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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토론이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토론이라는 것이 가지는 지위가 상당히 낮게 유지되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토론보다는 강연이나 기자회견을 통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밝히고 그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의견에 대한 반발을 '질의응답'이라는 형태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자회견을 열 수 있는 사회적 계층은 한정되어 있고, 강연이라는 포맷을 스스로 구성하기에는 비루함이 있었기에, 누군가에 의해서나 어떤 단체에 의해서 초청 받을 지위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토론이었다.

또 토론의 지위가 높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례는, 대학생들의 문화에서 토론의 실종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여러 선진국 단위의 가입기구 자료를 살펴보아도 대학 진학률이 상당히 높은 국가로 평가된다. 다시 말해서 미래 세대 국민들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대학의 내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대학이 아니라 학원에 온 듯한 생각을 들게 만들거나, 학위를 따기 위해서 들어와서 4년 동안 견디는 곳으로 보일 정도의 행태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내가 대학 사회를 평가한 것에 대해서,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대학생분들이나 학사 소지자 분들, 혹은 앞으로 대학에 들어오게 될 중고생들이 일종의 모욕감이나 언짢음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토론'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대학'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토론을 하지 않는 대학생들을 비난하려 하는 목적보다는 좀 더 많은 토론이 대학 내에서 이뤄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는 글이니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다.

대학사회에서 토론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학 졸업 후에 자신이 직업을 가지게 된 이후, 상하관계나 사회적 권력관계에 귀속되는 순간부터, 원해도 가질 수 없는 토론의 기회, 즉 대학생들만이 가지는 지위도 없고, 같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가진 '도반'들과 생각을 나눠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학생들의 토론은, 우리 사회의 토론이자 우리 미래의 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초청받지 않아도, 생각이 다른 이와 함께 자리에 앉아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지는 위험성은, 취업의 실패나 학점의 하락 등의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이의 생각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고, 공감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함께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대학생의 토론은 다양성이 추구되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가치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 '인큐베이터'적 속성은 지금 우리 사회 내의 대학생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다른 '토론 실종'의 사례는, 여러 사람들의 동네북이 되어 있는 정치 분야에서의 실종을 들 수 있다. 정치는 사회 내 다양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정치라는 큰 공간에서 대변할 수 있도록 해 놓은 일종의 장치이다. 다시 말해, 목소리가 작은 사람에게는 확성기를 주는 곳이 정치이며,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이어폰을 꽂아 준다던지 글로 몸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런 장치로서의 정치가 외려 사람들의 입을 막고 손을 묵고 귀를 틀어막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에는, 토론의 실종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라는 말이 최근 몇 년동안 우리 사회에 회자되고 있다. 소통이라는 것은 토론의 기본적인 덕목임에 틀림이 없다. 토론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의 생각에 대한 이해에의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토론이나 정치를 떠나서 인간 관계에서의 큰 문제로도 지적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의 갈등을 해소하라고 부러 만들어 놓은 정치 분야에까지 소통이 사라진 토론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말을 쓸 필요 없이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정치권에서 토론이 없다는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중 밤 늦은 시간에 TV를 틀어보면 점잖게 생긴 분들이 나와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반박을 하는 그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공중파 방송 뿐만 아니라 1년 전 새로이 종합편성채널로 선정된 여러 언론사 산하 채널에서도 그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는데 나도 동의하고, 그것이 토론으로 보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이 보기에 그러한 것들을 진정한 토론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우선적으로 앞서 적었던 '소통'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TV토론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드는 생각은, '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사람의 생각을 잘 듣고 그 사람과 자신과의 의견의 일치나 갈등의 해소를 위해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옳으니, 너의 생각은 틀렸다 라는 것을 말해주러 나왔다' 는 생각 혹은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토론이라면 한 공간에 양 끝에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동시에 기자회견을 여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소통'이라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이해하기 쉬운 개념으로 적어보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 있고, 상대방의 생각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준비하는 자세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가진 생각과 논리가 우리 사회의 가치에 부합하고 또 그것이 사실에 기초해 있다면 그러한 생각에 대해서 인정할 줄 아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 분야에 있어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 정치에서 토론이 제대로 작동하는 의회나 행정부를 가졌더라면, '직권상정'이라는 말을 우리가 들었을 때 매우 어색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용어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회 내 다수당이 가진 의석점유률을 바탕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주 당연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당이 국민들의 표에 의해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나 정책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소수 의석을 가진 정당이나 이익집단이 그 생각마저도 나라의 미래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가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는 그런 행태를 보여왔다. 결국은 쪽수가 많은 쪽이 토론에서 이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는 것이다.

