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고실험

사고실험 2014.4.16.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구토를 하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구토소리다. 무엇을 토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토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울부짖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한 것일까. 그가 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의 속에서 다시 나온 그 무엇이 과연 그의 속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분명 그는 무엇인가를 토하고 있었고 그 속에는 그가 이전에 보지 못한 응어리진 어떤 것이 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했음에 틀림이 없다. 술을 마시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로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한 잔의 술은 그에게 흥분을 주었겠지만 연거푸 이어진 술잔에서 슬픔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만약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회한이었을까. 안타까움이었을까.

누군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했던 그 어떤 것, 그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단지 울부짖는 것 그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토하는 소리. 토를 하면서 그는 결국 아마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자신이 지금 취해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취함이 자신에게 일으킬 수 있는 변화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미 그것에 굴복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토를 하는 행위는 분명 눈물을 동시에 쏟아 낸다. 왜 그럴까. 눈물을 흘리지 않는 구토를 본 적이 없는 나는 구토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울고 싶은 생각에 구토를 하는 것이리라. 울고 싶다고 울 수도 없는 세상이다. 약한 모습은 강한 모습보다 강해보일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약한 모습은 단지 약한 모습에 머무를 뿐 그것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그렇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이기 싫은 사람들은 항상 구토를 했다. 구토를 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구토의 의지인 것인 양 사람들이 생각하게끔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으로 가고 싶었을까. 집으로 간다면 그의 집은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을까. 아마 집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집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그곳을 집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그는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에서조차 제대로 구토를 하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울지 못하는 남자는 집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새벽 1시가 지났다. 많은 사람들은 집이라고 믿고 있는 공간에 들어가서 가족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잠을 자거나 아니면 구토를 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입으로 하는 구토가 아니라 성기를 통해 하는 구토를 즐기면서 다른 사람의 눈물을 유도해 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구토 행위 중 대표적인 행위가 섹스다. 섹스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다. 단지 그들은 울부짖고 싶은 마음에 또 구토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말해 울고 싶은 마음에 섹스를 즐긴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이런 생각에는 섹스 이후의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섹스를 하고 난 뒤 웃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는 무엇인가 쏟아 내었다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해방감이 엿보인다. 그것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관계없이 그들은 자신이 몸으로부터 땀이라는 토사물을 흘려보냈고, 남자는 정액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액체를, 여자는 그에 못지않은 애액을 토해냈다. 이런 구토의 결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자식이라는, 흔히들 말하는 아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아기들을 처음 접하는 부부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들 모두 울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토사물이 결합된 새로운 생명체를 보며 다시 한 번 구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가학적인지 웃으면서 구토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방송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는 아름다운 모습이라 포장하기도 한다. 구토를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방송을 만든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구토가 자신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생각이 부끄러워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변태적 감성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리라. 남자의 구토소리가 멈추었다. 집으로 들어간 것일까. 그 집에서 구토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리라. 아마도 그는 그 마음을 숨기고 짐짓 어른스러운 척을 하며 자신의 가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할 것이지만 그의 입가와 눈가에 묻은 구토의 흔적은 숨길 수가 없다. 구토의 흔적은 단 한 번 흘린 이후 다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산성이나 특수한 물질로 만들어져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언제나 다시 구토를 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되어 있는 어떤 것은 항상 그 흔적을 남긴다. 마치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에게 구토란 그런 것이다. 눈가나 입가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는 그런 구토의 흔적들이 남아있는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옷을 입는다. 처음에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구토 흔적을 숨기고자 했기에 더욱 두껍고 더욱 불필요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남녀의 성기를 가리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사람들의 논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바 역시도 구토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성기는 결국 구토를 할 수 있는 외적 도구에 불과하다. 그 도구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그 도구가 결코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필연적이라거나 하면서 변론할 필요는 없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었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추위를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떨면서 땀구멍이라는 도구를 통해 구토를 한다. 그 구토의 흔적이 들키는 것을 마치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연권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옷을 지어 입었다. 여름이 되면 그 부끄러움은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구토의 흔적들과 구토를 할 수 있는 여러 도구들을 자랑스럽게 꺼내놓고 다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는 시간이 주는 일종의 사육제를 사람들은 즐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구토의 도구들과 공간을 드러내는 것은 구토의 도구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도구가 부끄럽지 않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으로서 그렇게 도구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다닌다. 어이가 없다. 구토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뻔뻔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구토는 여름에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이라고 불리는 공간, 가족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과는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여름에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니. 오히려 구토의 공동체화 혹은 구토의 세계화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한 여름에 온몸을 칭칭 감는 옷이나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이 어색해하거나 거북해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옷을 두껍게 입은 사람은 그의 구토의 흔적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체인 곳에서 다시 말해 모두가 자신의 구토의 도구를 드러낸 곳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 도구는 다시 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도구가 도구의 위치로 돌아가니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사라진다. 그렇기에 옷을 두껍게 입은 사람을 한 여름에 만나면 거북하고 또 자신만이 구토를 할 준비를 드러낸 듯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구토를 하기 위해 사람들은 태어났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데 그 구토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가 된 사회에서는 결국 그것을 용인할 수 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역사가 구토의 흔적을 지우거나 구토의 흔적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형태로 진보되어 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구토의 흔적을 이리저리 숨겨보거나 숨기지 못할 바에야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숨기는 형태로 진보되어온 인류에게 있어 결국 구토는 하나의 종교로 까지 승화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시설에 가면 자신의 입을 통해서 구토를 설파하는 사람과 눈물로써 구토를 하는 사람을 신에게 가까운 사람이라고 인정하거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구토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라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숭고하기 그지 없다. 자신의 토사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토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다니. 그리고 누군가 남긴 토사물을 신성시 함으로써 자신의 토사물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게 만듦으로써 이렇게 사람들은 흘러가고 있다.

구두 소리가 났다. 여자의 구두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