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대학시절, 레뮤제 2012.11.27.

대학시절, 레뮤제. 

 

내 대학생활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뽑으라면 나는 '레뮤제'라는 동아리를 꼽을 것이다. 지금도 후배님들이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각자의 능력들을 키워나가는 곳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소식을 내가 들을 때면 참으로 기분이 좋다.

간단히 레뮤제라는 동아리를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지식의 수평적 확산을 통한 사회적 가치의 확산'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만들어진 강연 동아리이다. (lemusee.or.kr)

지금 한국에서 수많은 방송, 언론, 그리고 대학들에서 이전과는 다른 강연이라는 형태로 많은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본인이 건국대학교에 늦은 나이에 입학하였을 당시만 해도 '강연'이라는 것의 주도권은 이미 사회에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권위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초청 받아서 이뤄지는 강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에 의해서, 쉽게 말해서 이미 책에 적힌 내용을 육성으로 듣는 것, 그리고 사진을 한 장 찍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만 강연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많은 강연들은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던 와중에 미국에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강연이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은 TED라는 사이트에서 이뤄지고 있는 강연 형식이 매우 새롭고도 사람들의 집중력을 흐트리지 않는 최선의 방법을 찾았다는 내용의 소식이었는데, 딱히 그 형태는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신선하지도 않은 방법이었으나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그 내용인 즉슨, 강연의 길이를 약 20분 이내로 한정해서, 초청 받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정적인 시간 동안 풀어내고 그러한 강연들의 횟수와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어떤 한 명의 강연을 2시간 동안 지루하게 앉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약 20분 동안의 강연을 하게 되고, 2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중간 중간의 쉬는 시간을 충분히 주더라고 4명에서 5명의 강연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강연의 횟수를 늘릴 수 있었고, 그렇다면 강연의 질은 어떻게 늘릴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도 예를 들어보자.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글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입으로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누군가 글을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은, 글을 길고 장황하게 쓰는 것보다 핵심만 추려서 짧게,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적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말에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말을 잘하고 내용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결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말을 잘하거나 잣니의 생각을 잘 정리한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을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의 기반에서 TED는 짧은 시간 동안 각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공연들을 펼쳐내는 것이다.

지금 내가 적은 것이 강연의 형태에 대한 서술로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TED의 가치를 격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사실은 이 사이트 내의 콘텐츠가 가지는 것의 장점은, 시간적 새로움이라기 보다는 그 강연 내용의 다양성에도 많은 부분, 기존의 강연에 자극을 주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TED의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사람이 서서 목소리로 하는 강연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악기로 연주를 해보이는 사람, 비트박스를 하는 사람 등 다양한 형태의 '보여주기'나 '들려주기'가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부러 언급하지 않은 것으 아니나, 내가 내 대학생활의 동아리 활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내용적 측면보다는 그 형태적 측면에서 많은 부분 감명을 받은 것이 사실이기에, 언급해두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막상 TED의 형태를 따르게 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 떠올르지만 일단, 계속 글을 이어나가보도록 하겠다.

우리 친구 세명은 생각했다.

왜 강연은 전문가들만 하는 것이지? 우리 세 명은 각자가 다른 전공을 가지고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사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공부하는지도 모르고서 '친구'라는 틀 내에서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80년대 90년대의 대학생들의 삶은 어땠을지 상상하기가 매우 어려우나, 2000년 대 이후의 대학생들의 대학생활이는 것은, 기존의 대학생활이 우리에게 부여했던 사건사고와는 다른 모습의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친구들과 나였기에, 이런 부부분에 대한 질문은 매우 새롭고도, 어떤 행동으로 옮기기에 충분힌 유인을 제공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방식을 다양화하고, 내가 했던 경험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경험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림으로서 우리 사회에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기여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친구들, 나아가 사회 내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 방식과 플랫폼이 제공되지 않아서 자신의 생각과 지식, 경험들을 단지 자신만의 '실력'이나 '추억'으로 삼고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과 동아리라는 형식을 빌어서 이러한 모임을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동아리의 설립과 관련해서는 2012년 3월달에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오늘 이 글이 내 대학생활의 80% 아니 90%를 차지하는 동아리 생활을 돌아보는 글의 처음이자 마지막 글이 아니기에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되면 2012년 초에 있었던 논란에 대해서도 다시 분명히 언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서 만들어진 동아리의 이름은, 잡담이었다. 이 이름은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자 창립멤버 중의 한 명인 '이현진' 양의 아이디어이다. 이현진 양은 잡담의 설립 초기부터 레뮤제가 사회적 기업으로 발돋움하려는 노력을 하고, 그리고 지금의 건국대학교 내의 동아리로 안정화 되기까지 매우 큰 역할을 한 매우 고마운 친구이다. 만약 이 친구가 없었다면 지금의 레뮤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 친구와 나와의 관계는 지금 단절된 상태이다. 여기에 관련해서도 다시 언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잡담'이라는 특유의 반어법을 내포하고 있는 단체를 만들었던 우리 친구 세 명 중 한명은 불가분하게 단체의 유지에 있어서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도에 사퇴하였고, 나와 임현균이라는 친구가 주도적으로 잡담을 운영하게 되었다.

