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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주의'를 경멸한다.

'한반도주의'를 경멸한다. 2013.6.25.



공교롭게도 글을 쓰려고 제목을 정하고, 날짜를 보니 오늘이 한국전쟁 발발일이다. 새벽에 시작되었다는 공격에 1950년 6월 25일에 곤히 잠들어 있었을 순국선열의 많은 목숨이 스러져갔다. 순국선열의 희생에 애도와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한반도 너머'를 적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주의'라 이름 붙인 사조에 대한 비판을 한 번 신나게 적어보고자 한다. 



내가 정한 '한반도주의'란, 간단히 이야기하면, 우리의 생각과 정신의 영토를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사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미 한국 사회에 퍼져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하나의 '주의'로서 표현코자 한다. 



나는 왜 한반도주의를 경멸하는가. 그 이유는, 역사를 거슬러 63년 전의 오늘로 돌아갈 필요가 있겠으나, 짧게 이야기하면 결국 '남북 분단'이다. 지금 이 글을 적는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UN군 산하 미군이 그어놓은 NLL(Northern Limit Line) 즉 북방한계선에 대한 공방이 한창이다. 이런 공방들이 있는 것 역시 그 근원은 한반도의 분단에 있다고 본다. 분단되지 않았다면 보이지도 않는 선을 가지고 국내 정치세력들이 갑론을박할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고, 국가의 위신을 떨어트려가며 정상간의 대화록 발췌본을 국가의 정보를 담당하는 기관이 공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단이 가져온, '한반도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이는 분단 이후 한반도 사회 내, 특히 남한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에 큰 변화를 야기시켰다. 그 변화의 정점(頂點)은, 우리가 한반도가 대륙과 연결된 곳이며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된 곳으로 생각하는 지정학(geopolitics)의 한계를 내면화한 것이다.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 앞 문장은 누구나 알고 있는 문장이다. 단 한 번이라도 세계지도를 펼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걸어서 대륙에 나아갈 수 없다. 이는 북한이라는 정부 혹은 집단이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 북쪽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고자 했던 존재연과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존재필연의 관계를 굳이 여기서 언급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런 대륙과의 단절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를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고 가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저 멀리 유럽이든 어디든지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다른 나라로 여행, 이민 등 거주 이동의 자유가 있다. 전두환 정부 이후, 세계 여행이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세계로의 여행과 국교 수교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국제 사회와의 연결을 도모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한반도주의는, 실질적인 국제 사회와의 연결을 무마하는, 우리의 내면에 깊숙이 스며 있는, 문제의 모든 것을 한반도 내에서 해결하고자 하고 또 한반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반도주의가 초래한 것이, 국가주의라고 하겠다.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팅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오고, 박태환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오지 못하는 것이 마치 국가의 위신이 높아지는 것 마냥 행동하고, 또 받아오지 못한다면 국가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생각들이 국가주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적 사례에서 보면, 한 중학생이 자신이 영재교육원을 다니는데, 자신이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이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일을 하겠다는 것을 당당히 밝힌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학생은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었던 것이고 아주 당차고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국가를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봉사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서슬퍼런 칼날을 든 국가가 배신하지 않도록 뒤에서 감시하고 있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왜 그 학생은, 우리나라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인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개발하겠다고 하진 않았을까. 왜 김연아나 박태환 선수는 스포츠를 즐기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정한 한계를 뛰어넘어, 지구 위에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인류가 이토록 아름다운 몸짓으로 스케이트를 탈 수 있고, 물 속에서 이렇게도 빠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감격하지 않았을까. 



한반도주의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한국이 모든 것의 전제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싸이라는 한 가수가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를 가지고 미국 사회를 강타한 것은, 우리가 좁은 한반도에 살면서도 미국과 같은 대륙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는데 자조해야 하는 것이며, K-POP이 지구를 휩쓰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지만 결국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자긍심을 고취시켜야 하는것일까. 

싸이가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그것의 확장성을 가지게 된 계기는, 결국 미국의 한 동영상 사이트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고, 케이팝(K-POP)이 전세계인의 마음을 사로 잡는 과정에서, 실제 수익을 얻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가수들이 아닌 현지 법인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왜 모른척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자랑스럽고, 또 우리가 그런 기적을 이뤄낸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왜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이, 대단한 일일까.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 중에 영어를 현지인들처럼 하는 사람은 이루 말하기도 힘들 만큼 많을 것인데, 왜 우리는 그들의 영어에는 열광하지 않으면서 한국에 있는 외국인이 한국말을 잘하다면 열광하는 것일까. 결국 우리는 주인으로서 행세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작은 한반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와서, 사용하는 인구도 얼마 안되는 한국어를 써'주시는' 외국인에게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건 아니라고 본다. 



한반도주의, 경멸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작은 옷과 작은 신발을 신기고, 작은 모자를 씌운 상태에서 더 큰 몸의 크기를 갖도록 종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몸집의 크기보다 더욱 중요한 정신과 사상의 크기 역시도, 우리가 스스로 딱딱한 껍질 안에 가둔채, 딱 세계지도 내에서 한반도의 크기만큼만 생각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가혹해도 너무 가혹하고 또 우리의 자녀들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세계를 꿈꾸되 조국(祖國)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곳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위이며, 한반도다. 헌법이 정한대로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이다. 그럼에도 북한이라는 국가 혹은 집단에 가로막혀 대륙으로 가지 못한 우리의 신체적 부자유 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 우리 스스로가 포기해왔던 전지구적 상상, 전 세계적 상상을 이제는 다시 되찾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내에 세계시민교육이나 지구시민교육 과목을 넣는 등의 교육 분야에서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정치세력의 갈등에 침전되는 세계주의적 상상력을 다시 고양시킬 수 있도록, 정치인의 역량을 좀 더 높일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세계시민의 산소라고 할 수 있는 '외교' 분야에 대한 지식 없이 국내 정치의 위기 타개를 위해,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이용하려는 정치인이 공공 부문에 있는 이상, 손톱 밑 가시처럼 우리의 세계적 상상력은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일을 기념하여, 우리가 잊었던 세계인의 기상과 또 세계시민으로서의 상상력을 다시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니, 되찾아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