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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파는 사람들

몸파는 사람들 2013.9.14.




'레 미제라블'을 읽게 된 사람들은 몇 명의 여자들이 겪는 삶에 대해서 안쓰러움을 느낀다. 그 안쓰러움이라는 것은, 시대의 숙명일 수도, 그들이 선택한 결과일 수도 있으나, 감정만은 고스란히 마음에 남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여자는 팡틴이다. 팡틴은 코제트의 어머니로서,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의 여자'가 된다.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팡틴에 대해 묘사하는 부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바로 이 '거리의 여자'가 되는 장면인데, 책을 고향집에 내려다 놓은 관계로 정확한 문장을 옮길 수는 없으나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것을 포기했다." 


이미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은 팔아버렸고, 치아 중 두 개는 그 위치를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팡틴에게는 딸의 양육을 책임지는 가족에게 보낼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신은 거리의 여자가 된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지켜야 했던 것은, 그 자신의 정조였다. 우리는 이런 여자를 매춘부나 창녀라고 부른다. 



나는 여기서, 팡틴이 느꼈던 애수나 통정을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창녀나 매춘부 혹은 몸파는 여자를 비난한다. 그 비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한 과정을 하나의 '쾌락'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이다. 이 도덕적 비난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미 직업적으로 매춘을 하는 여성이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남은 '숭고함'이나 '도덕관념'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팡틴은 그렇지 않았고, 지금 우리 시대 어느 누군가도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몸을 파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다. 그들이 가진 도덕관념이나 숭고함을 스스로 버렸다고 할 지라도 그 비난은, 사회 공동체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나름의 합의를 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몸을 팔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숭고함이나 도덕관념을 잘 유지하고 있는가. 나는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끊임없이 우리들은 누군가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팔 것을 요구 받는다. 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정신을 팔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정신을 판다'라는 관용적인 표현과는 다른 의미로 '정신을 판다'는 것은 몸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버리고 다수의 생각이나, 자신이 따르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에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다. 


정신을 파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상반된 의견을 가진 교수님의 수업에 들어가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교수님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학생이 있을 수 있고, 직장 생활을 하는 회사원이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과 다른 경영 방침을 세운 부장이나 차장의 의견에, 아무런 대꾸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들의 생각에 따르기도 한다. 가정 내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권위와 경제력에 자신의 생각을 져버리기도 하고, 연인 사이에서는 '헤어짐'이 두려워 끝끝내 자신의 취향을 말하지 않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다. 


이런 경우가 '정신을 판 것'이다. 


정신을 판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신을 팔았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으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다." 


이 대답은, 정신을 팔기는 팔았지만, 이것은 장기적인 계획의 틀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 것 뿐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자신의 정신을 판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에서 빚어지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다수의 논리를 설파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정신'은 이미 팔려버린 것이다. 


몸을 파는 사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 역사와 함께 해 온 만큼 그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어쩔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마녀'가 되기도 했다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는 '하나의 직업'으로까지 변천되어 온 것을 보면, 평가의 다양화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신을 파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평가가 없었다는 것과는 모순되게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평가를 포기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정신을 파는 소리가 들린다. 


몸을 파는 사람들은, 결국 정신을 파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도덕성과 정조 관념을 돈에 팔아넘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느끼지는 않는다. 반면, 정신을 판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자신감 넘쳐 한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정신적 매춘'에 대해서는 사회가 정당화시켜 주리라는 기대가 팽배해 있고, 또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도 자신의 주변에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을 파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신을 팔지 않은 사람은 소외된다. 소외된 이후 변절자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또는 억압받거나 극단적으로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 일부를 우리나라에서는 '독립투사'라고 부르거나 '의사', '열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한때는 '지식인'이라고도 불렸다. 


팡틴은 몸을 팔아 자신의 마지막 남은 것을 포기했지만, 우리 시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처음 것'을 포기해버린다. 남아 있는 마지막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또한 정신을 팔아버린 사람들은 결국 요단강을 건너버렸지만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다리를 건설하거나 그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다시 강을 건너온다는 것은 그 시대에서 맛볼 수 있는 극단적 고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파는 사람이 몸을 파는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정리되지 않은 글을 쓰면서, 질문이 질문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