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20161212
날씨가 추워졌다. 무더웠던 여름은 사진과 추억으로만 남았다. 추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덜 춥다는 생각도 든다. 더 추워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여름의 장마와 가을의 낙엽이 남긴 나쁜 박테리아나 세균들이 추위에 죽기를 바라는 어흥~ 마음이 있다. 또 지금보다 더 추워야 보리밭에 보리뿌리가 들뜨지 않아 내년 보리 농사가 잘될텐데 하는 으휴~ 마음도 있다. 도시 사는 사람이 별걱정을 다한다.
이런 걱정들과 별개로 겨울이 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친형은 집 밖에 나가서 노는 걸 참 좋아했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을 시절부터 나가 놀기 버릇한 형은,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가면 놀다가 누군가의 집에서 저녁밥까지 먹고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나는 날씨가 따뜻하면 형과 같이 가끔 놀러 나갈 때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집에 가만히 앉아 벽이나 스케치북에 항칠(낙서라는 뜻의 사투리)을 하며 나의 일과와 어머니의 소일거리를 만들어 냈다. 겨울이 아닌 계절에는 형과 같이 나가 놀고 싶어도, 형은 나를 번거로워했기에 같이 나가서 노는 게 서로에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형은 나에게, 너는 너무 어리고 이해가 느려 같이 놀면 답답하다고 했다. 나는 형의 말을 듣고 울며 엄마~를 불러 찾고 있으면 그 사이 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참고로 형과 나는 한 살 차이다.)
해가 지고 어머니의 걱정이 화로 바뀔 무렵, 형은 빨개진 볼로 집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노는 게 재미있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막상 밖에 나가서 할 수 있는 놀이라곤 숨바꼭질이나 자치지, 비석치기, 다방구, 팔방, 구슬치기 등 몸뚱아리 하나와 나무 막대기나 돌조각 따위라도 있으면 되는 유치하기 그지 없는 놀이들이었다. 재미의 요소는 놀이 자체에 있다기 보다, 형은 친구들과 동네의 형들과의 시간이 더욱 즐거웠던 듯 했다. 나는 형과 노는 게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집에 돌아온 형은, 손과 발을 참으로 대충 씻었다. 손을 씻은 물에 발을 씻을 때에는 발을 세숫대야에 넣고 선 채로 아래위로 스윽슥 비비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어머니한테 걸리면 혼이 나서 그때서야 제대로 다시 씻었다. (씻는 걸 참 싫어했던 형이다 싶었다가도 성인이 되어 여자친구 만나러 나갈 때 그렇게 깨끗이 씻는 형을 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이런 형은 겨울이 되면, 한 명의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친구의 성은 ‘동’이고, 이름은 ‘상’이었다. 동상이라는 친구는 형의 귀에 딱 붙어 헤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형은 그 친구가 가렵고 아프게 괴롭혔던지 자다가도 일어나 귀를 긁어댔다. 피부가 사춘기를 지나지 않아 얇고 여렸을 때였으므로 동상에 걸릴 수 있다고 쳐도, 동상에 걸릴 때까지 노는 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형이 잠을 못들 정도로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께서는 형을 깨우고 가만히 반짇고리를 꺼내오셨다. 일어나 앉은 형은,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기다렸다. 어머니는 반짇고리에서 바늘을 하나를 꺼낸 뒤 그것을 머리칼에 몇 번 샥샥 비비셨다. 그리고 형의 귀에서 검게 변한 귓바퀴 부분을 바늘로 콕 하고 찌르셨다. 준비하고 계셨던 휴지로 바늘로 찌른 귓바퀴를 감싸며 꾹 누르면, 형은 아파했지만 휴지에는 검게 변한 피가 젖어 나왔다. 형은 ‘아, 아프다~!’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귀를 빼지도 어머니로부터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양쪽 귀 모두에서 동상이라는 친구가 들러붙었던 피를 빼내고 나면, 형은 다시 전에 없던 평화를 되찾은 듯 새근새근 잠이 들곤 했다. (형의 잠자는 모습은 참 평화로웠고 고요했다. 어머니도 나도 형의 자는 모습을 참 좋아했다.)
그렇게 몇 번, 동상이라는 불청객이 형의 귀에 찾아오고 나서야 겨울이 끝났다. 한 번 동상에 걸리면 추운 겨울에 다시 놀러 나가는 게 두렵기도 했을 법 하지만, 형의 외출은 끊이지 않았다. 동상이 정말 친구라도 되었던 것일까.
요즘 아이들도 귀에 동상이 걸릴 만큼 노는지 궁금하다. 어른만큼 어린 아이들도 바쁜 시대라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을 다니고, 공부를 하느라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하는 어린이도 많다고 한다. 이 아이들에게 겨울은 어떻게 기억이 될까. ‘추운 겨울’로만 지금의 계절을 설명하는 것은, 뭔가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피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형의 귀를 보며, 신기해 했고 어이없어 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형이 나와 함께 놀아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형이 동상에 걸리면 속으로 ‘꼬시다!’라며 통쾌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다 깬 형이 어머니께 꼼짝없이 잡혀 귀에서 죽은 피를 빼 내는 것을 보며 걱정도 했을 것이다. 아프지 말지. 아프지 말지. 밖에 나가 노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형이 아프지 말았으면 했던 마음도 있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서 다시 봄이 오면, 나와도 함께 놀아달라 말하고 싶었다.
이제 같이 놀자 말하기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형은 몇 해 전 결혼을 했고, 남자 아이 한 명과 여자 아이 한 명의 아버지가 되었다. 같이 놀자 말하면 뭐라 할까. 이번에도 어리다고 할까.
겨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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