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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그리고 일본인

2008년이었다. 
다시 대학에 들어와서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경험을 쌓아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한 수업에서 한 편의 독립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우리 학교'였다.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일상을 담은 그 영화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의 존재를 나에게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를 제작했던 제작자와 감독이 직접 학교에 와서 영화를 같이 본 후 그 영화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받고 또 대답을 해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여운은 길게 남았다. 이후 보건복지부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조사연수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조선학교'에 직접 방문할 기회가 생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에 방문하기 전 사전 학습의 계기로 삼고자 '한일합동교육연구회'라는 한국과 일본의 교사들이 모인 연구회에서 개최한 행사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고 토론하고, 또 한국에서의 다문화 문제 등에 대한 필드워크를 안산시 원곡동에서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때 만난 일본의 선생님 혹은 선생님이었던 분들은 일본에서까지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신다.

그 중 한 분이었던 '가리베 게이코' 라는 할머니 선생님이 계신다. 일본에서 약 30년 간 선생님으로 근무하셨던 가리베 선생님은, 지금도 일본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어찌 보면 천민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가죽 제작 노동자'들이 모인 곳에서 선생님을 하셨다. 일부러 지원을 하셔서 그곳에서 근무하시며 그들의 삶에서 교육에 대한 부분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크셨다고 했다. 조사연수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셨다. 조선학교에 함께 찾아가기도 하였으며 우리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주시기도 하셨다. 당시에는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했던 내가 물었다.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좋은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따지듯 물은 것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가리베 선생님께서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 했다. "나는 학생들이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다리가 될 것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학생들을 돕고 싶은 것 뿐이에요." 이 말씀은 내가 약 1년 간 교환학생으로 있을 당시까지도 변치 않으셨다. 한달에 한 번씩은 꼭 내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당신의 집에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저녁 식사를 가리베 선생님과 그의 부군-할아버지께서도 선생님이셨다- 과 함께 그리고 고양이 토라와 함께 식사를 했다. (토라는 내가 한국에 돌아갈 즈음에야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면서 당시의 한국과 일본의 사정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민주당 정권교체에 대한 한국의 반응에 대해서 물으시기도 하셨으며, 한국과 일본 간의 갈등에 대한 역사적 맥락 등에 대해서도 알려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더욱 열심히 공부하길 바란다는 말씀으로 나에게 격려를 해주셨다. 일본 이시하라 전 동경도지사가 재일 조선학교의 부지 중간에 도로를 내겠다(조선학교를 없애기 위해)고 하셨을 때 조선학교를 지키기 위해 사비(한국돈으로 약 1000만원)를 기부하시기도 하셨던 가리베 선생님은 일본 내 조선학교가 북한의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일본의 역사 속에서 있었던 조선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또 조선인으로서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 기회를 제공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셨다. 가리베 선생님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시고 계시는 것으로 안다. 

또 다른 일본인 한 분은,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본 동경에 코리아타운이 조성되어 있는 '신오오쿠보'의 '신오오쿠보초등학교'의 선생님이셨다. 지금 이 분은 선생님을 그만두셨다. 그만두신 이유는, 오키나와에 한일합동연구회가 방문했을 당시 일본군이 자행했던 위안부에 대한 집단학살 장소를 견학하시고 난 뒤 만약 이런 장소에 대한 답사 혹은 연구가 간헐적으로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기억에서 잊혀지게 될 것이라며 교직을 그만두시고, 오키나와에 가서 집단 학살에 대한 연구를 하시기 위하셔라고 하셨다. 저 말씀을 직접 들을 때 그 분의 눈빛은 엄중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슬픔이 서렸다. 자신의 직장을 그만두고서도 꼭 알리고 싶은 사실에 대해서, 그는 깊은 미안함과 또 역사 속의 한 장면을 맨몸으로 맞설 용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 명의 일본인을 소개해주고 싶다. 한국말이 정말 유창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일본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는 한 여자분은 일본에서 판매되는 NHK 한국어 교재를 편집하시기도 하고,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 방영될 때 필요한 대본의 번역을 맡고 계신 분이었다. 오사카에서 그 분을 만났을 때 주섬주섬 가방에서 '황진이' 대본을 꺼내시고는, 우리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옛 우리말에 대한 질문을 하셔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그분께서 이야기하셨다. "아, 이게 이런 뜻이군요. 제대로 이야기해주셔야 되요~ 이거 그대로 드라마에도 나오고 나중에 책으로도 번역되서 나올 거란 말이에요~" 다시 말해, 우리가 말해준 것을 기준으로 일본 방송 및 책으로 편집되어 일본 전역에 퍼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 분을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고 난 뒤 몇 년이 지나서 TV에서 그 모습을 다시 뵙게 되었다. 릿쿄대학에서 열리는 '윤동주 시인 추모행사'에 참여하고 계시는 모습이었다. 그분 역시 릿쿄대학을 나오신 것으로 기억한다. 윤동주 시인의 추모행사에서 다른 일본 학생들 혹은 일본인들에게 윤동주 시인의 시와 그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그 모습에서 나는 일본인이라는 모습을 또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가 지속적으로 위안부, 조선침략에 대한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과거를 부정하여 얻을 수 있는 현재란 허황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아베는 당장의 결집을 위한 오만을 일삼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와 조선 침략 직전의 일본과 매우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일본 정부에게 있어, 우리는 단호한 태도로 그들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본 글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일본 내 수많은 양심있는 일본인들은 자신의 정부를 부끄러워하며 역사에 대한 엄중함을 받아드리고자 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먼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태도를 유지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고 본다. 몇몇의 일본인이 일본 전체를 대표할 수도 없고 대표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에서 그들의 역사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한국과의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확신을 가진 몇몇 일본인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우리는 같이 응원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가리베 게이코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해주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함께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이 노력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