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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기다리며

의자를 기다리며 2013.12.11.


지하철이 개통된지가 10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최초의 지하철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 개통된 지하철 노선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지하철은 아마 매우 잘 만들어진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하철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subway라고 부르니 어쨌든 땅 밑으로 다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히 '땅 밑으로 다니는 철도'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밑으로 다니는 길'이라고 부르는 미묘한 차이일 뿐일 것이다. 땅 밑으로 지나다니는 철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밑으로 다니는 길'이라고 부르는게 사람들에게 다소 높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땅 밑에 길이 있다는 것은 과거에는 무엇인가 숨길 것이 있는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간첩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쨋든, 처음 지하철을 만들고자 한 사람은 사람에게 지하의 세계를 알려주는 것을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제목을 봐서 알다시피, 이 글은 지하철의 역사를 적고자 하는 글은 아니다. 


특정할 수 없는 외국의 여러 나라에서는 '철도'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로서 '철도', '기차' 혹은 '지하철'에 대해서 연구를 하거나 동호회를 만들기도 한다지만 우리나라에서 철도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공채 시험을 통과한 사람 뿐일지 모른다는 씁쓸한 생각을 한다. 동호회를 만들거나 하나의 취미로 철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마도 '의자'는 생소한 주제였을 것이다. 기차가 가지는 풍미는 그것이 가지는 직진성과 곡선성 그리고 그것이 뿜어내는 소리나 흐름이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속에 사람들이 타서 앉아 있는 '의자'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편안함을 주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침 저녁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니, 지하철 안에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대부분의 시간은 내가 들고 다니는 책을 읽는 척 하거나 사람들을 구경한다. 책을 읽는 척 한다고 표현한 것은, 이동시간을 나름대로 의미있게 보내고자 하는 절박한 노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은 사실 눈에 쉽게 들어오지는 않고, 오히려 책 장 넘어 살아 숨쉬는 책, 즉 사람에게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이 많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거의 대부분의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앉은 사람보다 서있는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서 있는 사람들은 앉은 사람들의 앞에 서거나 아예 자리를 포기하고 문쪽으로 비켜나 서있다. 문쪽으로 비켜 서 있는 사람은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한 셈이다. 누군가 앉은 자리 앞에 서서 있는 사람들은 으레히 그렇듯 자기 앞에 앉은 사람이 언제 내릴까를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지하철을 타자 마자 자신이 앞에 서 있으려고 했던 의자에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 준다면, 그때의 기쁨은 그 날 하루의 피로를 물리치거나 아침이라면 충분히 자지 못한 잠이 달아날 만큼 흥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 조그만 공간에 자신의 몸뚱아리를 구겨 넣으면서도 '앉아있음'이 얼마나 편한 일인지 매번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의자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이 언제 일어날까를 생각한다. 한 정거장 지나서 일어나주었으면.. 내가 빨리 저 자리에 앉았으면..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바로 옆사람이 서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어난다면, 아, 내가 저기 서있을 걸 하는 후회를 하기도 한다. 나는 이 후회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잘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운이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운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운을 만든 사람이 대부분이고 보통 사람들은 어떤 운이 주어졌을 때 그 운을 제대로 잡는 것조차 힘들어 한다. 그리고 운이 지나쳐 버리면 자신은 그 운을 가지지 못했다고 후회하거나 남을 부러워하기 바쁘다. 


지하철 내에서도 그렇다. 


한참을 기다리고 서 있는데, 금방 막 지하철에 탄 사람이 누군가 비켜준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본다면, 앉게 되는 그 사람이 부러워진다. 그리고 나서 생각한다. 아, 나는 왜 운이 따르지 않지...


운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일어서게 만들 방법은 없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가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만큼 나이가 들었거나, 임신을 하였거나 서 있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는 장애를 가졌다면 '지하철에서 앉을 수 있는 운'은 언제나 느낄 수 있을 것이지만, 최소한 나는 아직 젊고 임신을 할 수도 없고 장애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로 한정해서 말하자면, 내가 노력해서 얻는 운이라는 것은 지하철 내에서는 없다.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운이 아니니, 지하철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어떤 중대한 고비를 넘고 있을 때 그때마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안타까할 필요는 없다. 나보다 늦게 어떤 일을 시작한 사람이 운을 잘 만나 성공할 수도 있고, 우리 역시도 그런 운은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우리 앞에 앉아 있는 그 사람도 그 전에 서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도 앉으면서 운을 획득했고 또 그 운은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사라질지 모른다. 


우리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운과 정확히 똑같다. 


누군가 성공했다는 것을 보면서, 운이 좋다고 이야기를 듣는 그 사람도 그 전에는 운이 없었을지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욱 성공하게 되면 그 자리를 비켜줘야 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운이 따른 사람이든, 성공한 사람이든 스스로 운을 포기하고 성공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기도 한다. 


지하철을 타면서 내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화를 내거나 부러워하거나 내 운을 탓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앞의 사람이 언제 내리는지 모르고 또 그 사람이 언제 그 자리에 앉았는지도 모른다. 내 앞의 사람이나 내 옆에 나보다 먼저 앉게 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특별히 운이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리 역시도 그렇게 운이 나쁜 것도 아니다. 운은 우연히 찾아오기에 운인 것이지,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운명이 아닌 약속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하철에서 있는 시간이 조금 되다보니, 의자를 보면서 생각한 것들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의 운일 수 있으나 우리가 그 운이 없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것은 전혀 없다. 이것은 지하철 의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성공했다고 해서 그 성공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의자에 앉지 않아도 그 시간이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성공하지 않고 또 남들보기에 편해보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살고 즐기면서 산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의자를 기다리며, 운을 탓하지 말고 앉아있든 서 있든 자신의 시간을 즐길 수 있기를...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잠이 덜 깬 모습과 피곤한 모습의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p.s  이 글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발행되는 책의 플롯을 따랐다. 처음에는 지식을 풀어놓다가 뒤로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에 교훈을 주려는 그 플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