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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실히'의 기준

'열심히'의 기준은 무엇일까?      2013.3.27 


사람들은 무엇인가 할 때 '열심히'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열심히' 공부해라. 

'열심히' 참여해라. 

'열심히' 준비해라. 


심지어 '열심히' 사랑하라 까지. 


하지만 아직 나는 그 '열심히'라는 것의 기준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기준을 찾는 것을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가 '열심히'라는 것의 기준을 만들어놓았다고 한다면 내가 그 기준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기 떄문에 나는 그런 사태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는 것인만큼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높고, 또 어떤 경우에는 타방 당사자에게 폭력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런 용어를 우리는 왜 너무나도 편하게 쓰고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우선 첫번째는, 딱히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열심히' 하라는 격려 섞인 경고를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 세상에서는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열심히'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고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떄문일 것이다. 

세번째는, '열심히' 하는 말 자체가 가지는 속성인데, 이 단어를 들으면 실제로 열심히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자기확신' 혹은 '자기세뇌'와 마찬가지인 효과를 내는 듯 하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 것이고 자신이 '오늘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라고 말할 경우에는 그 '열심히'라는 것을 자신이 만족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열심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비빌 언덕'이리라. 사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에서마저도 우리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하자'라는 이야기 밖에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 언덕에 몸과 정신을 부비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는 '열심히' 라는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쓰면서 나는 회의가 들었다. 


만약 어떤이가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 학생은 열심히는 하였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하였거나, 그 학생은 선천적으로 지식을 배우는 데 있어서 재능이 없어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성과가 반영되는 학생이 아니라고 해보자.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그 학생에게 단지 그저 '열심히'만 하라고 격려하고 또는 강요할 수 있는 것인가? 


굳이 한국사회의 문제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무조건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듣고 또 우리 역시 열심히 한다는 기준을 채 마련하지도 못한 채 하루의 열 몇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학이라는 것이 주는 사회적인 가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그 '열심히'라는 기준조차 모른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또 어떤 꿈이 있는지도 모른채 그 자리에 '짱박혀(?)' 있는 것은 너무나도 비인권적이지 않은가. 


이럴거면 '열심히'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회를 원하면 될 것인데, 막상 이것 또한 쉽지 않다. 


"개천에서 용난다."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미꾸라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노력밖에 없다. 그 노력의 결실이 자신이 꿈꾸던 하늘로 향하는 용이 되는 것인데 이 때 용은 과거의 모든 노력이 정당화되고 그 결과의 단맛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단어가 '열심히' 이다. 


아마도, 그 미꾸라지는 '열심히' 했을 것이다. 어떤 노력이든 '열심히' 했을 것이다. 


학생이라면 자신의 코를 통해서 몸 속에 흐르는 피의 색깔을 확인했을 것이고, 직장인이라면 '집'이라는 공간은 휴식을 취할 공간이 아니라 잠을 자는 공간으로, 또 가족은 더이상의 사회의 최소단위가 아니라 단지 부양해야만 하는 짐과 같은 존재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열심히'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보이지 않는 총알을 피하고 자신이 심어 놓은 지뢰 또한 피하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이런 노력들은 '열심히'로 귀결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결론을 내려보고자 하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어보고자 한다. 


고등고시를 공부하고 있는 내 상황에서 '열심히'의 기준은 '합격'이다. 다른 기준을 찾아보려해도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다. 

오직 '합격'만이 '열심히'의 성패를 좌우하는 곳에서 그 기준은 상당히 높을 수 밖에 없다. 

 

기준을 낮추려는 노력은 사실상 수험생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국가공무원의 질적 저하를 내포하고 있는 듯 해 기준은 언제나 상향되는 경향을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원수가 한정되어 있는 시험에서 그 인원에 들어가는 인원을 뽑는 기준은 항상 높을 수 밖에 없고, 그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노력과 또 과정은 '열심히'의 존재유무로 귀결되는 것이다. 


매일밤 '열심히'라는 단어가 가지는 준엄한 기준을 내 몸으로 느껴보고자 하지만 언제나 그 기준은 너무나 높고 내 '열심히'의 성과는 너무나 낮다. 


답답한 마음에서 적은 이야기지이지만, 언젠가는 다같이 '열심히'의 기준을 마련해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결과로 인정받는 과정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로 인정받는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리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