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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먹여주는 것만 먹을 수는 없다.

떠먹여주는 것만 먹을 수는 없다. 2013.4.16.


많은 친구들이 취직을 했다. 취직을 한지도 이제 몇 년이 지난 친구도 있고, 이제 갓 취업의 관문을 넘은 친구도 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몇몇은 대학원을 갔거나, 아니면 스스로 '사장'이라는 지위를 얻어서 자신의 가게를 연 친구들도 있다. 또 다른 친구들은 기업에 들어가지 않은 대신, 사장이 되지 않은 대신 의사나 변호사, 약사가 된 친구들도 있다. 각자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실 크게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직 나는 궤도에 오르지 못한 인공위성 발사체라는 인상을 스스로 많이 받는다. 언제쯤 나도 궤도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걱정과 기대와 전망을 해보지만 그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최근 들어 한가지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긴 것인데,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공부를, 아무런 타이틀이 달려있지 않은 상황에서 지속하고 있다가 덜컥, 외교관이 되어버리거나 취업이 되어 버리면 뭔가, 거대해 보이는 조직이나 그 조직문화, 또는 새로운 구성원들이나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수많은 정치들, 결코 내가 학교에서 정식 과목으로 배우지 못한, '사회 내 정치'를 내가 적절하게 또 능숙하게 해 나갈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되었다.


얼마전 대학원에 진학한 아는 동생과 여러 또 다른 동생들, 그리고 한 명의 교수님과의 술자리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고 또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그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참아낼 수 없었다. 그 '감정'의 근원은 바로 '빨리 나도 내 궤도에 오른 삶을 살고 싶다' 였다. 대학원생이 되었다는 친구는 정치인이 자신의 꿈이라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고, 내가 외교관이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서류들을 내가 다 챙겨서 와야하고, 국정감사를 열게 되면 관료로서 외교관인 나는 국회의원들로부터 많은 자료 요구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 나는 결코 그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 동생이자 대학선배인 대학원생은 나에게 매우 '장난'스럽게 그리고 매우 '경박'하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처음에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지만, 내 궤도를 타고 싶은 그 심정이 나의 웃음을 울음으로 만들었고 그 술자리의 분위기 역시 울음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나는 내 보석보다 값싼 눈물을 보인 눈물샘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나는 그 이유를 적었다. 


'내 궤도' 


나는 내 궤도에 오르는 것이 지금의 가장 큰 목표이자 또 꿈이자 우리 가족의 희망이자, 하나 뿐인 삼촌이 꼭 공부로 성공해서 같이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아버지를 둔 조카의 미래이자, 그 무엇보다 내가 가장 되고 싶은 직업이라는 것을 얻는 목표이다. 그 궤도에 오른 뒤 무슨 일이 있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또 그 떄 이후의 수많은 일과 사람과 관계와 정치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오로지 그 궤도에 진입하는 것만이 모든 것의 끝인 마냥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또한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인 것이다. 


나로호가 몇 차의 실패를 거듭한 이후, 발사에 성공했고 궤도에 올랐다. 사람들은 나로호가 어느 나라 기술에 의존해 있고, 또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의 기술적 기여를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로지 '발사에 성공' 했다는 그 사실만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 하나는, 나로호는 길어야 1년의 시간동안을 궤도에서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지금 우리 머리위에 무수히 정말 무수히도 많은 우주 쓰레기 중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내게 궤도에 오르는 일은, 지금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 궤도에 무엇이 있던지 일단 궤도에 올라야 한다. 그 궤도에 오르지 못한 인공위성 발사체는 결코 인공위성 발사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발사체가 반드시 성공적으로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았다고 해서 그 위성이 궤도를 영원히 타고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닌 것이고, 미리 계산 된 우주궤도와는 다르게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변수와 사건 그리고 사고, 또 내 신변상 일어날 수 있는 건강문제나 가족문제 등 많은 것들이 중첩되어 있기에 나는 내 인생 궤도에 안정감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또 그 궤도 위에서 새로운 궤도를 찾거나 아니면 스스로 우주쓰레기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할 지도 모른다. 


사람은 떠먹여주는 것만 먹을 수는 없다. 결국은 본인이 스스로 찾아서 먹어야 하는 것이다. 궤도에 오르는 것이든, 궤도 이후에 새로운 변수에 대해서  대응하는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사람은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지금은 분명 떠먹여주는 밥에 반찬에 술에 그리고 정(情)에 익숙해져 있다. 하루 중 가끔 생각해보는 "내가 만약 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은 결국 내가 찾아 먹는 밥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나이 29살의 사지 육신 멀쩡한 청년이 혼자서 생활하며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상황에서 내가 '찾지 못한' 밥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나, 점점 어떤 형태로든 내게 다가오게 될, 새로운 궤도에서 나는 또 어떻게 '찾아 먹는 밥'을 먹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대학생이 되어서 술을 많이 마시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그정도는 아니리라. 다만 나는 내가 원한 궤도에 올라, 내 인생의 궤도 위의 궤적을 '즐겁게' '의연하게' 그리고 '호기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다음날 소풍가는 어린이의 심정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치열한 삶 속에서도 그것이 내가 원한 궤도이기를 바랄 뿐이고, 지금의 나는 그 궤도에 오르기를 바랄 뿐이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 궤도에 오른 사람이든 그 궤도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든, 궤도에 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든 누구나가 각자가 그 궤도에서 조금이라도 더 인간으으로서의 삶에 '즐거움'과 '존엄성'을 느낄 수 있기를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