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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고백일지도.

자기 고백일지도.  2014.10.24. 


사실 난 '꿈'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막연하게만 느껴졌고 누군가 억지로 심어주어 가지게 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라는 것이 그다지 아름답거나 찬란한 '꿈'처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직업적' 꿈은 정해놓아 누군가 나에게 '넌 꿈이 뭐니?'라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꿈을 이야기하곤 했기에 나에게 '꿈'은 가지지 못한 사람이 칭얼대는 어리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년 동안 내가 1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외쳐오던 외교관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외무고시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면, 큰 바다로 나가 범고래를 잡고자 출항했던 배가 큰 바다에 도달했을 때 들려온 소식이 '범고래는 사라졌다' 는 식의 상황처럼 말이다. 이미 바다에 나와 있었고 바다에 나오기 위해 소비해야했던 시간, 노력과 비용은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돌고래라도 잡아가자 생각하여 차선책이었던 대학원 입학을 하였지만 결국 대학원이라는 곳도 휴학을 했다. 내가 원했던 범고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지출한 매몰 비용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향후 돌고래를 잡기 위한 비용을 대는데에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꿈'이라는 단어가 우스울 때는 전혀 몰랐다. '그것도 없이 어떻게 살아?'라는 쭈볏거리는 반응을 대놓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꿈이 있다'라는 것이 내 자신감의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그러다가 꿈을 이루는 것이 좌절되고 난 뒤 그것의 소중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크기와 종류에 관계 없이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 사회적 지위나 지금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꿈을 '변경할 수'는 있을 지언정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 그리고 꿈을 가지기에 앞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점, 그 조사에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주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 또 꿈을 이루는데에도 비용이 든다는 점, 꿈을 포기 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꿈'을 꾸어야 한다는 점. 다시 말하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래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다른 꿈들을 폐기해 버리면 안된다. 꿈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선택한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른 꿈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꿈으로 넘어가는데 있어 공백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첫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다. 두 번째 꿈, 세 번째 꿈.. 이렇게 순서가 내려올 때마다 가끔은 '포기'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상황이 올 것이고, 이것을 흔히들 '실패'라고 부르지만 이때에는 좀 다르다. 단 하나의 꿈만이 있었던 사람에게 포기나 실패는 그 사람의 삶을 종결지을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일일 수 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있는 사람에게는 포기든 실패든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실패가 경험이 된다'는 말은 다음 꿈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위의 이야기는 내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대학원 휴학 이후 취업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여러 기업이나 공단 등에 원서를 썼지만 합격자 발표를 보지 않았다. 합격을 했을리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직장인'이라는 직업은 내가 아직 선택하기에는 낮은 순위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난 두 번째 꿈에도 진심을 다해 도전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몇 번째인지도 모를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고 여러 준비를 한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바라보건대 지금의 내 상황은 '공백기'이지만 이 공백기가 길어지고 있다. 큰 의미가 없는 일들을 하루 하루 해나가면서 마치 그것들이 나를 지탱하는 것들인양 생각하고 있었고, 주변의 친구들을 만나 '내가 공백기다'라는 것을 자기 비하와 자기 확신이 반반 섞은 채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자기 비하는 첫 번째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의 비하였고, 자기 확신은 두 번째 꿈에서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지금 내가 해야할 것은 자기 비하도, 자기 확신도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꿈에 대한 실현 노력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


나쁘게도 '공백기'가 익숙해졌다. 두 번째 꿈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단지 공백기를 하루하루 '즐겁지 않게 즐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스스로 분석하기에는 '내적 내전의 패전' 즉,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나만의 전쟁에서 졌다고 분석하지만 빨리 다시 전후 복구를 해야할 것임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두 번째 꿈이 자신에게 열정을 불어 달라며 손을 내밀지만 애써 외면하며 가만히 자리에 앉아 소꿉놀이나 하고 있거나 아니면 첫 번째 꿈을 아쉬워하며 회상만 하고 있다. 그리고 첫 번째 꿈의 실패 탓인지 두 번째 꿈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 긴 가래떡을 뽑아내는 기계에서 가래떡을 자르듯이 첫번째 꿈과 두 번째 꿈이 '딱'하고 끊어지면 좋을텐데 구질구질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직도 첫 번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았을까. 아니면 두 번째 꿈, 세 번째 꿈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큰 것일까.


직장인 친구들이 보면 부러워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새벽까지, 먹고 쉬고 쉬고 먹고 책보다가 영화보다가 글 쓰다가 쉬고 먹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단 1초도 편하지 않다. 내가 편하지 않은 이유는 '나이가 서른이니 이제 돈을 벌 때가 되지 않았니', '친구들은 적금 들고 결혼하고 집사고 하는데 넌 뭐하니', '대학원까지 입학해놓고 지금 놀고 있으면 어쩌자는거니', '일단 현실을 바라보고 취업을 해서 돈을 좀 모아야 하지 않겠니' 등의 이야기에 의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만 하고 선택할 두 번째 꿈이 내게서 더욱 멀어지고 있는 듯 하여, 내가 다시는 꿈을 선택하지 못할 듯 하여, 꿈을 선택하지도 못할 만큼 패배자가 되어 이번 삶을 '이리저리' 살다가 끝낼지도 모를 듯 하여 불편한 것이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참,

'공백기'의 나는 참 나약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내 성격 중 정말 나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이렇게 나약하면서도 아무런 근거 없도, 그 어떤 통계적 조사도 없고,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기대나 응원이나 비난이나 힐난이나 그 무엇이 나에게 가해지더라도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그 앞에 붙어야 할 세 글자, '무엇을'. 이것을 찾아야 한다. 아니, 채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