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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 것

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 것. 


100년 전, 아니 5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연필이나 펜, 그리고 종이와 노트 등을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글을 쓰기 위해서, 펜보다는 손가락, 종이보다는 노트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익숙하게 여긴다. 이런 상황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원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리고 그들이 이끈 변화도 아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있어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다만 이런 변화가 있고, 그런 변화에 바탕에서 변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에는 또 다른 필요가 수반되는 것이다.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평등주의 대 엘리트주의 등은 지금까지도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고, 또 과거에는 이러한 '주의'들에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작게는 자신의 입에서 내뱉는 말에서 시작해, 크게는 자신의 존재를 던져버릴 만큼의 열정을 쏟아내었던 것일까. 


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 것은, 이런 열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사실과는 다른 세계관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고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열정이며 세계관이다. 


아쉽게도, 한국은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데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과거에는 그럴 수 있었다는 표현이, 사뭇 잘못 인식한다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십분 배제한다고 치더라도, 과거에는 있었다. 


서애 유성룡과 같은 한자는 '조선중화주의'라는 것을 새로운 세계관으로 형성시켰다. 명청교체기 이후, 중국 전통의 유교사상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조선에서는 중국 내 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세계관이 필요했다. 그런 결과로, 조선이 새로운 중화의 중심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귀착되었고, 그 표현이 '조선중화주의'인 것이다. 


지금 보면, 중국의 사상을 우리의 것인 양 빌려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나, 사대주의의 또 다른 발로라고 여길 수 있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난 뒤,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수립해보려는 노력이 있었는지, 나는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한국에게 묻고 있다. 새로운 세계관이라는 것이,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을 모으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류할 수 있고, 그러한 사실들에 기반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소하더라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실험이 있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오가지도 못하는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에는 어디로 나갈 수 있는지도, 또 어떻게 공간으로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채 사람들이 가만히 '정체'만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공간에 필요했던 것은,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붉은 색 구분선을 세워두는 것 딱 이것 한가지였다. 이 줄을 설치하자마자 사람들은 그 줄이 오고가는 방향을 나누는 기준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이후로 그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딱 이정도가 새로운 세계관의 역할인 것이다.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보자는, 말 이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무엇이 새로운 세계관인가, 하고 이 글을 읽으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반론은, 반론이 아니다. 반론이라기 보다 "새로운 세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토론을 하는 과정일 수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를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관 형성의 시작일 것이다. 


한국이 아닌, 다른 어느나라, 우리말이 아닌, 다른 어느 언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나라 사람이 만든 세계관이 무조건 틀린 것이니 그런 것을 배제하고, 오직 한국만의 것을 만들어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고 또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세계관이 있다면 과감히 배워야 할 것이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해보건대, 지금의 한국 상황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세계관은 아직 다른 나라에서도 그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있다. 일본과의 전쟁을 치르고 난 뒤, 미국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연구하기 위한 자금을 대고 루스 베네딕트라는 학자가 그 내용을 채워 넣은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정신과 근대의 형성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지만, 루스 베네딕트는 이 책을 적기 전 단 한번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서만 일본을 이해했고,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시켰다. 


누군가 이글을 읽는 외국인 중, 한국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한국의 새로운 세계관을 부탁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요약코자 한다.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내야 한다. 펜이 아닌 손가락으로 글을 쓰게 된, 아, 물론 그때에도 손가락은 글을 쓰는데 필요한 도구였다, 이후 우리의 세계관은 많이 바뀌었다. 한국은 약 50년 60년 동안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서구의 방향을 따라가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었고, 그들의 고통과 경험을 우리는 짧은 시기에 이룩하기는 했어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계관을 형성하지는 못했다는게 내 판단이다. 


새로운 세계관을 찾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연구는,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만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현재를 정확히 진단하고 또 진단한 결과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결과를 자유롭게 이야기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자유롭게'라고 적긴 했지만, 가장 먼저 '자유주의'에 대해서 논의해보아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한국의 자유주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