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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 2013.7.2 


(설마, 벌레 한 마리라는 제목을 적었다고 해서 내 상황을 비유적으로 적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물론, 없겠지만 이렇게 내가 지레 겁먹어 변명을 하는 것도 웃긴 상황이긴 하다) 


언제부턴가 내 방에 벌레 한 마리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파리나 모기보다는 그 크기가 작으나, 자신이 벌레임을 충분히 알리고도 남을 정도의 모습이다. 넓지도 않은 방임에도 벌레는 이리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벌레는 무엇을 먹고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카프카는 '변신'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가족의 한 구성원이 벌레가 되어가는 과정을 적었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벌레보다는 그 위용이 더 대단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카프카의 벌레는, 벌레지만 사람이고 사람이지만 벌레를 묘사했던 것이라면 내가 보고 있는 벌레는 나와는 다른 평범한 벌레다. 그 평범한 벌레에게는 내가 '변신'이라는 표현보다는, 차라리 '잉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벌레 한 마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내 방의 위생상태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벌레가 알을 까고, 자손을 번식할 만한 상황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벌레는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내 손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내 통장에서 얼마간의 돈을 주인집에 송금하는 형태로 이 방에 들어와 이렇게 글을 쓰고 앉아 있는데, 이 벌레는 도대체 누구와 어떤 계약을 맺고 나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살고 있을까. 벌레를 만든 것이 신이라면 이 벌레의 계약은 신과의 계약을 맺은 것일까, 아니면 신마저도 신경쓸 겨를이 없이 어쩌다보니 태어난 미물일까.  나와 함께 동거를 하고 있지만 동거인은 아니고, 굳이 따지면 동거충(蟲)쯤 되겠는데,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니 이름도 모른다. 이름을 지어주려고 해보아도 특징을 잡을 수 없고 나와의 아이컨택이 쑥쓰러운지 내 손과 눈을 피하고 있는 이 동거충은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지각 위에는 많은 벌레들이 존재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나 점잖은 학명을 가진 벌레도 있을 것이고 박멸의 대상이 되는 벌레도 있을 것이다. 이런 벌레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어떻게 확인하는 것일까. 누구의 사랑을 받으면서 짧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바퀴벌레는 공룡이 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는데, 그 근원을 따지면 인류보다 먼저 이 지구에서 살아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이 바퀴벌레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조상을 발로 뭉개고 살충제로 죽이고 있는 것이라면, 인류의 윤리는 '살상'의 윤리인 것일까. 


좁은 방 하나에, 에어컨 소리가 쉬쉬 나는 내 방 안에 이 벌레는 분주히도 내 앞과 뒤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어디에 앉으려는 목적은 보이지도 않고 공중에 계속 떠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하다. 무엇을 찾아 헤매이는 것일까. 내가 지금 자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그리고 벌레 한 마리에 관련된 글을 이렇게 길게 적고 있는 사람과 또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이 글을 읽고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내 동거충은 과연 알까. 알고 있다면 나에게 격려나 위로라도 해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는 않다. 형제인지 자매인지 부모인지 모르는 벌레 몇 마리들이 내가 마시는 물 컵 안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책상 위에 자신의 존재를 나에게 마치 알리려는 듯 배를 드러낸 채 섹시한 자세로 누워있는 벌레를 보거나 하면 이들은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고, 위로를 할 마음조차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한 마리에서 시작한 이 글을 끝맺는데 많은 생각과 표현을 찾아내고 또 써야 한다. 예의 없는 것들에게 예의를 들여 쓰는 글은, 과연 벌레만큼이나 가치가 있을까.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면, 이왕이면 다음 문단도 읽어달라. 


'벌레 한 마리'에 대해서 적고 싶지 않았다. 벌레 한 마리가 어찌되었든, 나는 곤충학자가 아니고 벌레로 인해 큰 병을 앓거나 한 적도 없다. 벌레 한 마리를 글의 제목으로 잡고, 글의 주제로 잡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게되는 생각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생각이 있을 수 있고, 학생에게는 배움에 대한 생각, 가족 내 구성원들에게 가지는 애정의 생각 등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생각들은 우리가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는 없도록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너무나 지엽적이고 또 부차적이고 심지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각들을 하는 시간들이 너무나 많아져버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생각하지 않고, 어제와 오늘이 같은 상황,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서도 하는 이야기라고는, 굳이 만나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소모하고 있다. 그런 생각들이 벌레와 무엇이 다르며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생각들은 어디서 왔고 이름은 무엇이며 무엇을 섭취해야먄 그런 생각들이 유지될 수 있는가. 벌레 한 마리라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글을 써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이것이 자유인양 이것이 사회인양 이것이 권리인양 생각해버리는 것은 우리가 벌레가 되는, '변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중요한 문제들이 수없이 많이 있음에도 오늘 아침 무엇을 먹을지가 중요해지고, 담배를 무엇을 필지를 고민하는 그 상황에서 우리는 결국 벌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사소한 문제에 빠져,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들을 내뱉고 생각을 곱씹어보면서 인간이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인권, 이것이 필요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권이라는 것은 인간다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니, 오호 통재라.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