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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은 사회적 약자인가 2012.8.16.

대학생은 사회적 약자인가 2012.8.16.

 

대학생이 부럽다. 대학을 올해 2월에 졸업하고 난 뒤부터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그 어떤 공모전이며 논문대회며 대외활동에 참여를 하고 있지 못하다.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기관, 기업, 사회단체에서 하는 댜양한 활동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대학생 시절에 좀 더 많은 기회를 잡았으면 좋지 않았었을까 하는 후회도 한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누군가가 형성해 놓은 틀 내에서 열심히 그들의 열정을 소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당면한 목표인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꿈을 저당 잡히고서라도 어느 대기업에 해달라고 하는 여러 형태의 공모전이나 서포터즈를 한다. 그들이 그 곳에 가서 하는 일은 대기업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해내주기를 바라는, 철저히 비자발적인 것들을 하고 있다. 대기업의 홍보를 대행해서 해준다던지, 해외에 나가서 대기업의 로고가 박힌 옷이나 모자를 쓰고 그들이 원하는 대학생다운사진 한 장을 위해서 높은 산을 오르기도 하고 평소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단 한 번도 주제에 나온 적 없었던 세계의 어느 지역의 아동들과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도 적게 나오는 활동비를 받으며, 자기가 속해 있는 기업이 얼마만큼 대단한 기업이며 또 대학생들과의 소통과 교류에 이토록 신경을 쓰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를 위해 그들의 시간과 열정을 들이고 있다. 이런 대기업의 활동을 마치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수료증과 지금은 옆에서 같이 웃으며 있지만 결국은 경쟁자가 될 사람을 얻었다고들 한다. 수료증은 자신의 방에 있는 스펙의 증거물이 담겨 있는 파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당신의 경쟁자라는 것을 애써 숨기면서 격려칭찬을 서로의 SNS에 남긴다.

대기업과 관련해서 이렇다면 다른 정부기관이나 사회단체의 활동들은 어떤가. 정부기관이나 사회단체에서는 항상 새로운 어떤 것을 추구한다. 태생이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은 집단들인 관계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의 머리를 몇 개 모아 놓으면 자신들이 짜낼 수 있는 아이디어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돈과 권위라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그리고서 한 장의 포스터를 만든다. ‘제 몇회, 대학생 아이디어 경진대회라는 이름의 포스터는 각 대학의 학과 사무실에 배포될 것이고 그것을 본 대학생들은 상금과 그 정부기관과 단체가 가지는 권위에 그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게 된다. 최고 상금이 500만원인 곳은 꽤 큰 단체이거나 정부기관인 경우가 많다. 대학생에게 500만원이라는 돈은 분명 큰 돈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일 년에 몇 백억의 예산 집행을 하는 정부기관이나 사회적 명망가들이 만든 사회단체들에게 그 돈이 그렇게 큰 돈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제출된 모든 작품들의 판권이나 사용권을 그들이 갖는 대회를 개최해서 얻는 수많은 아이디어를 가격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그 상금과 대회를 개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정말 땡처리창고 개방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금과 기관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이용해서 진행되는 각종 행사에는 대학생들이 넘친다. 사실 상금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만 대학생들이 각종 대회에 나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 비약이다. 상금보다는 그들이 원했던 것은 그 권위일지 모른다. 그 권위를 자신의 이름 밑에 있는 빈칸에 채워 넣음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쓸모 있는 사람이며, 이러한 권위를 가진 정부기관이나 단체가 나를 인정했으니 당신도 나를 인정해달라는 말을 무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 정말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서 제출했던 아이디어들이 실제로 세상에 반영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매년 횟수를 거듭해가며 많은 대회들이 개최되고 누군가는 수상의 영예를 얻고 또 다른 누군가는 와신상담의 기회로 삼겠지만, 그 대회의 결과가 우리네 사는 세상에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결국, 대학생들의 참여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이 원했던 이미지 개선홍보의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최근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대회를 개최하는 분위기로 슬그머니 이쪽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토론의 가치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갈등하면서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좁혀나가고 좀 더 나은 대안과 좀 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그것이 어떤 주제였던 간에, 방안을 찾아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토론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토론이라는 것을 평상시에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특히나 대학생들이 토론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기성세대들이 토론대회라는 포맷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그들은 토론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시각을 원하기는 하지만 사회의 흐름에 결코 반하지 않고, 기성세대의 논리를 더욱 더 잘 뒷받침해 줄 그들의 괴벨스를 찾아내 발굴하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다. 지금 혹시 텔레비전이 있다면 대학생들의 토론을 평가하고 그들의 탈락을 결정짓는 사람의 연령을 확인해보라.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은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해 오던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평가 받으면서 일희일비하고 있다. 이런 질문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우리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우리가 우리를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좋은 질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 대답은 그렇다 이다. 우리가 우리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이며 또 심사의 공정성에 큰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저에는 대학생 스스로 대학생에 대한 믿음과 실력에 대한 회의가 있어서는 아닌가.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를 평가하면 아무 말 없이 수긍하고 받아들이겠지만, 나와 같은 대학생이 나를 평가한다는 것은, 우선 기분이 나쁘고, 뛰어나 보이지도 않고 이룩한 성과도 없는 사람에게 내 미래를 평가받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금 한국 대학생들의 집단 이기주의가 발현한다.

