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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단상.

두 가지 단상. 2014.06.01


(아래 글은 어제 새벽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폰으로 적은 뒤 '게시'를 눌렀건만 사라져 버린 글을 다시 정리하여 적는 글입니다ㅠㅠ 아닌 새벽에 멘붕..ㅎㅎ)

# 1
어제의 공연은 몇 가지 생각을 저에게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글로 옮기고자 합니다. 
공연의 시작 시간은 저녁 6시였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만큼 해는 길어질 만큼 길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오후 6시라 하여도 하늘은 밝았습니다. 일찍이 제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고 또 이미 자리에 착석해 있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갖고 있고 어떤 옷을 입었고 무엇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이 있었지만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알아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공연은 약 6시 반 정도에 시작했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는 저물었고 어둠은 밀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학교 측에서 나눠준 형광봉을 하나 둘씩 꺼내어 들었습니다. 밤이 완연히 깊었고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형광봉의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개별 사람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옷 그리고 누구와 왔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자 얼굴과 옷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흔들리는 형광봉만이 보였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만이 보였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어두워지자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서 있었다고 해도 사람이었습니다. 어두움은 개별성을 매몰시켜 버렸습니다. 대신 보편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낮은 우리에게 각자의 차이를 드러내 주었지만 밤은 그 차이를 무시하고 단지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권이나 '인류의 진보' 등은 개별 주체의 노력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듯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죄로 지금도 어디선가 간을 독수리들에게 쪼아 먹히고 있습니다. 불이 가져다 준 것은 낮과 같은 밤입니다. 밤이 되어도 사람들은 낮에 보는 것과 같이 개별적 주체로 다른 사람을 인식합니다. 오히려 더욱 밝게, 더욱 선명하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하고 구별하고 구분짓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우리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끔은 그 불을 숨겨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종교와 인종, 외모와 장애 등은 낮이 우리에게 준 기준들입니다. 밤이 되면 고고히 흐르는 인류의 파도 속에 들어갑니다. 개별적 주체가 강조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인권과 인류 그리고 그것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들은 밤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아침이 되고 낮이 밝겠지만 밤은 우리에게 어둠을 선물해 '인류 보편의 평등'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어둠 속의 사람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흔드는 형광봉의 흐름을 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잊고 지냈던 사람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 2 
대학원에 들어오고 난 뒤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같은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종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 대안 제시나 수단 확보 등에 다른 측면이 있을 때 방향을 잡기 쉽습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갖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점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경우 창의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기존의 형식을 깨는 신(新) 사고의 등장을 막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점 역시도 공통으로 흐르는 생각의 기준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기도 합니다. 
바야흐르 선거의 계절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가끔 우려되는 것은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만이 진실이라며, 그것을 생각의 기준으로 세울 때가 있습니다. 가령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자유'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공유, 기준의 설정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으면 대안은 제시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그 기준에 대한 토론을 하기에는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여러 가지 공약들을 많은 사람들이 쏟아냅니다. 가끔 상반된 내용들의 공약들이 한 후보의 공약집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또 어느 일방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인 양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 원인이 '서로 공유하는 생각의 기준'이나 '가치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시민의 행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막연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전에 많은 정치적 실험들을 통해 어떤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한 검증 역시 어느 정도 완료되어 있다고도 봅니다.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을 각 후보가 잘 인식하고 있다면 어느 후보가 되든 큰 상관은 없어보입니다. 행복을 '지금 당장' 실현할 것인지 '몇 년 뒤에' 실현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그 기준이 형성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기준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그로부터 대안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선호되지 않습니다. 시민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기준과 정치인이 갖고 있는 기준이 다를 경우 정치는 삶과 괴리됩니다. 같은 생각의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수단과 대안을 제시할 때 좋은 사회가 형성되고 그 방향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같더라도 구체적인 방안과 실행 방법은 무수히 다를 수 있습니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 그 생각 자체가 달라 무의미한 것들로 논쟁하고 비난하는 듯한 모습들을 봅니다. 지켜야 할 가치, 즉 '시민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사회적 토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p.s 여기서 '시민'이라는 표현은 '서울시'의 시민이 아닌 자발적이며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