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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아이는 없다.

아름답지 않은 아이는 없다. 2013.11.8.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어린 아이였던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더 어린 시절, 아기였던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긍정문으로 다시 바꿔 적더라도, 우리는 모두 아기였다. 


모두가 아기였던 적이 있는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야, 우리가 아기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가 그 때 얼마나 사랑받으면서 자랐고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지탱하는데 어느 정도 큰 힘을 발휘하는지 쉽게 예상하지 못한다. 


(위 문장을 적으면서, 과거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아동양육시설' 즉 고아원에서 일을 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아이들에게 부모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거나 자신을 양육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자고, 사회복지사의 관리 속에서 자라나도록 했던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부모는 있었고 아마도 자신의 아이를 낳은 그 순간 그들의 부모는 그 아이들의 눈과 존재로서 그들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매번 예상했던 대로 되는 것은 아닐 뿐더러, 그 과정에서도 여러가지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에게 직접적으로 양육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그 아이들에게 부모의 빈 자리를 완벽히 채우지는 못할지라도 따뜻한 관심과 그들이 받아야 마땅할 사랑을 간접적으로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모두가 아기였던 우리는, 시간이 지나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기를 지나 자신의 생각을 형성한 뒤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가지 기준들에 우리의 어린 시절을 끼워맞추곤 한다. 


여기서 항상 문제는 발생한다. 


가끔, 아기들의 사진을 보거나 혹은 길을 가다가 어린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다양하다고 적긴 하였지만 결코 옳은 생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뭇 반응들이 있어 이렇게 글을 남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꼭 한 번은 떠올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옳은 생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반응 중 가장 본인의 심경을 거슬렀던 반응은 이것이다. 


"이 아이는 예쁘지 않네." 


이 반응은, 어린 아이나 아기가 외모적으로 예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반응이다.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마치 존재하고 있는 듯이, 사람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예쁘지 않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예쁘지 않구나' 라고 생각이라도 해주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아마도 본인의 생각에는 '나는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 정도의 생각에서 머룰고 있을 듯 하다. 


아이들이나 아기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인식이나 기준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아이를 귀엽게 보고, 예쁘게 보아야만 한다는 의무나 당위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나 아기들은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아야만 하는 사회적 기준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이 없다. 그들이 오직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내가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과 내가 꿈 꾸는 내 미래의 모습을 밝게 그려야 한다는 점, 이 정도 일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외모적으로 예쁘거나 귀엽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아니다. 미추(美醜), 아름다움과 못남의 기준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해 왔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이 있는 것에 비해 낮은 산이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우리는 낮은 산을 보고, 너는 왜 이렇게 낮니? 라고 묻지 않듯이 아이들에게 그런 질문이나 반응을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거나, 자신의 가지고 있는 기준에 의해 아이들을 제단해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가끔 티비나 광고 등에 등장하는 아이들 혹은 아기들의 모습은, 동그란 눈에 적당히 긴 머리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더해 황인종의 아이라기 보다 백인의 아이라고 인식되는 눈동자와 얼굴형을 가지고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그런 아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는 예쁜 아이'라는 인식을 가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결국 아이인 것이고, 그 아이의 미래가 밝을지 어두울지 우리 어른들은 섯불리 판단할 수 없다. 덧붙여 본인은 아직 '흑인'의 아이가 광고에 나온 것을 29년의 삶 동안 본적이 없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직 본인이 티비나 방송을 통해서 본 흑인 어린 아이는 유니세프의 기부 광고에 등장하는, 영양식을 먹고 있는 아이들에 불과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종적 차별의 결과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본 글의 주제인 '아름답지 않은 아이는 없다'를 왜곡하는 하나의 현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아이는 아름답고, 귀엽고, 예쁘다. 


이것은 하나의 명제이자, 우리가 마음 속 깊이 담아두어야 할 '올챙이' 시절의 추억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이다. 그들이 성장하여 어떤 사람이 될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기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그 아이가 사랑받지 않아야 한다면, 그건 사랑이라는 것 역시도 조건이 달려야 한다는 3류 소설의 주제도 되지 않는 핑계일 뿐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들이나 아기들을 보면서 그들의 가진 얼굴이나 외모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예를 들면 뽀뽀나 사랑, 혹은 무한한 칭찬으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관심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단지 관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그 순수한 눈망울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는 노력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아이는 없다. 그것은 미래를 말하는데 조건이 달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 혹시 주변에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의 외모를 보지 말고, 그 아이의 미래를 보고, 이것도 힘들다면 그 아이의 눈동자를 보자. 그리고 그 속에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과연 웃고 있는지, 혹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지를 통해 지금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p.s 

장애를 가진 아이라면, 더욱 우리가 사랑을 쏟아야 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 거부감을 가지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내 주위에는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