2003년인가 2004년부터 지금까지 대학가에서 많이 회자되던 말 중 하나가 패밀리라는 말이다. ‘저 아이는 우리 패밀리 아니니까’ ‘너는 우리 패밀리니까라는 말을 하나둘씩 하기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자 대학 내에서, 과 내에서, 동아리 내에서 패밀리 문화는 하나의 안정망으로 자리 잡았고 그 결과 어떤 형태로든 패밀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자신의 취미를 바꿔야 했고 하기 싫은 다른 사람의 욕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패밀리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아웃사이더라며 또 다른 이름의 패밀리라고 그들을 명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대학생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패밀리문화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결코 연대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던 대기업에 종속된 대학생들의 대외활동, 정부기관가 사회단체에서 제시하는 틀 내에서 우리가 헐값에 내놓아야 했던 아이디어, 그리고 토론대회에 나가서도 우리와는 다른 시대를 살았고 이미 기성화될 대로 되어 버린 사람들의 평가를 받으면서도 단 한 번도 반발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대학생들은 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대의 가치는 공감에 있다.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고민을 하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대한민국, 넘어 아시아, 넘어 세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옆에 있는 친구는 결코 동지가 될 수 없다. 옆에 있는 친구보다 토익을 5점이라도 더 높게 받아야 하고, 평소에는 친한 친구이지만 시험기간이 되었을 때 노트를 빌려달라거나 교수님이 알려주신 문제를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어색한 웃음으로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대학생에게 연대의 가치를 요구하긴 어렵다. , 연대가 이뤄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반발이 있을 수 있다. 우리 패밀리 내에서는 다들 친밀하며 방학에도 같이 공부하고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서로 공유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연대가 아니다. 자신들이 그 곳에 있고 안정성을 느끼는 대가로 다른 이에게 제공해야 하는 일종의 입장료인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연대의식이란 결국 다른 패밀리에게는 자신들만의 어떤 내용을 알려줄 의무는 없는 것이고 다른 패밀리 역시도 그들에게 그러한 내용들을 요구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연대라 주장한다면 그들의 사전에는 연대라는 단어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대학생은 사회적 약자인가. 약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가 약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측면과 그와 동시에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기에 더욱 대학생들이 약자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3권의 내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법에 노동3권을 보장해 놓은 이유는 회사와 노동자를 비교해 보았을 때 권력과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크기가 현저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서로 연대를 함으로 인해서 그들이 원하는 사회적 지위와 임금을 얻도록 해 놓은 것이다. 만약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대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고 대학생들 역시 더욱 개별화 된다면 대학3을 요구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누구도, 대기업에게 취업 시 사진을 싣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분명 누군가는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자신이 속한 패밀리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보이지도 않고 힘도 권력도 없어 보이는 미약한 목소리라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취업 시 학점 이외의 다른 영어공인성적을 요구함에 있어서 그 기준과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대학생들이 제시했던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지금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고 그 방향성과 사회적 가치가 자신들이 제시했던 방향과 일치하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들이 다른 누군가로부터 평가받을 때, 그들이 가지는 권위와 실력이라는 것이 누구로부터 연유하고 그들이 지금 대학생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공감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결국 자신들이 처한 위치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억울하면 성공해라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국사회를 보면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 역시 밥을 먹으면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것과 같이 당연한 원칙인 것처럼 우리는 생각해 왔다.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말, 사실일까. 