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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공유

추억의 공유 2014.10.24. 


2004년 여름 농활 때였다. 당시만 해도 '농활'은 농촌봉사활동이 아닌, '농촌-학생 연대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행사임에 분명했고 한총련이 지급하는 티셔츠를 입고 가긴 했지만 20살의 나는 그런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했다. 보수성향의 지역에서 고등학교까지 보낸 본인은 좌파 학생들의 운동으로 인식되는 행사에는 더욱 많이 참가하여 생각의 균형을 잡고자 했다. 2004년 5월 1일 노동절이 그 시작이었으며, 농활이 그 두 번째였다. 


막상 찾아간 농활은 정치적인 곳이 아니었다. 충북 진천의 한 마을에서 진행된 농활이 나에게 남긴 인상이란 '농사는 힘들다' 딱 이 정도였다. 사전에 농민과 농촌 생활에 대한 공부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기도 했고, 그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진천에서는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약 2주 간의 농활 중 하루는 꽃을 "따는"는 일을 했다. 장미를 기르는 하우스에 들어가 제일 높게 자란 장미를 제외한 장미를 꺾어 따는 작업에 배당되었다. 하우스 안은 더웠고 따야할 꽃은 많았다. 하루의 작업을 마치고 모아 놓은 꽃이 언덕을 이룰 정도였으니 그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손은 분주한 작업이었지만, 입은 자유로웠다. 라인 별로 두 명이 조를 이뤄 작업을 했고, 나도 한 명의 선배와 함께 한 라인에 서서 작업을 진행했다. 이떄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내 기억력의 한계는 여기까지이다. 


대화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눴다.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오후 늦게까지 이어진 작업이 끝난 뒤, 나는 나와 함께 일을 했던 선배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선배가 나를 잘 대해 주었거나 삶에 도움이 되는 대화를 나누었기 떄문이 아니었다. 단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같은 일을 했으며 같은 공간에 있었다. 일상적 공간에서 벗어나 전날만 해도 상상하지 못햇고, 세상에 그런 작업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을 같이 했다. 어떤 일이든 상상을 했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단지 그것을 '같이'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날 저녁, 총화 시간이 있었다. 그날 하루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잘못한 점이나 개선해야할 점이 있으면 이야기를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물론 칭찬할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칭찬 역시 돌아갔다. 


이날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했던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오늘 저는 아무개 선배와 장미 하우스에서 장미를 땄습니다. 출하되는 장미를 딴 것이 아니라 한 송이의 장미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나머지 장미를 따내어 버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하우스 안이라 더웠고 또 장미의 양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름다워보였던 장미가 하루 작업을 마치고 날 즈음에는 예쁜 쓰레기로 보였습니다. 

장미를 따면서 아무개 선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학교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선배였지만 여기서 나눈 이야기는 달랐습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일을 같이 하며 나눈 이야기는 이전의 이야기와 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친해졌습니다. 그래서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추억의 공유'. 누군가 자신이 아닌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추억'을 공유해야 합니다. 추억은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혼자 쌓는 추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추억은 나와 다른 누군가가 그 속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추억을 같이 쌓은 사람은 같은 추억을 공유합니다. 그 공유된 추억으로 사람은 친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친한 친구가 친한 이유는 그와 함께 공유한 추억이 많기 때문입니다. 연인과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공유할 추억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족 간에도 그렇습니다. 단지 생물학적인 연결만 있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끊임없이 공유되는 추억이 있기에 가족은 서로를 아낄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추억의 공유'라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오늘 같이 작업을 한 학우들과 좋은 추억을 공유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이후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중 몇몇 사람들과는 좋은 추억을 나누었다. 좋지 않은 추억 혹은 기억을 남긴 사람과는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어떤 사람을 떠올리면 추억이 떠오르게 되었고, 그 추억은 대부분 공유되었다. 공유된 추억이 많을수록 만들고 싶은 추억도 많다. 나쁜 추억을 가진 사람과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은 추억의 또 다른 단면일지도 모른다. 


추억의 공유.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역사'라면, 추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우정', '사랑', '배려'가 아닐까 한다.



                           2004년 당시 농활에서 찍은 사진. 컨셉은 '아메리칸 뷰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