또 서로 배려를 하지 않으면 너무 가깝기에 쉽게 불편한 곳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연애란,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만나 '내 마음 둘 사람'을 만나는 과정인 듯 하다. 그 결론이 가족이 됐든 그저 스처지나가는 인연이 되었든 연애를 하는 중에는 다행히 마음 둘 곳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역시, 배려는 필요하다.


마음 둘 곳이 꼭 가족이나 연인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내 마음이 편한 어딘가는 있다. 그 대상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또 때에 따라 혼자 있을 때도 있는 법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은 뭘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굳이 철학적인 어떤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 속에 산다. 주변 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하는 걱정은, 태어나자 마자 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이것은 결과보다 항상 과정이 중요한 노력이다.


누구에게나 마음 둘 곳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면 좋겠지만 사람은 다들 좋아하는 것이 다르니 이 역시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가지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될 듯 하다. 좋은 사람이 되어 마음 둘 곳에서 편암함을 느끼는 것, 이것이 어찌 보면 행복의 가장 쉬운 공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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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31. 18:01 내 생각

행복하세요?”

 

나 뿐만 아니다. 내 옆사람 뿐만 아니라,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느끼고자 하는 것을 헌법에 명시해놓고 있을 정도다.

 

헌법 제10,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하지만, 때론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은 사뭇 불편하게 다가온다. ‘행복하다라 대답하기에는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과 생계유지를 위한 돈벌이가 떠오르고, ‘행복하지 않다라고 대답하기에도 나를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과 여행을 가서 느꼈던 기분 좋았던 추억들이 입가의 미소와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묘답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 답이란 바로, 행복할 때도 있고 행복하지 않을 때도 있다, 가 그것이다. 너무 싱거운 대답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언제나 행복할 수도 없고, 또 쉬지 않고 불행할 수도 없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는 그날 따라 인력거를 타겠다는 사람이 많았기에 행복했던 김 첨지가, 집으로 돌아가자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한 이후 불행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덤덤하기에 그지없는 문체에는 행복과 불행이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문자 그대로의 행복추구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행복의 비중을 늘리고 불행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누구를 만날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를 우선 명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이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가진 병폐의 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행복이라는 것이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을 가고, 쉽게 먹지 못하는 것을 먹는 행위가 되어 버린 탓이다.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비교하도록 강요당하는 이상, 자신의 행복은 상대적으로 불행한 것으로 쉽게 여겨진다. ‘행복의 절대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이런 상황은, “내가 느끼는 기분 좋음은, 행복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저런 멋진 것들이 행복의 조건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절대적인행복을 전제해버린 탓에 자신의 소소하거나 일상적 행복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넓은 숲을 가진 사람과 조그마한 텃밭을 가진 사람을 비교하면 넓은 숲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듯 보이지만, 조그마한 텃밭에서 기르는 작물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숲 따위 어찌됐든 좋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중을 늘리기 위한 첫단추로써, 타인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감정이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기분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대부분의 사람은 앞서 언급했던 대로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성인기를 맞이한다. 오로지 공부만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학창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었더라도 또 다시 설정된 외부의 목표에 의해, 행복 따위 느낄 겨를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이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용기에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뒤따른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신이 무엇에 기분 좋음을 느끼는지를 성공한다면 하나의 행복을 찾은 것이겠지만, 실패할 수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다음 시도에 있서 첫 시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도에 임할 수 있다.

 

이런 수많은 시도들을 통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나 익숙해진 습관이 형성된다면 그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으려고 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느낀다.

 

용기라고 적었다고, 지레 겁먹거나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지는 마시라.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도 느끼는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 나 이거 하니까 행복하네.’라고 느끼려는 시도와 노력으로도 용기는 생기기 마련이다. 용기란, 맹자에 따르면 누구나 갖고 있지만 발현하지 못한 그 어떤 성분에 지나지 않으니 한 번 속는 셈치고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행복을 느끼는 법에 대해 장황하게 적었지만, 정작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듯 보이는 불행을 줄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은 같다. 불행을 줄이는 방법 역시 같다고? 그렇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때에 불행을 느끼는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우선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불편하거나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꾸역꾸역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만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불행을 피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면 또라이상사나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가족 등을 만나며 살고 있다. 아니, 살아야 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퇴사를 하거나 가출을 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하면, 퇴사를 하고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신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테니, 현실적인 불행의 비중을 줄이는 방법을 알려주려한다.