억울하지 않고 성공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주위의 친구들로부터의 패배 혹은 뒤쳐짐이라는 아픈 상처를 안고 사회에 나간 대학생이, 그들 주위에 있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나 혹은 자신보다 더 큰 패배를 겪은 사람을 보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 사람이 건강한 사회인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난 돌이 정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쉽게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용도가 있는 돌이라면 분명 정을 맞아야 그 용도에 맞게 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우리 대학생들이 건물의 바닥에 박히는 못난 벽돌이 아니라 샐 수 없는 수의 다이아몬드라고 믿는다. 모든 돌의 껍질을 누군가가 깨어준다면 오히려 고맙다. 자신들의 진정한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자신조차 몰랐던 다이아몬드를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이아몬드들이 제 빛을 찾는다면 이 세상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 제발 정 좀 맞고 다니자. 혼자 정 맞는 게 아프다고 슬퍼하지 말고, 옆에서 같이 정 맞는 다른 보석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대학생은 사회적 약자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보아도 이처럼 스스로가 약자가 되고자 해서 약자가 된 계층이나 집단은 없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약자화 하고 있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당하게 이야기 하자. 우리는 당신들이 정해놓은 그 틀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다. 굳이 틀을 만들고 우리를 그 속에 넣고자 한다면 우리가 가진 큰 꿈이 다 들어갈 만큼의 큰 틀을 가져오던지 그렇지 않다면 아예 그 틀의 그림자라도 비치도록 하지 말라. 그리고 우리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면 정당한 값을 치르도록 하라. 우리는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보다 더욱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될 것이며, 나는 내가 가진 능력과 아이디어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더욱 행복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내었지, 당신의 부하직원이 골머리 썩히는 것을 대신하기 위해 내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가 내는 아이디어에 대해서 제 값을 쳐주고, 우리가 그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데 지원을 아끼지 말아 달라. 대학생의 생각은 2012년의 생각이 아니다. 대학생의 생각은 2032, 2042년의 생각이며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을 만드는 생각이다. 우리의 생각을 당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고 있는 토론, 하기 싫다. 우리는 결론과 승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연대해서 우리가 가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고 그 해결의 방향을 잡았을 때, 지금 여러분이 가진 재력과 권위를 통해서 우리를 지원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토론이 아니라, 그 토론 한 번으로, 토론에 참여한 사람, 듣는 사람 심지어 그 토론을 찍는 카메라맨까지도 그 토론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는 토론을 우리는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은 제발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지 말아 달라. 여러분들의 옆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적이 아니다. 결코 경쟁자가 아니다. 사회가 경쟁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할 필요는 없다. 경쟁을 하되 올바른 경쟁을 하도록 하고, 넘어지고 실패한 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면서 나도 실패할 수 있으니, 너도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태도를 길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패밀리이런 소리를 할 것이면 부끄러워 해 달라. 누구나와 친해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패밀리라고 하는 사람들 외에도 사람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대학에서든 어디서든 만나야 할 사람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도 또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아간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우정을 돈독히 하되, 대학생일 때는 대학생들의 고민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연대하는 방법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은, 결코 내 몸만 잘 지키고, 내 가족만 잘 지키면, 우리나라만 잘 살게 될 것이고, 그것이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리라. 내 몸을 잘 살펴 다루듯이 가족을 잘 살펴 다루고, 큰 가족과 같은 국가를 잘 살펴 다루고, 그렇게 한다면 세상의 모든 이가 다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씀을 했던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제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의 벽을 허물고, 옆의 친구 그리고 잘 알지 못했던 친구 심지어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대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말 대학생이 부럽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학생들은 우리나라의 뿌리이자 줄기이자 열매이다. 이런 멋진 사람들이 적의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정말 비극이다. 그러니 내가 마음껏 부러워 할테니 멋진 대학생이 되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