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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이 승리하는 시대

극단이 승리하는 시대 2013. 4. 23. 


에릭 홉스봄이 20세기의 역사를 "극단의 시대"라고 평했다. 여기서 에릭 홉스봄이 왜 20세기의 키워드를 극단이라고 잡았는지에 대해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가 20세기에 있었던 2번의 세계대전과 또 역시 2번의 세계대공황, 그리고 세계가 양분되어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극단'이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잠깐의 생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는 어떤가. 21세기의 초입에서 21세기를 판단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너무나 섣불러서 마치 유치원생이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을 미리 정해놓는 것과 같은 이상야릇한 기분을 들게까지 한다. 하지만 2001년부터 지금 2013년까지의 기간동안의 세계와 특히, 우리나라를 생각해보건데, 나는 감히 '극단이 승리'하는 시대라고 할 것 같다. 20세기는 극단과 극단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극단'만'이 승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간은 더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 쓰는 용어는 아니지만, 영국에서 다시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앤서니 기든스'의 의론과 '토니 블레어'의 정책적 뒷받침에 의해 '제3의 길'이라는 용어가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했다. 여기서 굳이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제3의 길을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은 그 길조차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콕" 집어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글쓰는 이가 가지고 있는 안목이나 식견이 앚기 세계적이지 못한 탓에 지구 위 모든 동향을 다 살펴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여러 몇몇 사례와 특히 내가 발 붙이고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시대는, '극단의 승리'가 도래하는 시대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으리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우선, 사람들의 생각이 극단에 익숙하게 되었다는데 그 첫번째 이유가 있다. 20세기의 기억을 어쩜 그리도 깔끔하게 잊어버리게 되었는지, 모든 사람이 집단 최면이라고 걸린 듯 한 모습으로 20세기의 교훈을, 청소가기 먼지 빨아들이듯이 저 먼 기억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런 예들은 심심찮게 보여진다. 

익숙하고도 가까운 한국의 예를 들어보자. 최근 한국에서는 '극단적 보수주의'가 새롭게 그들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이름을 건 사이트는 지금 한국사회의 안정성을 무한히도 훼손하고 있지만, 그들의 보호에는 그들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기성 정당이나 단체들이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다. 그들의 논리라면 '표현의 자유'이고 '사상과 신념'의 자유라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유'의 수준을 넘어선 '방종', '방종'의 수준을 넘어선 '무질서'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익명성이라는 집단적 환각에 빠져서 그들은 그들만의 주장을 내뱉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피의자일 수 없다. 이들이 피의자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생각과 사상, 그리고 글들에서 나타나는 적개심들이 결코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기성 세대들이 하지 못하는, 혹은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만 생각하고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그런 '억압'이나 '상대적 박탈감' 등의 집약체이며, 그들의 글과 행위는 그 집약체가 너무나 집약되어 그 임계점을 넘은 폭탄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 존재 자체만으로는 '극단'이라 할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의 확장을 주도하는 것은 '극단의 승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괜찮다. 마음껏 당신들의 생각을 펼쳐라, 당신들의 승리는 우리가 보장해 주겠다"라는 확신이 그들을 더욱 폭발적으로 또 해악적으로 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결코 이런 것들이 아닌다. 전두환을 복권시켜, 다시 군인으로 만들거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의 분리,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적 영웅 추대의 공식화 등, 이런 현상들을 원하고 또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의 억압된 정신세게와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일 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승리'의 왕관을 씌워주는 것은 결국 현실 세계에서의 권력자들이고 그들은 이런 극단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극단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데 대한 거부감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적 가책을 느낄 겨를이 없다.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느낄 여유와 공간이 없는 것이다. 시대의 혜택인지 재앙인지, 현대 사회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기선들의 연결을 통해서 하루에도 수십만의 수를 넘어가며 유통되고 확신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서 그들조차 자신이 그런 글을 썼는지, 그런 댓글을 달았는지에 대해서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죄책감 등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적 감정마저도 보유하지 못한다. 이런 '정신적 분주함' 에는 극단에 익숙해도 된다는 사회적 동조나 권력의 숨은 의도는 결코 앞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채 뒷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극단에 익숙해진 모습들은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나 이들을 이용하는 세력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극단은 일반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그 빛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순진한 의미의 '성공주의'가 아니라, '어떻게든' 성공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극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또다른 원동력이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라는 최선의 명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은 신경쓰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고, 그런 상황들이 '층간 소음'이라는 매우 생활밀착적 살인동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서라도 내 집에서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감옥'이라는 집으로 들어가게 되겠지만, 이 사람들이 가졌던 극단적 사고는 결국 '극단'의 익숙함에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글쓴이는 가장 극단적인 사고가 만연하게 된 데에 대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충분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다소 어색할 수 있는 원인이겠지만, 현대 사회인들, 특히 한국인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데 익숙해 있지 못하고, 그런 결과로 인해 자신들의 생각과 사고가 어느 방향으로 이끌려 가는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시킨다. 그렇다고 충분한 시간을 준다면 사람들의 극단성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우 명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은 결코 이런 '자신만의 시간 가지기'를 실험적으로 할 나라도 아닐 뿐더러, 그런 실험이 전국적으로 일어난다고 하여도 그들은 그 실험에 부적응자로 도장찍힐 것이다.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야 만이 사회의 문제들이나, 혹은 평소 읽고 싶었던 책, 보고 싶었던 영화 등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갈 것인데, 그런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만나거나" "꿈"이라는 붉은 망토만 보는 황소가 되거나, 이런 것도 아니면 끊임 없이 다른 이들과의 연결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