 




불행과 불편을 구분하는 것.

 

불행과 불편을 구분한다면 또라이직장상사와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는가족으로부터 불행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불편은, 존재를 부정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것 혹은 그 사람이 내 주변에 있기에 느끼는 짜증남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을 때, 발이 아프다고 느낀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단지 불편함을 느낄 뿐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편함을 불행으로 느낀다. 직장상사의 잔소리와 감정적 대응을 듣는 것은 분명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들었다고 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행과 불편을 구분 짓는 것만으로,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가족의 잔소리와 상사의 핀잔은 불편하지만 그것이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내 삶의 근간을 흔든다면 그것은 결국 불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편과 불행을 구분지어야 하는 이유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주는 대상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서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사의 감정적 대응에 대해, ‘과장님, 그런 발언은 저를 불편하게 만듭니다.’라고 대응한다면 상사는 되려 화를 낼 것이지만, 어떤 것이 불편하지를 되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과장님, 그런 발언은 저를 불행하게 만듭니다.’라 대응하면 상사는 어떻게 대답할까? 모르긴 몰라도, ‘그래서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행복과 불행은, 삶의 근간을 이루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받는 것이고, 불행과 불편을 구분하며 불편을 해소하고 불행의 가능성 자체를 줄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불행을 줄이는 방법에는 또 다른 것이 있는데,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많은 것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것이다. 불행을 느끼는 바탕에는,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어.”라는 일종의 포기가 내포되어 있다. 자신의 노력이나 시도를 통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은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력의 정도를 높이더라도 그것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불행을 줄이는 하나의 방법이다. 앞서 언급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시도나 해외에서 일어나는 각종 이슈에 대해서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등은 분명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발생하는 테러에 대해서 무관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픔에 공감하되 나도 저기서 죽을 수도 있었겠다하는 불필요한 감정이입이나 세상은 정의롭지 않아라고 단정지어버리는 등의 태도는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행복을 늘리기 위해 살고 있고 불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장 적확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루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대답이라 생각한다. 또 대부분의 시간이란 행복도 불행도 아닌, 기억에도 남지 않는 일상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행복의 절대성을 버리고, 자신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의 요소를 찾아야 한다. 또 불편을 불행으로 손쉽게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의지와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과의 과감한 관계 끊기가 가능하다면, ‘추구할가치가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나날들이었지만, 오늘은 행복을 많이 느꼈다며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지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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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2. 01:28 내 생각

완벽한 행복함이란 없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동시에 우리의 감정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행복을 더 많이 느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불행을 더 많이 느낀다.

행복과 불행이 정확히 50 : 50 의 비율로 있다 하더라도, 행복을 많이 느끼는 사람은 90의 행복과 10의 불행을 느끼고 또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

무엇을 어떤 비율로 느끼는 지는 각 개인의 성향, 처해 있는 환경,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따라 다르다.

우리의 삶에서 완벽한 행복이 없듯이 완벽한 불행도 없다. 다만 일부러 불행을 느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 두 가지 모두 마음껏 늘려가보는 삶을 살 길, 행복에 겸손하고 불행에 의연해지길, ‪#‎나에게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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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7. 01:48 내 생각

"정규직 애가(哀歌)" 2014.11.27.


취업을 하겠다며 휴학 신청 사유란에 '취업', 딱 두 글자만 홀연히 던져놓고 '신청'을 눌렀다. 신청을 하고 나서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나 내가 원했던 '취업''미취업'으로 바뀌었고, 오히려 미취업이라기 보다 '취업 안해!'라는 어리광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어색하지는 않다.

취업이라 적긴 하였지만, 내가 ''하고자 했던 직''은 애석하게도 그리고 부끄럽게도 정규직이었다. 직업이 정규직이라니. 그렇다. 직업이 정규직인 것은 어느 회사든 똑같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회사 내부의 생활 뿐만 아니라 비슷한 외모로 변해가고 비슷한 취미를 갖게 되는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몇몇 사람은 자신이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원했던 직업을 갖기 위해 학부 생활 틈틈히 인정 받을 수 있는 '스펙'을 쌓아나갔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눈에 들어오는 회사 모두에 자신의 소설 작성 능력을 펼쳐보이고 있었다. '이 많은 회사 중 하나라도 들어가자'라는 첫 마음은 '이 많은 회사 중 어느 하나도' 나를 뽑아주지 않는다는 슬픈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는 인사 담당자의 메일을 받게 되기도 했다.