가끔,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선진국이라고 일컫어지는 미국에서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부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지난 부시 미 행정부 당시 미국의 이라크 파병에 있어서의 사후적 토론이 필요했을 때, 미국의 양대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당적을 뛰어넘어 워킹 그룹(working group)을 형성하여 결의안을 도출하고, 정부에게 빠른 이라크 전쟁의 종식과 철군을 의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결의안의 내용과 관계없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생각이 다를 수 있는 정당의 사람들과 모여서 토론을 통한 결의안을 도출했다는 것 자체에서 나는 부러움을 느꼈다.

미국과 한국의 정당구조 체제가, 미국에서는 정당이 당론을 정하지 않고 의원 개개인이 가진 정치적 의사에 따라 표결하고 지지하는 정당 체제이고, 우리나라는 영국과 같이 정당의 구조가 당론을 중시하고 개인의 의사를 후순위로 둬야하는 정치-정당 문화의 차이에 있다고 지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정당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니 토론의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 정치인이나 정당은 그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대학과 정치 분야에 있어서의 토론의 실종의 예를 들어보았는데, 다시 한번 물어보도록 하자.

토론이란 무엇인가.

결국 토론은 민주주의의 피와 같은 것이다.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그 가치에 대해서 나는 '민주주의의 피'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람의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뇌나 심장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나, 나는 오히려 그런 구성물이 가지는 중요성 보다,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 퍼져있고, 또 심장과 뇌를 연결해주는 피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반문해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는 그다지 비합리적인 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다.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법이라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고 무한의 공평무사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틀 자체는 정의와 평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적 틀 내에서까지도 우리는 많은 모순과 갈등, 그리고 비리와 부정을 심삼찮게 맞딱드리게 되는 것은, 제도의 문제에 못지 않게 토론이 사라진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피라고도 할 수 있는 토론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토론은, 민주주의의 피다. 피가 마르면 뇌가 무슨 소용이고, 심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 사회는 제도적 개혁과 인적 쇄신, 그리고 절대적 가치라고 추앙받는 경제성장이라는 장치적 도그마에 빠져서 진정으로 우리가 잘 관리해야하고 또 원활히 움직여야할 '토론' 즉 민주주의의 피를 무시해 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토론이라는 것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피를 더 맑게 하는 노력이 될 것이고, 그런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대학은 신장(콩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골수로부터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민주주의를 꽃 피우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신선한 피와 같은 민주시민을 양산하는 교육체제를 형성할 것이다.

어제(2012년 12월 4일), 대한민국 제 18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대통령 후보자 1차 토론이 있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위치가 엄중하고 또 역사적인 의미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으므로, 약 30%의 국민들이 토론을 시청했다고 한다. 그 국민들은 어제의 토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대한민국의 머리 또는 뇌라고도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과 손짓, 표정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피'의 흐름을 볼 수 있었던 것일까. 보지 못했다면 왜 우리는 보지 못했던 것일까.

'피 냄새'

적고보니 살벌한 저 세 글자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붙으면 '민주주의의 피 냄새'가 된다. 우리는 앞으로 또 2번의 기회를 통해서 '민주주의의 피 냄새'를 맡아보도록 할 것인데, 그 피가 묽지 않고 진하고 힘찬 피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p.s 이번 대선에서 원활히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데에 있어 책임이 있는 후보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질 것이다. 12월 19일 이전이 됐든, 당일이 됐든, 그 이후가 되었든 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