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히 맑은 물은 없다. 2013.7.11.
절대선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 파랑새를 찾으려는 모험과 같이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것을 찾아 헤매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인 선을 지향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숭고한 행위라고 생각까지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또는 자신과는 다른 계급의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해버리는 경향까지 있다. 절대선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평판까지 거는 것일까.
완벽히 착한 사람은 없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단 한번도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부처는 결혼을 한 이후, 자신의 부인과 자식을 내버려둔 채 수행을 떠났고, 예수는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자초했고, 그 결과 자신의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소크라테스는 대표적인 악처라고 불리는 크산티페에게는, 더이상 무능할 수 없고 또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남편으로 기억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버린 소크라테스를 크산티페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공자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지만 어느 한 곳 정착하지 못하고 중국 전역을 주유하면서 많은 왕들을 깨우치긴 했지만, 모든 왕들이 그의 말에 감사를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인들이 이러할 진대, 우리가 완벽히 착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성인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면 단지 '지향함'으로서 자위를 하는 것일까.
도림천을 이리 저리 걷다보면, 천 내에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보인다. 무슨 종(種)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손가락 정도의 크기에 큰 눈을 가지고 있고, 자세히 보아야 보일 정도로 흙의 색깔과 유사한 색을 띤 물고기다. 가끔 물 위로 튀어올르기도 하여서, 도림천이 죽은 하천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몸짓이 가히 절박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물고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만약에 이 물이 완벽히 맑은 물이었다면 이 물고기들이 살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한다.
세상에는 완벽히 맑은 물이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물은 사람이 마시거나 동물 혹은 식물이 그것을 섭취한다면 생명을 다하고 만다. 증류수라는 것인데, 그 물 속에는 그 어떤 이물질도 들어가지 있지 않고, 분자 구조에 따라 수소 2개와 산소 하나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것을 마신다는 것은, 화학식을 마시는 것과 같다. 이런 물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그 순수한 물의 결정체를 마시지 않고, 애써 미네랄이든지 탄산이든지 그것도 아니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세균들이 들어가 있는 물을 마신다. 그리고 물고기는 '더러워' 보이는 물 속에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또 생명을 유지하며 그리고 다시 자신의 세대를 그 물 속에서 이어간다. 완벽히 맑은 물이 있음에도 우리는 왜 오염되고, 여러가지가 뒤섞인 물을 마시는 것일까.
완벽히 착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완벽히 맑은 물은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 우리가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가질 수 밖에 없고, 또 가져야만 했던 여러가지 신체적 장애나 정신적 장애, 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불화 요소들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우리는 결코 그것들을 부정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은 고매한 척, 심지어 가족간의 불화에 있어서도 자신의 책임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존경하지는 못한다. 삶에서도 그러한데 역경을 이겨내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역경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은 절대선을 추구하고 있으니 절대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마치 절대악인 양 대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대우를 받는 사람도 그럴 이유가 없고, 그런 대접을 하는 사람도 그럴 자격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착할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것은 '누구나'이기 때문에, 일종의 진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들 중 착한 행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은 사람, 그리고 과거에 실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정중히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씩이라도 이 사회는 나아지고 있고 인류는, '발전'이라는 단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나쁜 행위를 하고서도 자신이 나쁜 행위를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다시 그런 잘못을 반복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게 역사의 가르침이긴 하지만, 간혹 가다가 그런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부러워하거나 후세에 분명 고통을 받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편하자고 하는 것이지 그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완벽히 맑은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물은 실험실에서만 존재하지 우리 실생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착한 사람만 존재하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 영역에서도, 사회의 각 영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완벽히 착한 사람을 찾는 것을 포기하자는 것이 이 글의 주제라면 주제겠다. 절대선을 지향하는 정치인은 사기꾼일 확률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시행착오라는 것은 완벽함 이후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벽함을 추구하는 행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정치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겪는 모든 행위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행위가 아니라, 동굴 속에 비쳐보이는 그림자와 같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많은 불순물이 들어있어 마시게 되면 사람은 마시면 안되는 물이 하나 있어 소개를 하고자 한다. 마시면 안되는 물이긴 하지만 우리 지구상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바닷물이 그것이다. 마실 수 있는 강물이 마실 수 없는 바닷물로 변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젊을 때는 정의롭고 절대선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거나 어떤 계기로 인해 바닷물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우리는 지켜봐왔으므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바닷물 속에도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아이러니일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 인류의 기원을 따져올라가면 결국 우리 역시도 바다에서부터 그 시작이 있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해오고 있었던 그것과도 닿아 있어, 언제나 지금의 현 상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함을 또 다시 한번 배우게 된다.
목이 마르다. 오염된 물을 마셔야겠다. 그렇지만 오염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