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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살짝

눈길을 살짝 2013.7.9 


여름이 되니, 자연스럽게 여자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옷이라는 것이, 중세 혹은 근대의 의미인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이거나, 더 이전 고대에서의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거나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가리기 위한 의미를 넘은지는 오래인 듯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헐벗은 채로 살던 중,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치부를 가리게 된 것이 '옷'의 계기라고 하기에도 현대적 의미의 옷과는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듯 하다. 


옷차림이 가벼워 지는 것에 한계가 있는 남자들은 옷보다는 옷 안의 몸에 더욱 신경을 쓴다. 깡마른 몸매보다는 어느 정도 근육질의 몸매가 보기 좋은 것은, 고대 올림픽의 동상에서 나타나는 남자의 아름다움을 보면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하지만 몸을 단련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는 반면, 여성의 옷차림은 그 한계가 없어 보이기까지 하다. 


길에서 만나는 헐벗은 여성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그리고 내가 눈길을 보낸 것에 스스로 민망해 다시 빠른 속도로 눈을 다른 곳으로 향한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닐지라도, 드러내놓고 보기에는 민망함과 쑥스러움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여자들이 여름이든 겨울이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님에도, 남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계속 같은 패션을 유지할까?


아닐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김정운 교수는, 그의 한 칼럼에서 한국 여자들에게 '왜 노출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대답들 중 일부는 '자신이 만족하기에' 그렇게 입는다고 했지만,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기 만족'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에서 느껴지는 '자기 과시'가 더욱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나는 '자기과시'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눈길 한번 주세요. 


'눈길'이라는 표현은 매우 가치중립적인 표현이다. 아직 성적(性的)으로 오염되지 않은 단어라는 말이다. 본인도 이 글을 통해서 '눈길'에 어떠한 성적인 의도를 담을 생각은 없다. 오히려 '성'을 넘어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관심'이라는 것을 '눈길'로서 표현하고 싶다. 여자의 노출로 나타나는 '관심', 그리고 멋진 정장을 빼입은 남자, 비싼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오렌지족 등이 원하는 '관심', 그것의 필요조건은 '눈길'인 것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이 바라는 것을 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의 의견에 완벽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행동하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거나, 심지어 걸음을 걸을 때조차 우리는 다른 사람의 욕망 혹은 관심에 일정 부분 기대어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늘씬한 다리를 보여주는 핫 팬츠, 가슴이 훤히 보이는 듯한 탱크탑이나, 오히려 숨겨져 있기에 더욱 자극도가 높아지는 스키니진이나 롱 원피스 같은 경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눈길을 준다. 남자들만 눈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눈길을 준다. 이런 눈길들을 받는 사람은 눈길을 받는 것을 짐짓 모르는 채 행동하지만, 사실은 거의 모든 눈길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타자의 관심을 욕망하는 우리 인간들은, 공기가 없이 못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길 없이도 제대로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진단을 나는  내려보고 싶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눈길은 관심이라 생각한다. 눈길을 주고 받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의 의미가 상대를 애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일 수 있고, 저 옷은, 저 가방은 어디서 산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관심일 수 있다. 모든 관심을 포괄하는 것이 우선 눈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눈길을 주는 것보다는 눈길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한다. '눈길 한번 주세요' 라고 자신의 이마나 옷에 적어놓고 살 수는 없으니 자신의 패션이나 얼굴, 차 등을 통해서 눈길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눈길을 받는 그 순간, 자신은 다른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무에게도 눈길을 받지 않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눈길을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사람은, 눈길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가족으로부터도 눈길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눈길을 준다. 거울을 보면서 가장 눈길을 많이 주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길을 걷다 보면, '눈길 한번 주세요' 라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여름이 되면 특히 그 소리들이 소음이 될 정도로 많이 들린다. 일일이 눈길을 주기에는 내 눈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있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내 눈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줄 수 있기에, 눈을 감기보다 귀를 막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눈길을 살짝, 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관심이다. 관심을 주고 받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판단해보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만 눈길을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화성인 바이러스'에 나올 정도로 심한 노출을 하거나, 과장된 화장 혹은 특이한 분장을 하게 된다. 이런 모습들은 다른 사람들의 귀과 눈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들은 더욱 관심에 굶주려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안쓰럽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잘못된 '눈길' 하나를 지적하고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외모적으로 특이하거나 인종이 우리나라 내에서 소수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장애인이나 쉽게 접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신기하다'거나 '불편해보인다' 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눈길을 준다. 이런 눈길을 주는 것 자체는 악의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눈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악의로 받아들이거나 불편함으로 느낀다. 눈길 그리고 관심이 인간이 원한 것이라고는 할지라도 보호받아야 하거나, 위치만 바뀌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곰곰히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받는 상처의 크기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길에도 윤리가 있고, 방식이 있겠지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눈길, 즉 관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관심에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바탕이 되기를 바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