왜 우리는 정규직이 되고자 할까. 정규직이 되어야만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으레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나 2년제를 나왔든 고등학교를 졸업했든, 모든 사람은 정규직에 대한 회귀 본능이라도 유전자에 탑재되어 있는 것일까?

정규직의 가장 큰 특징을 살펴보면 우리가 왜 정규직이 되어야만 하는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첫번째 특징은 '고용 안정성 확보'. 쉽게 말해 안 잘린다는 것이다. 잘리지는 않지만 잘리지 않기 위한 노력을 결코 쉬이 해서는 안되는 불운을 타고 나기도 했지만, 정규직은 어쨌든 잘리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해고'라는 표현을 '목을 자른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자르는지는 지적하지 않은 채 다만 자른다 라고만 표현하니 인권 국가 되시겠다. 잘리지 않는 가장 안정적인 직업으로 손꼽히는 직업은 공무원이 으뜸이다. 하지만 공무원 세계에서도 등급이 있어, 5급부터 9급까지 시험도 직렬도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은 쥐꼬리보다는 많이 받지만 쥐꼬리처럼 통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월급을 받아야 하며, 또 최근에는 연금과 관련하여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니. 잘리지만 않았을 뿐 그 길고 긴 생명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형국이랄까. 대기업 정규직은 공무원과는 또 다르다. 노조가 있는 곳에서는 우선 한 번의 칼 맞음은 피할 수 있다 할지라도 몇 번이고 톱으로 자르려는 그 사측의 의지를 이겨내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장점이 있으니 그 첫번째가 많은 연봉이요, 두 번째가 자신의 직업을 설명할 때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두 번째다. '연봉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끈하는 대기업 정규직이 있을 줄로 알지만, 전체 대한민국 고용에서 대기업 고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1% 전후라는 사정을 생각해서, 적당히 발끈하고 넘어가주시면 얼마나 고마울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적은 숫자이니 고통도 느끼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나머지 99%는 대기업 정규직의 월급을 받으려면 100년은 꾸준히 연봉협상을 해야할 것이니 그 수고를 좀 인정해주자는 정도의 이야기 되시겠다. 어쨌든 대기업 정규직은 자기가 큰 사고를 치거나 도저히 대기업 문화와 맞지 않거나 그것도 아니면 창업을 하겠다고 손을 걷어붙이지 않는 이상 꾸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책상은 마련되어 있다. 공무원과는 다르게 오래 앉아 있을수록 불안한 것은 옵션 되시겠다.

정규직의 두 번째 특징은, 없다. 정규직의 특징이랄 것이 '고용안정' 빼고 나면 업무의 지속성 확보, 즉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어 '일 잘한다' 소리 듣는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엄연히 고용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지 고용'당한' 입장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유일하고도 가장 큰 특징은 고용 안정, 딱 이것 뿐이다.

그럼 고용 안정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말이다. 공무원은 왜 고용 안정되어 있으면서 왜 연금액을 바꾸겠다는데 발끈하냐 이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 나갈 때가 많다.'

