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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을 준비는 되어 있다.

비웃을 준비는 되어 있다. 2013.11.11.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사회 속에서 살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기로 한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별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내가 죽은 것은 아니므로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누군가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최소한 대학이나 전문 학위 과정에서 수업을 하나라도 들어본 내용이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적이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웃을 준비는 되어 있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비웃음을 보인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사람이 되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된다. 심각한 문제에 있어서도, 삐딱한 자세로 앉아 '그건 아니지' 라는 코멘트와 함께 입가에 미소를 보이면, 없던 전문성이 생기는 양 행동한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거야' 라고 말을 하며 어디선가 읽은 듯한 한 문장을 끄집어 내 마치 그것이 내 의견인양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 


비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넘친다. 


감동에는 쉽게 굴복하고, 이성에는 비웃음을 아낌 없이 선사한다. 말초 신경만이 신경인양, 오랜 기간 숙고한 생각에 대해서는 '그 생각은 나도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라며 숙고의 가치를, 마치 인스턴트 스프가 주는 자극 정도로 생각해버린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것이 주는 자극에만 반응하는 사람들은 언론이 하는 이야기들을 믿어버린다. 아마 언론에서 '언론의 이야기를 믿지 말라'라고 이야기해도 그걸 믿어버리고, 언론은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양,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니 믿어도 되는 양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 앉아 꽤나 긴 시간 동안 문제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그저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자극에도 급이 있어, 우리가 쉽게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는 자극은 고급 자극이며, 지금도 당장 전화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주는 자극은, 값싼 자극이다. 자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굳이 따질 생각은 없음에도 그 것이 그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정도로 따진다면 결코 무시할 만한 크기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비웃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까. 


더욱 걱정은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나도 그런 생각은 할 수 있다' 라고 치부해버리는 사람들, 그리고 '네가 뭘 아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비웃음을 단지 아량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보다 살아가면서 진지해야 하는 순간들은 많다. 어느 학교를 들어가야 하는지 부터 시작해서, 어떤 직장을 구할 것인지, 직장 내의 불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 것인지, 결혼을 하는 것 등등의 많은 선택들에 있어서 우리는 꽤나 많은 '진지함'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다. 이런 선택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의 사회는 아마도 꽤나 혼란스러웠을지 모른다. 


이런 선택들에게, 우리는 단지 비웃음만을 주어야 할까. 


생활 속의 선택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견을 가지거나 사회 발전의 방향에 대한 논의에서부터도 그 문제는 항상 제기되어야만 한다. 


비웃을 준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비웃음의 당사자가 자신이 되었을 때, 그것을 반박할 논리 혹은 자괴감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아니 화가 나는 마음에 글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