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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에 도전하는 것

금기에 도전하는 것  2013.5.5.


"착하게 굴거라"

"바른 생각을 하거라"

"질서를 지키거라"

"다수의 의견에 따르거라"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들은 듣고 자란다. 듣는 것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까지 한다. 노력의 결과는 '착하다 바르다'를 듣는 것으로 그 끝을 맺게 된다. 


과연 저런 이야기들은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것일까. 


에피소드를 하나 적고 가려 한다. 


역시 대학시절이었다. 고려대학교에서 모 국회의원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어 그곳에 갔다. 강연을 다 듣고 난 뒤, 함께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뒷풀이를 하였다. 술을 몇 순배 마셨을까, 자기 소개를 할 기회가 있어 나를 소개하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건국대학교 정외과 권현우라고 합니다. 오늘 강연에서 새로운 생각의 계기를 많이 찾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자리에 앉고 몇십분이 지난 뒤, 옆의 여자분과 이야기를 하게 될 기회가 생겼다. 고려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신다고 하셨다. 나에게 자기 소개 때 건국대 학생이라고 하셨던 분 맞지요 라고 물으신다. 네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선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 


제가 학교들 다니며서 수업해보고, 또 이런 강연이나 행사들 가서 건국대 학생들 만나보면 참 착한 것 같아요. 다들 예의도 바르고. 


분명 우리학교의 구성원인 학생들을 칭찬한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술이 확 깨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착하다라. 


좋은 이야기를 해주신 그 마음은 이해가 갔지만, 나는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왜 우리학교 학생들은 착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일까. 왜 다른 대학들, 예를 들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소위 한국 사회 내에서의 명문대학들이 가지는 이미지와는 다소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스스로 정해버린다. 사회의 피라미드에 자신의 이름이 꽂힐 장소를 스스로 정해버리는 것이다. 아무도 시킨 적은 없으나, 자신이 그 위치에 안정감을 느끼고 또 그런 사회적 대우를 친절히도 아주 친절히도 감내해 낸다. 


그리고 대학의 서열구조 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의 출신대학을 밝히는 경우나 상대방의 출신대학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그 자세가 사뭇 다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착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대부분 서울에서 취업을 하는 건국대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경쟁해야 하는 그룹이 어떤 그룹인 줄 명확히 알고 있고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어떤 처신을 해야하는지 대학을 입학하는 그 시점부터, 아니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착하게 지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약한 자에게 도움을 주고, 강한 자에게 그 힘의 근원을 물어보는 것, 이런 태도가 착한 것이지, 약한 자에게 약하다는 것을 꺠우쳐 주고, 강한 자의 그늘에서 안락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름이랄까 트렌드랄까 이런 조류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있더라도 그 연어는 결국 그 강물에 휩쓸려 다시 바다로 내려 올 것이기 때문이다. 


착함이라는 것, 바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순종적이라는 의미이다. 순종적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이 어구를 선택했느냐 뒤집어쓰여졌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금기에 도전하는 것. 사소한 금기에서부터 큰 금기까지, 우리 사회에는 많은 금기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금기들을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자신의 손가락끝까지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용린'이라고 불리는, 용의 비늘, 딱 한개만 반대방향으로 있어 용이 용임을 밝혀낼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 것처럼 그런 용린이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안타까운 사실이면서 다행인 것은, 우리 인류 사회가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유지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와중에, 그런 금기에 도전했던 자들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금기에 도전했던 자들은 목숨을 잃었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했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가난했다. 


착하다는 이야기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비춰지는지를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금기라는 이야기에서, 자신은 그 금기에 도전하는 사람인지, '현실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금기를 스스로 내면화하는 사람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기에 도전하는 자는, 언제나 그 동지들이 있었다. 


희망으로 끝내려 한다.