적다보니, 한참 잡담에 대한 내용을 적어나가면서 지금의 레뮤제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다 적고 싶은 마음은 들지만, 오늘 하루에 다 적을 수 있는 내용도 아닐 뿐더러, 잡담과 레뮤제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의 상이성에 따라 내가 적는 글들에 대한 사실확인을 우선적으로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시 회상의 분위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갑자기 다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오른손에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있는 듯한 자세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듯하여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내가 글을 처음 적고자 마음 먹었을 때의 심정은 서사적이지 않았기에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여튼.

내가 한때 몸담았던 레뮤제라는 동아리, 지금은 건국대학교 중앙동아리로 소속되어 있다, 가 지금은 건국대학교 내에서 나름의 지위를 형성하고 있고 또 학교에서 하는 행사들에 초청받을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앞서 내가 다시 한번 기회를 두고 적겠다고 했던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쉽게 이야기해서, 내 대학생활의 80%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 본인이 레뮤제라는 동아리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감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시점이, 아직 나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시점이며, 또 이글을 혹시 읽을지 모를 레뮤제 소속의 친구들이 받았던 충격이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글의 동력을 약하게 낮추어야겠다.

이것 한가지는 꼭 적고 싶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대학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과 가장 기뻤던 추억과 가장 슬펏던 추억을 하나씩 이야기 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면, 나는 첫 번째 추억으로 '레'를 대답할 것이고, 기뻤던 추억으로 '뮤'를, 그리고 슬펐던 추억을 말할 때는 '제'를 말할 것이다.

내 대학생활의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도 기쁘고 슬펐던 기억이 '레뮤제'이기에 나는 갑자기, 오늘 밤 내 대학생활이 그리워 이 글을 적는다.

밤새워가면서 회의하고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했던 추억과 사회적 기업으로 만들어보기 위한 노력을, 인터넷이라는 인터페이스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10년전이나 15년 전이었으면 상상도 못해봤을, 한명은 일본에서, 한명은 프랑스에서 또 그때 당시 일을 같이 했던 한 친구는 케냐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노트북을 통해 들어가며 했던 회의들은 잊을 수 없다.

 

처음 동아리방으 얻기 위해, 동아리연합회의 어처구니 없는 시간 배정으로 인해 몇 시간을 당시 동료들과 보내며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동아리방을 얻고 난 뒤 처음 그곳에 가서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내가 사간 막걸리와 여러 과자들로 지냈던 첫 고사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언제나 당당하게 내가 속한 곳은 레뮤제라는 곳이라고 이야기했으며, 나는 레뮤제가 발전하는 것이 나의 발전이라고 생각을 했다.

내게 레뮤제는 동아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후배님들이 계속 자신들의 시간과 열정을 들여가며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그래도, 나는 레뮤제에서 이제는 불청객이 되었고, 내가 그 곳에 가면,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표정을 굳혀가며 나와의 대화를 회피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나를 단 한번도 제대로 만난 적 없는 친구들이.

 

내가 금방 적었던 바로 위 문장은, 나의 피해의식일 것이다. 도둑이 제발 저리는 이유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글을 적게 된 계기를 밝히고, 두서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연히 레뮤제의 홈페이지를 들어가보았다. (lemusee.or.kr) 그곳에서 박희연 양의 강연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교환학생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레뮤제 회원들(레뮤지앙이라고 부른다)과 교환학생의 관계를 설명할 때, 지금까지 레뮤지앙들이 다녀왔거나 지금 나가있는 곳의 지도를 보여주었다.

그 지도에서, 화질의 문제인지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의 지도가 보였고 그 위에 '권현우'라는 이름, 세글자가 보였기에 너무나 반가워서 짧은 탄식을 외쳤고, 다시 내 대학생활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이름을 뺄 수도 있었을 텐데, 넣어준 박희연 양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이 글을 통해서 전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도 혹시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싫어할지 모르는 레뮤지앙들에게, 언젠가는 다시 꼭 화해하고 싶다는 이야기 역시 남기고자 한다.

오랜만의 대학 떄의 추억은 나를 한편으로 웃게도 한편으로는 울게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