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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담을 많이 받는 편이다.

나는 상담을 많이 받는 편이다.    2012.10.24.

'많이' 받는다는 것에 대한 일정한 기준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상담을 받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종종 걸려오는 전화 중 자신의 삶이나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질문이 생긴 사람들이 내게 전화나 만남을 요청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으므로 '많다'고 표현하는데 있어서 독자의 아량을 바란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이러한 요청에 대해서 어떻게 응대하는가 가 또 다른 의문점일 수 있다. 내가 가진 상담의 원칙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자, 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 원칙 등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내게 상담을 요청해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의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고, 다르게 이야기하면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도 나를 일정부분 알고 있고 나도 그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신상 정보, 학력 그리고 현재 처해 있는 상황 등을 알고 있다. 이런 정보들을 활용하여 나느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자 한다.

물론 힘든 부분이 있다. 가령, 나는 남자이고 경상남도의 한 도시에서 자랐으며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전공은 정치외교이기에, 나와 다른 성별, 도시, 대학 교육의 유무, 전공 등에서 많은 차이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기에 나는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해'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 사람'이 될 뿐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아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을 바에야, 물론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일정 부분이라도 그 사람의 심정과 상황에 나를 넣어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볼 것 같은 사물을 보고, 그 사람이 생각해봄 직한 것들을 생각해보고, 그 사람이 느꼈을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 등을 떠올려 본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나는 그 사람의 마음 속의 한 구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만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너무 많이 아는 듯 하여 무섭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니 딱히 잘못된 방법은 아닌 듯 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상담의 과정에서 나는 사실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결국 내가 되어보고자 했던 사람들의 아주 극히 적은 정보를 통해서 그 사이 되어보려고 노력했고, 누구나 사람은 눈에 보이는 행동과 하는 말과 외모 등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다르게, 눈에는 보이지 않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는 드러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더욱 많은 스토리와 사건, 그리고 미래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담을 반긴다. 상담을 반긴다는 표현이 다소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상담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 역시 나와의 관계 속에서 많은 모습들을 보여줬기에 나와 그들의 관계는 한층 더 깊어지고 끈끈한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의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연기자들은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서 철저한 분석을 통해 그 극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되는 경험들을 한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럴지 모른다. 나도 상담을 통해서 느껴지는 그들의 고뇌와 기쁨들을 공유하려 노력하였고 그런 감정들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슬플 때 나도 슬펐고 그들이 기쁠 때 나도 기뻤다.

하지만 이런 상담의 과정에서 분명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적은 있다. 실패의 원인으로 내가 가장 먼저 꼽는 것은, 바로 나와 그들간의 관계가 충분하게 형성되지 않았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상대방과 10의 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나와의 거리를 100으로 느끼고 있었거나, 상대방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해 관계'라 생각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방적 관계'라고 느끼고 있었던 이들에게는 나는 언제나 실패를 했다.

내가 의도했던 말과는 다른 뉘앙스와 의미로 나에게 큰 실망을 느끼고 떠나간 사람도 있고, 나 역시 상대방과의 관계를 '남-녀 사이'를 떠난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애정'의 징검다리를 홀로 설정해놓고 상대방과의 거리를 마음대로 좁혀간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담을 반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나를 위해 누군가와 상담하지 않는다. '멘토'를 구한다는 신호를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보내는 편이지만 아직 멘토는 구해지지 않았고, 막상 내가 상담을 구하는 시기가 오면, 나는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 내가 가진 고민을 남들과 공유하는 것을 딱히 반기지 않는 성격인 관계로 나는 왠만해서는 다른 이들과 상담하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스스로는 '상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나 역시도 다른 이들로부터 꽤 많은 상담을 받아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놓고선, 상담을 받았다니 이건 또 무슨 망발인가 싶겠지만, 나는 상담을 하면서도 단지 내가 상담을 '받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런 표현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서로서로 상담을 하고 서로서로 격려를 하며, 그 순간 서로의 존재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보내고, 만남의 시간이 끝나고 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 이러한 만남들이 나에게는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상담을 하면서 고마뭄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상담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만큼 나 역시 상담을 받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상담을 즐긴다는 것 역시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말 하는 것을 즐긴다. 상담을 할 때 역시 말을 하면서 상담을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므로, 나는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담'을 즐기는 것이다. 여기서 '말을 하면서 상담을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 상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저렇게 표현했다. 가령,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슬퍼하지 말라'라는 말 보다 옆에 앉아서 손을 잡아주거나 어깨를 쓸어주거나 그 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 이러한 행동만으로도 '상담'이라고 표현하기 어색한 '공감'을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말을 즐기는 내가, 나와의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와 동시에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가 겪고 있는 사건/감정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상담을 많이 받도록 노력한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상담가가 아니기에,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나이기에 그들에게 해답을 제시해주거나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은 전혀 제시해 줄 수 없지만 최소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에 나는 상담을 많이 받도록 노력한다.

나의 상담에 대한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거나 아무나 만나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은 이해할 이유가 있다. 나는 외모적으로 '상담'을 잘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다른 이를 포용할 것 같은 외모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의 관계를 맺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들 공통적으로 한 마디씩 한다.

'첫인상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요.'

그렇다. 나는 쉽게 이야기하여 첫인상이 매우 좋지 않은 사람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의 관계를 맺는 것은, 나의 '열림성(openness)와 무관하게 상대방의 '닫힘성(closeness)'를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닫힘성'은 대체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욱 강하게 느끼는 것으로, 지극히 내 개인적인 조사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상담을 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일 수 있으나, 나는 오히려 이것 역시 하나의 큰 장점으로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만약 매우 호감형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아니라, 상담가의 인생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떄문이다.

물론 내가 호감형의 외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특수한 부류가 느끼는 호감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단점을 가진 본인이지만, 그래도 상담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내가 상담을 하는 원칙을 다시 언급하면, '그 사람이 되어보자'는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이런 마음, 아니, 마음까지 아니라도 상대방,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듯 하다. 포스트포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것이 가져온 가장 큰 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와 당신의 생각은 다르다, 그러나 나에게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말고 나 역시 당신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지 말라, 라는 식의 타인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라도 해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런 노력과 자세를 가진다면, 아마도 나는 더이상 '상담'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연대'의 즐거움을 더 크게 느낄테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더 상대방과 타인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도록 노력해 보는 것.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