돈 나갈 때는 많고 들어오는 돈은 적다. 이번 달만 벌어서 다음 달 다 쓰고 죽을 운명이라면 정규직에 목 메는 사람 없을 걸. 어차피 다음달 말에 죽을건데 일도 하기 싫을 걸.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각이긴 하지만) 앞으로 몇 십년은 더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적게 들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단지 '살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더욱 돈이 필요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결혼을 앞둔 한 예비 부부가 전세집을 구하든 집을 사든 관계 없이 어쨌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다고 해보자. 부모님이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집은 모르겠으나 거의 대부분의 부모님은 자신의 노후 대책도 제대로 세우고 있으시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결국 예비 신혼 부부의 보금자리는 스스로 구할 수 밖에 없다. 30살 전후의 남녀가 몇 년간 일해서 모은 돈이 1억이 넘는 일은 없을 듯 하니(1억이 어딘가.. 1..) 어쨌든 서울에 조그만 집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대출을 해야 하는데 대출 원금은 둘째치고 이자라도 꾸준히 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대출 이자를 내는 게 1년 안에 끝난다면 1년 안에 원금을 갚았다는 말인데, 이건 금액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의 불가능. 그럼 기본이 3년이나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내 고용이 2년 뒤에 불확실하다면? 아이를 낳았는데, 유치원도 보내고 싶고 좋은 음식도 먹이고 싶은데 아이가 2살이 되던 해에 내 직업이 뿅 하고 사라진다면? 남편과 아내 모두 직업이 뿅하고 사라진다면? 40대 후반이 되어 아이가 대학을 갈 나이가 되었는데 등록금 고지서가 마치 징용장 나온 것처럼 생각되는 순간에, 내 직업이 뿅 하고 사라진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 여러 나라 비정규직 임금을 가만히 보면 말이지. 정규직 보다 훨씬 높더라 이말이지. 왜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보다 높다면 비정규직이 다른 더 연봉 높은 직업을 구하게 되면 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 일에 지장이 생기니 '돈 많이 줄테니 다른 곳 가지 마세요'라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고, 비정규직은 말 그대로 '' 정규직이니까 삶에 안정성이 약하다고 보고 돈을 많이 줘서 충분한 삶의 가치를 누리도록 하겠다는 기업과 정부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도 있더라고.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비정규직 만들 때 자유롭게 회사 옮겨가며 더 많은 돈 벌라고 한 것 같긴 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단 말이지.

. 말투가 이상해졌다. 어쨌든.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한 회사에 핵심적인 업무가 아니라는 평이 많고, '당신 말고도 여기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 많아!'라는 말이 인사담당자의 가훈처럼 머리에 박혀 있는 상태에서는 비정규직은 그냥 회사의 소모품에 불과하고 정규직은 회사나 관공서에서 매년 실시하는 '재물 조사'에 들어가는 리스트 정도에 불과하니.

정규직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도전 정신이 없다' 느니, '사람이 너무 편하게 되면 나태해진다'라느니 '젊을 때는 실패해도 된다'느니 따위의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이 그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회가 이미 되었어요. 그리고 그 돈을 매달 받지 못하고 매년 받지 못하면 우리의 삶을 유지할 수 없어요. 내일이 두려운 사람은 오늘도 집중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한테 결혼 왜 안하느냐고 묻지 마세요. 우리한테 왜 아기 안낳느냐고 묻지 마세요. 결혼이 예로부터 어른이 되는 가장 큰 일이라고 하면, 부모님께 돈 받아서 하고 싶지 않아요. 돈 안받고 우리들의 힘으로 살아가보려는데 돈을 꾸준히 못 벌면 안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서 아기 낳고 싶어요. 아기를 낳으면 돈 들잖아요. 기저귀값, 분유값 그리 비싼 줄 모르고 살다 주변에 친구들 이야기 들으면 눈물이 나더군요. 아기는 소중하잖아요. 아기는 소중하니까 엄마가 기르겠다는데 육아휴직 하면 자를 거잖아요. 탯줄로 목메고 죽으라는 건가요? 결혼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말하지 마세요. 결혼 안해도 어떻게 안되는데, 결혼하면 어떻게 된다는 건 우리에게 삶의 즐거움 보다 '책임감'만 뒤집어 씌우려는 거 뻔히 보입니다. 직업이 안정적이라서 나태해 지는 게 아닙니다. 정규직이라서 도전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통해서 각자가 바라는 이상이 있으면 그것을 이루도록 회사가 도와주면 도전 정신 생깁니다. 집에 돌아가서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기들 보면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태함'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월급 받고 그 월급으로 사람답게 살겠다는데 '실패' 따위 언급하지 마세요. 정규직이 왜 되고 싶냐구요? 왜 안정적인게 중요하냐구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요. 비정규직은 불행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복할 수 있죠. 하지만 그 행복,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고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요. 딱 그거 하나의 이유입니다.

정규직이 되지 못한 이들은 되지 못해 울고, 정규직은 정규직이 되었기에 삶의 고단함에 울고, 도대체 이 세상에 웃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지. 한 번 묻고 싶네요.

'취업''미취업'이 되어도 고민이나 좀 더 해보렵니다.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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