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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은 도전하지 않는다.

무한도전은 도전하지 않는다. 2013.10.7. 


무한도전을 즐겨보는 시청자이다. 초기의 '무모한 도전'을 일삼을 때 부터 보아왔으니 나의 20대를 무한도전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무한도전을 보면서 더이상 '도전'의 요소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도전이 없는 무한도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청자들은 단지 무한도전 멤버들의 우정에 감동받고 그들의 눈물과 땀에 같이 눈물과 땀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은 지속적으로 '그들만의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컵셉들을 통해서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최근에 방송된 두 컨셉이 그것이다. 첫 번째 컨셉으로 보여주는 것이 '추적'이다. 무한도전에서 '추적'은 새로운 요소가 아니다. 돈가방을 두고 멤버들간의 지략과 술수 혹은 배신, 배반의 코드는 이미 많이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약 한 달전의 방송에서는 다시 '추적'을 보여주었다. 추적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박진감과 멤버들 개개인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형태나 방식이 다소 변했다고 해서 그것이 추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가수 싸이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골프연습장에서 시작한 추적은 장소를 옮기고 더 높고 넓은 곳으로 이동하면서 그것이 마치 판이 큰 놀이인 양 보여주지만 사실은, 결국 멤버들 간의 꼬리잡기다. 100명의 민머리 엑스트라를 출연시킨 것이 새로운 시도였거나 시청자와의 소통을 드러내는 요소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결국 시청자는 '100명'의 방해꾼들의 공통점이 민머리였다는 것, 딱 여기까지의 기억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0명을 섭외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것으로 보아야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무한도전이 가지고 있는 우리 방송계의 지위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거나, 새로운 지략가로 탄생하는 박명수의 캐릭터 변신은 결국 무한도전에 새로운 운동장을 만들지 못하고, 기존의 운동장에 새로운 경기를 도입하거나 선수의 배치만을 바꾼 채 관객이나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긴장감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추적의 컨셉은 무한도전이 다시 힘이 빠지기 시작할 때나, 노홍철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똘끼'를 드러내고 싶을 때, 혹은 유재석이 가지고 있는 중재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할 때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여러분이 무한도전에서 '추적'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무한도전의 종방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컨셉은, 가요제이다. 무한도전은 이전에 이미 여러 번 가요제를 진행했다. 강변북로 가요제나 올림픽대로,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등은 음원 판매 수익이나 사회적 파장까지도 불러일으킬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사회적 파장이라고 까지 말한 것은, 정형돈이 한 명의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고 또 박명수 역시도 음악으로 다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고 그것이 '음악은 가수만의 것'이라는 통념을 확실히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무한도전만의 성과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음악을 하는 개그맨이라는 이미지는 더이상 어색한 이미지가 아니도록 한데에는 일조를 했다고 본다. 이런 나름의 사회적인 파장을 가진 무한도전의 음악적 시도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음악을 통해 가수와 개그맨이 화합하고 또 시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음악의 트렌드를 알게 해주는 등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은 가요제를 통해서 다시 그들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하겠다는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지금 방송이 진행되고 있는 무한도전 가요제에서는, 유명한 가수부터 유명해지고 있는 밴드 혹은 작곡가들까지 총동원되어 그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무한도전 멤버들의 음악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유재석과 박명수의 지금까지 방송된 가수들과의 화합은 다소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여담이라 길게 적진 못하지만, 유재석과 박명수는, 유희열과 프라이머리라는 독창성을 가진 가수들의 존재를 마치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하청 작곡가로서 대접하고 있다. 댄스 음악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말하는 유재석은, 유희열이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을 배제했어야 한다. 유희열은 댄스곡을 작곡하는 가수가 아니었음에도 유재석은 '무한도전'의 음악은 많은 시청자들이 즐거워야 한다는 일종의 폭력적 역사를 동원해서 유희열의 의견을 묵살하려 한다. 박명수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지론을 바탕으로 프라이머리라는 가수의 특성을 무시한 채 빠른 템포와 후크 송과 같은 반복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무한도전 가요제가 음악의 가치를 배제하고 한번 듣고 흘러가는 고속도로의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테이프처럼 생각해도 되도록 만들고 있다. 박명수와 유재석의 자세 변화를 기대해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무한도전 가요제는 음원이 공개된 이후 음원 차트를 싹쓸이 할 만큼의 사회적 파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미 과거의 몇 번의 가요제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이것이 무한도전이 바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직 무한도전은 살아 있어요'라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고, 시민들의 귀에, 시청자들의 귀에 무한도전의 음악이 흘러들어가게 만듦으로 인해 무한도전의 '파워'를 실감토록 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토요일(10월5일) 방송되었던 '무한도전 응원단'이 하나의 외전으로서 무한도전의 도전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앞으로 있을 여러 스포츠 행사에 응원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응원단을 만들었고 그것의 위탁교육과정으로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응원단의 도움으로 응원을 배우는 과정을 소개했고, 지난 방송에서는 연고전(혹은 고연전)에 직접 참가함으로서 그들이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결실과 또 많은 관중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회상되는 장면은, 레슬링 특집이나 봅슬레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레슬링에서 봅슬레이로, 봅슬레이에서 응원으로 소재만 바뀌었을 뿐이지, 또 멤버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뿐이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하고 성취를 하는 것에 있어 그 형태나 포맷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한도전이 가지고 있었던 새로운 시도를 하는 프로그램이며, 리얼 버라이어티라의 상징이라는 그 모습을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은 도전하지 않는다. 무한도전이 도전하지 않은지는 꽤 오래 된 듯 하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제목 그대로의 '도전'의 모습을 진정으로 보여주었을 때 시청자들은 환호했고, '역시 무한도전'이라는 말을 함에 있어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추적 컨셉을 잡아 승용차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것에 우리는 새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더 많이 배반을 할까 기대하는 이상야릇한 범죄자 마인드를 확인할 뿐이다. 무한도전 가요제를 통해서, 이번 연말에는 또 어떤 무한도전 '출신' 노래들이 우리나라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을 맞게 할까 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역사성에 매몰되어 무한도전 본연의 모습을 잃고 다시 상업주의 음악이 판치는 곳에 또 하나의 거대한 이름을 건 상업 음악의 흐름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하게 된다.  


한국 방송 역사를 감히 언급하기는 섣부른 감이 없지 않지만,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가지는 그 비중은 꽤 크게 자리잡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무한도전의 도전은 도전이 아니라 반복이 되어왔고, 시청자들도 어느 정도의 반복을 하더라도 그 속에서 새로운 인물이나 캐릭터의 등장만으로 반가워 해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반복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송사의 프로그램들이 무수히 하고 있는 컨셉의 반복이나 감동을 주려는 목적이 선명히 보이는 도전들에 대해서 '무한도전'만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한도전 성애자'인 내가 잘못된 것일까. 


도전이 사라진 무한도전은, 언제 다시 도전을 찾아올 수 있을지 앞으로도 기대하면서 즐겨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